201화. 그냥 제 변덕이라고 해 두죠. (1)
"중원을 거대한 바둑판으로 본다면, 사방에서 조여 오는 포위망에서 탈출하기 위해 돌을 놓아야 할 곳은 안이 아니라 바깥이죠. 안에 동료를 만들어 봐야 전세는 바뀌지 않을 테니까."
"화산이 그 정도의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하나? 이제는 구파도 아닌 화산이?"
"구파가 아니니 가치가 있죠. 저희가 구파면 미쳤다고 당가랑 손을 잡겠어요? 다른 구파랑 같이 놀지."
당군악이 살짝 당황한 얼굴로 청명을 바라본다.
아무리 그게 맞다 해도 보통 이런 말을 입에 올리지는 않는 법이니까. 그것도 당가주 앞에서.
"가식 빼고 가자고요. 괜히 빙빙 돌려 가며 이야기하는 취미는 없으니까. 당가주님은 화산을 포섭함으로써 당가를 포위하고 있는 구파를 견제하려는 거겠죠. 그게 당가주님의 진짜 목적이구요."
"……."
"당가가 화산과 동맹을 맺었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저들은 당연히 화산의 의식할 수밖에 없죠. 그럼 당가에 대한 견제가 옅어지죠. 그만큼의 견제가 화산으로 향할 테니까요."
당군악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내가……."
당군악이 자세를 고친다. 그리고 조금 더 진지해진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자네를 잘못 봤던 것 같군."
"어떻게 보셨는데요?"
"무공만 센 어린 놈."
"……."
"무공도 센 어린놈으로 정정하겠네."
당보야.
당보야 이 새끼야.
너 나중에 두고 보자. 이 새끼 빠져 가지고 후손 관리 똑바로 안 하지?
청명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군악은 그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대체 이 녀석은…….'
당군악은 속내를 찔려 본 경험이 그리 많지 않다. 특히나 그가 살아 온 생의 절반도 살지 않은 아이에게 이리 철저하게 까발려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만한 무력에 이만한 심계라.'
당군악의 머릿속에서 화산과 청명에 대한 평가가 수정됐다. 그리고 그 수정 작업은 태도의 변화를 낳았다.
"인정하네. 나는 그걸 원하고 있네."
당군악은 간단히 청명의 말을 인정했다.
속을 뻔히 보고 있는 상대 앞에서 거짓말로 둘러대는 건 상책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된다면 협상이 어려워질 뿐이다. 차라리 깔끔하게 인정하고 털고 가는 게 낫다.
"그래서 화산의 생각은 다르다는 건가?"
"아니죠. 다를 건 없어요. 다만……."
"다만?"
"동맹을 맺는 대가로 당가는 여유를 얻고, 화산은 견제를 더 받아야 하니 불공평하다는 거죠."
"음……."
"정당한 대가를 원해요. 생색내듯 내어 주는 대가가 아니라, 정당한 대가."
청명이 가라앉은 눈으로 당군악을 바라보았다.
"그게 제대로 된 협상이죠."
"음. 그렇군. 그렇다면 내가……."
당군악이 채 말을 끝내기 전에 청명이 당군악의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아, 그 전에."
"음?"
청명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한 가지는 확실하게 하죠. 이건 당가가 화산에게 베푸는 게 아니라, 화산이 당가의 부탁을 들어주는 겁니다."
"……."
"그러니 그 위에서 내려다보는 자세는 치우세요. 저는 지금 화산을 대표하고 있으니까요."
청명의 단호한 말에 당군악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그 짧은 순간에 당군악의 표정이 여러 번 변한다. 하지만 그 변화의 끝에 나온 말에는 그리 힘이 실려 있지 않았다.
"내가 실수를 한 모양이군."
당군악이 자리에서 일어나 청명에게 포권 한다.
"사천당가의 가주 당군악이 화산의 청명 도장께 사과드리외다."
"그 사과 받겠습니다."
청명이 마주 포권을 하며 빙그레 웃었다.
다시 자리에 앉은 둘이 말없이 서로를 마주본다.
겉모습은 처음과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 속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당가가 무엇을 해 주면 화산의 우리의 손을 잡아 주겠는가?"
"세 가지요."
"세 가지?"
"첫 번째는 무기예요."
당군악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당가의 독과 암기는 어떤 경우에도 외부로 나갈 수 없네. 당가의 암기를 원한다면 이 협상은 없던 걸로 하겠네."
"암기 말구요. 화산은 암기 가져다가 쓸데도 없어요."
"그럼?"
청명이 말없이 허리에 찬 검을 뽑았다.
당가의 가주 앞에서 허락도 없이 검을 뽑는 건 무척이나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당군악은 그 행동에 의도가 있으리라 짐작하고 가만히 지켜보았다.
"보이세요?"
"음."
청명이 뽑은 매화검은 완전히 박살이 나 있었다.
"질이 좋지 않군."
"제가 무리한 것도 있지만, 애초에 그리 좋은 검이 아니죠.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화산에는 돈이 없었으니까요. 이제는 돈이 생겼지만, 좋은 검을 대량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야장을 구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죠."
