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200화 (200/1,567)

200화. 억울하면 너도 살아나든가. (5)

두 사람이 당가를 질주했다.

"청명 소협! 거기 좀 서 봐요!"

당소소가 치맛자락을 부여잡고 청명을 향해 돌진했다. 하지만 청명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부리나케 달아났다.

"잠깐 이야기 좀 하자니까! 잠깐! 말만 조금 나눠 보면 마음이 바뀐다니까요! 당과 사 줄 테니까! 거기 서 봐요!"

"당과는 얼어 죽을!"

청명이 단호하게 질주하며 이를 갈았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아오. 저거 대가리를 깨 버릴 수도 없고 귀찮아 뒈지겠네!

"거기 좀 서 보라니까! 야, 인마! 너 거기 안 서?"

청명이 눈앞에 보이는 전각으로 일직선으로 달려 들어가 재빨리 문을 닫아 버렸다.

그리고 문에 바짝 붙어서 바깥쪽의 동태를 살폈다.

'멈췄군.'

제아무리 당소소라고 해도 이곳까지는 들어오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청명이 몸을 돌렸다.

"……."

"……."

당군악과 청명의 시선이 서로 마주친다.

"……왔는가?"

"……네."

뭔가 미묘한 감정이 두 사람 사이에 흐르기 시작했다.

"일단은……. 그래, 일단은 앉게."

"그러죠."

청명이 당군악의 건너편에 앉았다. 그러자 당군악이 말없이 찻주전자를 청명을 향해 슬쩍 밀었다.

"차 좀 들겠는가?"

"괜찮아요. 몸에 열이 나서."

"찬 걸세."

"아, 그럼 뭐."

청명이 잔에 차를 따르고는 단숨에 마셨다.

"크."

그러더니 잔을 탁 내려놓고는 당군악을 바라보았다.

"……거 다 좋은데."

"음?"

"뭔 놈의 도사한테 딸내미를 시집보내시려고 합니까? 거 아무리 피는 물보다 진하다지만, 이거 너무 노골적으로 나오시는 것 아닙니까?"

"노골?"

당군악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응?"

그 반응을 본 청명이 고개를 갸웃한다.

"당가주님이 시킨 것 아니었어요?"

"내가 눈이 삐지 않고서야 너한테 내 딸을!"

"……."

"……."

분위기가 묘해진다.

"아니. 그럼 쟤는 왜 저러는 건데요?"

"난들 알겠냐고!"

당군악이 허벅지를 움켜잡았다.

- 아,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요! 소개만 시켜 주세요! 소개만! 그럼 아버지는 내가 이러다가 뒷방 늙은이에게 시집갔으면 좋겠어요? 눈 딱 감고 소개만 해 주면 된다니까요!

"끄으으으으응!"

당군악이 머리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힐끔 청명을 본다.

물론 화산신룡은 좋은 혼처다. 당가의 입장에서 보면 이보다 더 좋은 혼처는 없다. 우선 차기 천하제일인의 자리를 맡아 두다 못해 의자째로 뜯어서 화산에다 던져 놓은 사람이 청명 아니던가?

'지금도 이렇게 강한데, 십 년만 지나면 나는커녕 조부님이 살아 돌아오셔도 못 당한다.'

아마 이 나이에 이만한 무력을 가진 이는 무림의 역사를 통틀어도 흔치 않을 것이다.

게다가 배경도 적당히 당가가 발을 뻗기 좋은 화산이지 않은가? 당가 가주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군침이 절로 흐르는 자리다.

다만…….

'이놈을 내가 사위로 맞아야 한다고?'

가주는 사람이 아닌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청명에게 딸을 시집보낸다는 건 도저히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그런 꼴 못 본다!'

당군악의 두 눈이 불타올랐다.

애지중지 키워 온 딸이다. 꽃처럼 자라나는 딸을 보는 아비의 마지막 소망이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아닌가?

매파가 수도 없이 방문하고, 가문의 원로들이 잔소리를 해도 어떻게든 지켜 낸 딸내미거늘.

뭐? 청명?

에라이!

"꿈도 꾸지 말게."

"아니, 본인이 소개시켜 줘 놓고!"

"그건 걔가 해 달라니까 해 준 거고!"

"……."

청명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당군악을 바라보았다.

"듣고 보니 억울하네? 제가 뭐 어때서 그래요?"

그럴 생각은 전혀 없지만, 이렇게 평가절하를 당하면 발끈하는 것이 인지상정.

하지만 당군악은 냉정했다.

"자네는 정말 훌륭한 무인이지."

"그렇죠!"

"하지만 좋은 사람은 아니잖은가?"

"……."

전생과 이생을 통틀어 이만큼 반박하기 힘든 말을 들어 본 경험이 몇 번이나 되던가?