"그런 곳은 이미 다른 문파들이 선점했을 테니까."
"네. 그런데 여기에는 중원 최고의 야장들이 있죠. 검을 만드는 것 정도는 식은 죽 먹기처럼 할 수 있는."
"흐음. 명필가는 붓을 탓하지 않는 법이라지 않는가?"
"헛소리죠. 명필가들 집에 가 보면 붓이 백 개는 넘을 걸요?"
"하하. 맞는 소리지."
당군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하제일의 장인들을 보유하고 좋은 무기를 만들어 내는 것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 당가다. 그러니 무기의 중요성을 알아주는 청명의 말이 싫지 않다.
"검이 나빠도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말이, 좋은 검과 나쁜 검의 차이가 없다는 뜻은 아니죠. 당가의 제련술은 천하제일이라 들었어요. 그런 당가가 매화검을 만들어 화산에 공급해 준다면 좋겠네요."
"받아들이지. 어렵지 않은 일이니까."
당가의 능력을 감안하면 규모가 줄어든 화산에 검을 만들어 주는 것 따위는 식은 죽 먹기에 불과하다.
그러니 다음에는 더 큰 것이 나올 것이다.
"두 번째는?"
"기술을 하나 전수해 주세요."
당군악이 다시 눈을 찌푸렸다.
"잘 아는 것 같으면서도 자꾸 무리한 말을 하는군. 당가의 비전은 혈족이 아니면 이을 수 없네."
"자꾸 똑같은 말을 하게 하시네요. 비전 말구요."
"음? 그럼?"
당가의 비전이 아닌 기술? 당가에 그런 것이 있었나?
의아한 당군악의 시선을 받은 청명이 말없이 웃통을 벗었다.
"……."
그리고 자신의 배에 칭칭 감긴 붕대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흠."
상처가 있던 자리에는 이제 붉은 기가 조금 남아 있을 뿐이다. 불과 사흘 정도 만에 비도에 찔린 상처가 완전히 나아 버린 것이다.
"굉장한 회복력이군."
"의술이 좋은 거죠."
"……설마 자네?"
"네. 제가 원하는 건 당가의 의술이에요."
"……."
당군악의 표정이 묘해졌다.
당가의 의술?
물론 그건 당가의 비전이라고 할 수 없다. 당가의 진정한 비전은 독과 암기술이었으니까.
하지만 쉬이 전수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유래가 없었으니까.
"왜 관심을 가지는 건가? 여태껏 당가의 의술을 배우려 하는 이는 없었는데."
"필요하니까요."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당군악의 말대로 당가의 의술은 딱히 가치가 없다. 당가의 의술만으로 의방을 여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유?
간단하다. 질병을 치료하지 못하니까. 오로지 외상과 내상에만 집중한 의술이 당가의 의술이다.
생각해 보라.
무인이 아닌 이상 외상을 입거나 독에 중독되고, 내상을 크게 입을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것만 하겠다고 의방을 열었다가는 주변에서 누가 다치기만 바라다가 현판을 내려야 할 것이다.
하지만.
'화산에는 필요해.'
꿈에서 당보가 알려 주었다.
의술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도 당보의 말을 제대로 들어 먹지 않았다. 의술로 부상에 대비하느니 그 시간에 더 강해지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더 강해진다면 부상을 입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래서 청명이 직면한 현실이 무엇이었는가?
모두가 죽었다.
청명이 그때 당가의 의술을 알고 있었다면 몇 사람이라도 살릴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당시의 청명이 아는 건, 기껏해야 내공을 불어넣는 잡기뿐이었다.
'내공으로 잘린 내장을 이어 붙일 수 있나?'
어림도 없는 소리.
만약 청명이 그때 의술을 알았다면 당보는 그렇게 죽지 않았을 수도 있다. 가슴에 칼이 박힌 채 그의 손을 잡고 당가를 부탁하던 당보의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화산의 제자들이 그런 일을 겪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 무력감과 그 슬픔은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컸으니까.
"화산에 당가의 의술을 전수해 주세요. 그럼 자연히 사람이 오고 가게 될 테니 친분도 두터워지겠죠."
"으음. 쉽지 않은 일이네. 원로원도 설득해야 하고."
"그러니 조건으로 꼽았죠."
당군악이 미간을 좁혔다.
분명 쉽지 않다. 하나…….
"내가 어떻게든 관철해 보겠네."
화산을 얻는 대가라면 내어 줄 수 있다. 아니, 반드시 내어 주고 화산을 얻어야 한다.
"이것까지는 내가 어떻게든 할 수 있는 부분이네. 하나 여기까지 듣고 나니 마지막 세 번째 조건을 듣기가 겁나는군. 가장 큰 것이겠지?"
"네. 가장 큰 거예요."
"그게 뭔가?"
청명이 살짝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당군악을 똑바로 보며 말한다.
이건 화산의 부탁이 아니다.
이것만은 청명의 부탁이었다.
"화산을 친구로 생각해 주세요."
"그야 당연한 것 아닌가. 우리는 동맹을……."
"동맹이 아니라 친구."
"……."
청명의 목소리는 단호하기 짝이 없었다.