입만 열면 청산유수로 말을 쏟아 내던 청명도 이 말만큼은 반박하지 못했다.

"어……. 그게. 어……."

그렇긴 하지.

거참 날카로우시네.

"아비는 딸을 좋은 무인에게 시집보내는 게 아니라, 좋은 사람에게 시집보내고 싶어 하지. 당가주라는 내 입장이 적극적으로 막아서지 못하게 할 뿐일세."

"양립이 힘들어 보이시네요."

"힘든 일이지."

당군악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기에 나는 자네와 화산이 내 돌파구가 되어 줄 거라 믿고 있네. 준비는 끝냈는가?"

"물론이죠."

"그럼 이제 이야기를 해 보세. 자네가 당가에 원하는 건 무엇인가?"

청명이 단순히 당소소를 피하기 위해서만 이곳에 온 게 아니다. 오늘 당군악과 만나 협상을 하는 것은 이미 정해져 있던 일이었다.

청명이 얼굴에 웃음기를 지우고 당군악을 바라보았다.

"사숙을 불러야 할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조금 더 진중한 자리가 될 수는 있겠지만……."

당군악이 살짝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속내가 쉽게 나오지는 않겠지."

"흐음."

청명이 당군악을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재미있는 아저씨야.'

더없이 실리적인 것 같으면서도 명분에 집착하고, 가족조차 희생시킬 정도로 냉정해 보이지만, 잔정이 있다.

'당보와는 다른 사람이네.'

하긴, 아무래도 당가의 가주라는 무거운 중임을 맡은 사람이 당보처럼 자유로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보는 무학의 재능이 어마어마한 덕분에 당가의 태상 장로 자리라도 꿰찬 것뿐, 원래대로라면 가문에서 축출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놈이었으니까.

"뭐, 좋아요. 우선."

청명이 당군악을 가만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정확하게 하고 들어가죠. 당가는 화산과 동맹을 맺고 싶은 건가요?"

"내가 원하는 건 화산이 아니라 자네일세."

"하지만 저는 화산과 뗄 수 없는 사람인데요?"

"알고 있네. 그저 자네가 그 사실을 알고 있길 바랄 뿐이지. 자네를 얻을 수 있다면 화산과의 동맹도 얼마든지 맺을 수 있네."

당군악이 미소를 지었다.

"화산을 지원하는 것 역시 어렵지 않지. 그만큼이나 당가가 자네를 높이 봤다는 것을 잊지 말게나."

청명도 당군악을 보며 마주 웃었다.

"그러니까 저 하나를 보고 화산을 지원해 주시겠다."

"과한 일이지. 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네."

"하하하. 역시 가주님이시네요."

"무슨 의미인가?"

"거짓말에 능숙하시다고요."

"……."

당군악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무슨 의미인가?"

"아아. 그런 얼굴로 보지 마세요. 화산과 동맹을 맺으려 하는 사천당가의 뜻에 불순한 의도가 있다는 말은 아니니까. 하지만 그 일방적으로 베풀어 준다는 시혜적인 태도는 조금 거슬리네요."

"흠."

당군악이 가만히 청명을 보며 말했다.

"자네가 아직 어려서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모양인데, 물론 자네의 무력은 뛰어나지만 그건 아직은 가능성의 영역이네. 범의 새끼가 꼭 범이 된다는 법은 없지."

"네. 그건 그렇죠."

물론 청명은 경우가 다르지만, 당군악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걸 감안한다면 화산은 당가와 대등하게 협상할 수 없네. 그리고 설사 자네가 천하제일인이 된다고 해도 마찬가지야. 자네 혼자 화산을 다른 문파들과 대등하게 만들 수는 없네."

"물론 그렇게 생각하시는 게 타당하죠."

"그런데 내가 자네들을 대등하게 여겨야 한다는 말인가? 어떤 이유로?"

청명이 피식 웃었다.

"왜 이러십니까. 당가주님. 협상이라는 것은 대등한 이들끼리 하는 게 아니죠. 필요한 것이 있는 이들끼리 하는 거죠."

"……음?"

"화산이 당가를 원하는 게 아닙니다. 당가가 화산을 원하는 거죠."

당군악이 미간을 좁혔다.

뭘 알고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청명이 그런 당군악의 시선을 받더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저벅저벅 걸어 벽 쪽에 서더니, 걸려 있던 커다란 사천의 지도를 뜯어 냈다.

"음?"

지도를 가져와 탁자 위에 펼친 청명이 손가락으로 사천당가를 짚었다.

"여기가 당가죠."

"나도 눈은 있네."

"아래에는 아미가 있고."

"……."

"위쪽은 청성. 우측으로 가면 무당. 그 위쪽에는 종남이 있죠. 아 물론 저 아래에 점창도 있지만 그건 논외로 하죠. 거기에 점창이 있다고 딱히 달라질 건 없으니까요."

당군악이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표정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장난기를 싹 뺀 무인의 얼굴.

대 사천당가를 이끌어 가는 가주에 걸맞은 얼굴이었다.

"이제 진심이 되셨네요?"

하지만 청명은 되레 여유 만만한 얼굴로 그런 당가주의 기세를 받았다.

'당가의 가주라는 사람이 그리 허술할 리가 없지.'

당가에 들어온 이후 당군악이 보였던 모습이 모두 가식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당보처럼 당군악 역시 천성은 가벼운 이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사천당가의 가주라는 자리는 쉬이 움직이는 이가 맡을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당군악이 원하는 건 분명하다.

철저한 실리.

얻을 것이 없었다면 청명을 좋게 보았다고 해도 이토록 무한한 호의를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뭔가?"

"공교롭지 않나요?"

"무엇이?"

"사방이 막혀 있죠. 그것도 당가와 대등하거나 그 이상의 힘을 가진 구파들로 말이죠. 거기에 사천에 쫙 깔린 거지들까지 생각하면. 음……."

청명이 지도를 보며 몸을 떨었다.

"숨도 못 쉬겠네요."

"……."

당군악이 살짝 여유를 되찾는다.

"자네는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본가와 구파는 사이가 그리 나쁘지 않네. 아니 오히려 전우이며 동료라고 할 수 있지."

"네, 그렇겠죠."

청명이 어깨를 으쓱한다.

"마교가 패망하기 전까지는 말이죠."

일순 당군악의 눈에 새파란 빛이 흘렀다.

청명은 그런 당군악의 반응을 눈여겨보며 말을 이어 갔다.

"공동의 적이 있을 때는 뭉치겠죠. 하지만 적이 사라지면? 뭉쳐 있던 이들은 이권에 따라 갈라서고 새로운 적을 찾을 수밖에 없죠. 그게 설령 지금까지 함께 해 온 동료라고 할지라도 말이에요."

"……자네."

"다른 세가들은 그리 큰 문제가 없죠. 남궁과 팽가, 모용 등 쟁쟁한 세가들은 다들 동쪽에 있으니까요. 서로가 서로를 도울 수 있죠. 그런데 당가만 유일하게?"

"……서쪽에 있지."

"네. 그리고 다른 세가들과 이어질 길을 구파가 모조리 차지하고 있죠. 다시 말하자면 오대세가니 뭐니 해도 결국 당가는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거죠. 아닌가요?"

당군악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청명이 그의 내심을 정확하게 찔렀기 때문인지, 그게 아니면 이 황당한 해석에 당황해서인지는 모르지만, 당군악은 잠시 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야 무거운 한숨을 내쉰다.

"계속해 보게."

"당가는 포위당해 있죠."

"……."

"한 지방의 패자라는 말은 굉장히 좋은 말이에요. 하지만 다시 말하면 그 지방을 벗어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거죠. 지방의 패자가 된 이들은 결국 여기로 눈을 돌리죠."

청명이 중원의 한가운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닌가요?"

"……."

"아니라도 상관없어요. 사방에서 구파에 둘러싸여 압박을 받는 모양새는 결코 당가가 원하는 형세는 아닐 테니까. 그렇기에 당가는 친구가 필요하죠. 저들을 견제해 줄 친구가. 그런데 어라? 마침 여기에."

청명의 손가락이 지도를 타고 이동했다.

그가 가리킨 곳은 섬서.

종남과 무당의 등 뒤였다.

"화산이 있네?"

"……."

"헤헤. 그것 참 공교롭네요. 왜 여기 화산이 있을까? 절묘하게 무당과 종남을 견제하기 좋은 위치에 있네요? 거참 기이하게."

청명의 너스레에 당군악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진다.

'대체 이놈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당군악의 표정을 본 청명이 빙그레 웃는다.

"에이. 그렇게 긴장하지 마세요. 별 이야기도 아닌데요, 뭐."

"하나 물어도 되겠는가?"

"네."

"이 생각을 언제부터 했는가?"

"음. 아마……."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가 사천에 도달했다는 말을 당가주님이 들었을 때쯤?"

"……."

당군악은 그제야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이놈을 전혀 잘못 봤다.'

힘만 센 멍청이가 아니다.

이놈은 구렁이다. 그것도 능구렁이.

그리고 어쩌면 오늘 이 자리에서 그 구렁이의 꼬리가 당군악의 목을 조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청명의 손바닥 위에 있다는 느낌에 등골이 서늘해지는 당군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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