"조건과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동맹이 아니라. 어려울 때 손을 내밀 수 있는 친구. 제가 원하는 건 그런 관계예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이다.
이건 약속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고, 약속한다고 해서 지켜질 것도 아니다. 물론 청명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해하기 어렵군."
당군악이 솔직하게 말했다.
"지금까지 자네가 요구한 것들은 모두 나름의 이유가 있었네. 하지만 이건 딱히 이유가 보이지 않는군. 내가 놓친 것이 있는가?"
"없어요."
"그럼에도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뭔가?"
"글쎄요."
청명이 살짝 눈을 감았다.
- 도사 형님!
그런 얼굴 하지 마라.
망할 놈아.
눈을 뜬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제 변덕이라고 해 두죠."
"변덕이라……."
당군악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자네 알고 있는가?"
"뭘요?"
"당가와 함께하고 싶어 하는 이들은 그동안 수도 없이 많았네."
그럴 것이다.
당가는 사천의 패자였으니까.
"하지만 그 누구도 당가와 친우가 되고 싶다는 말을 한 이는 없었지. 아주 재미있는 말이었네."
"그래서 대답은?"
"대답이라……."
당군악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간다.
"우리는 친우를 어찌 대해야 하는지 모르네."
"……."
"그러니 화산이 알려 주면 좋겠군. 친우란 어떤 것인지 말이야."
청명이 씨익 웃었다.
"어렵지 않은 일이죠."
"그러면 좋겠군."
당군악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낯간지럽군.'
친구. 친구라.
상상도 못 한 말이다.
하지만 그 어린아이 장난 같은 말이 당군악의 가슴을 간질인다. 당군악이 이제껏 본 이들 중 가장 속을 알 수 없는 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더욱.
"세 가지 조건은 받아들이지."
"네. 그럼."
"이걸로 당가와 화산의 동맹이 체결된 걸로 알겠네. 이제 문제는 이 협상을 화산이 받아들일까 하는 거지."
"제가 서찰을 적어 드릴 테니, 그걸 직인과 함께 화산으로 보내세요. 그럼 될 거예요."
"화산에서 자네의 영향력이 그 정도라는 건가?"
"아뇨. 그것보단……."
"응?"
청명이 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장문인도, 장로님들도 워낙 소외받고 무시당하는 것에 한이 맺히신 분들이라……. 당가의 사정을 알면 눈물을 뿌리면서 반갑다고 할걸요?"
"……."
당군악의 볼이 파들파들 떨렸다.
천하의 당가가 얻어맞고 다니는 놈 취급을 받다니…….
"여튼 알겠네. 그럼 이걸로……."
"어디 가세요?"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당군악이 움찔하여 청명을 바라본다.
"할 말이 남았는가? 빠르게 처리를 하려면 지금 바로 움직여야 하네만."
"협상을 해야죠."
"협상은 조금 전에 끝나지 않았는가?"
"에이. 그건 화산이랑 한 협상이죠."
청명의 손가락이 어딘가를 쿡쿡 찌른다.
"이건요?"
상처.
이제는 붉은 기만 남아 있는 상처에 청명의 손가락이 닿아 있다.
당군악의 눈이 파르르 떨린다.
"처, 천독단을 주지 않았는가!"
"에헤이! 이거 큰일날 분이네! 사람 죽을 뻔한 일을 그깟 영약 하나로 넘기시려고! 사람 나고 영약 났지! 영약 나고 사람 났어요?"
"……."
"나니까 살았지, 나니까! 다른 사람이었으면 죽었어요! 그런데 그 천독단인지 뭔지 하나 던져 주고 입을 싹 닦으시겠다?"
"아, 아니……."
"크으. 당가가 친구를 대하는 방법이 매몰차기 짝이 없네요. 뭐든 다 줄 것처럼 굴더니 쯧쯧쯧. 이러니 친구가 없지, 이러니! 사람이 신의가 있어야지!"
당군악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원하는 게 뭔가?"
"말해도 돼요?"
"당가가 신의가 없다는 말은 도저히 참을 수 없네! 어디 한번 말해 보게! 원하는 게 뭔가?"
"아, 그래요?"
청명의 눈이 반짝였다.
"뭐 그리 대단한 건 아니고……."
"말해 보게."
"아뇨. 말로 할 것도 아니고."
"……응?"
청명이 벗어 던진 윗도리를 뒤졌다.
"어디 보자. 여기 있었는……. 아! 여기요."
응?
저게 뭐지?
책자?
청명이 옷에서 꺼낸 책자를 당군악에게 내밀며 빙그레 웃었다.
"말로 하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미리 정리해 왔어요."
"……."
"헤헤. 준비성이 좋다고 칭찬하지는 않으셔도 돼요. 이런 건 기본이니까요. 서로 편하죠."
"……."
당군악은 새삼 깨달았다.
모든 화는 입에서 나오고.
그 화는 저 마귀 놈을 만났을 때 폭발한다는 것을 말이다.
잠시 후.
당군악이 처소에서 나오는 모습을 본 당가의 식솔들은 '가주께서 난생처음 보는 넋 나간 얼굴로 돌아다니셨다'며 수군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