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억울하면 너도 살아나든가. (4)
"끄으으으으."
녹초가 된 청명이 침상에 드러누웠다.
그 모습을 본 백천과 윤종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괜찮냐?"
"으으……. 저 찰거머리가."
청명의 얼굴이 검게 죽어 있었다.
그에게는 무릉도원이나 다름없는 당가였지만, 단 하나의 조건이 바뀌면서 순식간에 지옥으로 변해 버렸다.
당소소는 그 시간 이후로 청명에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대전에서 밥을 먹으면 옆에 붙어서 밥 시중을 들려 했고, 술을 먹으면 술병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러다가는 측간까지 따라올 기세였다.
결국 질려 버린 청명이 가까스로 달아나 백천의 숙소로 도망쳐 들어오고 만 것이다.
"네 방에 가면 되잖아."
"……사숙."
"응?"
"나 진짜 무서워서 이러는 거거든?"
"……."
청명의 너스레를 듣고 있던 윤종이 피식 웃는다.
"나름 괜찮던데, 왜."
하지만 백천은 영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주둥이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야지. 과분하지, 과분."
"그렇지요. 심지어 저 당가주의 독녀라잖습니까."
청명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독녀(獨女)가 아니라 독녀(毒女)겠지!"
"……그도 맞는 말이지."
"혼인은 얼어 죽을 혼인! 내가 도산데 무슨 놈의 혼인이야!"
"화산 도사는 혼인해도 되잖아. 안 막는데."
윤종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지. 사문 어른 중에서도 혼인하신 분들이 있고."
"끄으으응."
청명이 다시 널브러졌다.
'미쳤다고 당가주 딸이랑 혼인을 하냐?'
야, 이 양반들아. 독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저게 독이에요. 독. 한번 삼키면 뱉지도 못하는 독!
아니, 저 양반이 독왕이라더니 이런 독을 푸네!
차라리 살포된 진짜 독이라면 내공으로 날려 버리든 검풍으로 쓸어버리든 할 텐데, 이 독은 무력으로는 막을 수가 없다.
청명이 세상에서 제일 곤란해하는 것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다. 당가주가 준비한 비수가 청명의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온 것이다.
"그렇게 괜찮아 보이면 윤종 사형이 하지 그래?"
"나는 저쪽에서 원하지 않을걸?"
"그래도 알긴 하네."
"뭐?"
청명이 드러누워 딴청을 부리자 윤종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살짝 사악한 얼굴로 백천에게 말했다.
"사숙. 생각해 보면 나쁜 일은 아닙니다."
"응?"
"예로부터 장가를 가야 철이 든다고 하지 않습니까. 혼인하면 저놈도 정신을 좀 차리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화산과 당가가 혈연으로 끈끈하게 이어지는 것이니 더욱 좋구요."
"윤종아."
"예?"
"나는 오늘만큼 네게 실망한 적이 없었다. 이 사숙은 가슴이 아프다."
"왜 그러십니까?"
"저놈과 혼인하여 살아야 할 여인의 입장은 생각해 보지 않느냐?"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죽여 주십시오, 사숙."
"아니, 이것들이?"
청명이 눈을 부라리자 윤종과 백천이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면서 헛기침을 했다.
'틀린 말도 아닌데 뭐.'
'양심은 있어야지.'
그때, 조걸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사천당가 가주의 딸이 천하의 절색이라 당가주가 보배처럼 아낀다고 하던데, 그런 딸을 저리 내보낼 정도면 네가 어지간히 마음에 든 모양이다."
"됐다고 전해 줘."
"그래도 일단 저쪽에서 우릴 좋게 봤다는 거겠지."
"좋게 본 사람한테 독을 투척하나? 독을? 그게 당가식 환영법인가?"
청명이 자신이 처한 상황에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끄응. 저 아저씨 고단수야."
아니면 그냥 대책 없이 저돌적인 건지도 모르고.
여하튼 덕분에 청명은 밖으로 나갈 꿈도 꾸지 못하고 전각 안에 틀어박혔다.
"……왜 안 나오지."
당소소가 소매를 물어뜯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당잔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누님. 적당히 하는 게 어떻습니까?"
"넌 가만히 있어."
당소소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입술을 오물거렸다.
"이상하다. 이렇게 나를 피할 리가 없는데."
"……왜요?"
"예쁘잖아."
"……."
당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맞는 말이라 뭐라 말도 못 하겠고.'
예로부터 바른 말 하는 사람들이 일찍 죽는다더니, 그 이유가 뭔지 알 것 같은 당잔이었다.
"도사라서 눈이 없는 건가? 아니면 산골에만 박혀 살아서 미인을 알아보는 눈이 없나? 왜 나한테서 도망가지?"
"……여자에 관심이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세상에 그런 남자가 있어?"
"……."
당잔이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상하군.'
사실 당소소는 시집을 가기 위해 눈이 뻘게져 있는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혼인을 기피하던 사람에 가깝다. 그런 사람이 왜 돌연 마음을 바꿔 먹었다는 말인가?
"화산신룡이 마음에 드신 겁니까?"
"잔아."
"네. 누님."
"나 어제 저 사람 처음 봤다."
"……."
"뭘 알아야 마음에 들든 말든 하지. 내가 신통력이 있어서 사람 속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니. 그런데 왜 이리 적극적이십니까?"
당소소가 살짝 열이 오른 얼굴로 당잔을 바라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내가 어디로 시집갈 것 같냐?"
"……."
당잔이 아무 말 못 하고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는 나를 너무 사랑하시지. 하지만 당가의 가주시다. 아버지는 당신의 입장과 당가의 입장 중 당가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시는 분이야.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때가 오면 나를 적당한 곳에 시집보낼 수밖에 없다. 그럼 나는 사천의 유력가나 권세가의 집으로 시집을 가야겠지."
"그렇겠지요."
"나는 그런 데서는 숨 막혀 죽어. 그래도 어쩌겠느냐? 내 운명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였지. 당가주의 딸로 태어난 이상 피할 수 없는 거니까. 그런데……."
"화산신룡은 다르다?"
"산에 박혀 산다는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쨌거나 아버지가 인정한 사람이야. 후대의 천하제일인이라며?"
"이왕 혼인을 할 거면 천하제일인의 아내라는 명예라도 얻고 싶다?"
당소소가 정색하며 당잔을 노려보았다.
"미쳤니?"
"예?"
"그런 게 무슨 소용이야. 내가 천하제일인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럼 왜……?"
"천하제일인쯤 되는 사람이라면 수련하느라 집에 안 들어오고, 바빠서 집에 못 들어오겠지! 그럼 나는 혼자 꽃처럼 시들어 가겠지!"
"아……."
그런 슬픈…….
"이렇게 좋은 혼처가 어디 있어!"
당잔이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당소소를 바라보았다.
아니. 좋다고?
그게?
"그게 좋은 겁니까?"
"사사건건 다 간섭받는 생활보다는 백배 낫지. 유력가에 시집가면 물 먹는 것 하나 격식을 갖춰야 할 텐데. 넌 그렇게 살 수 있냐?"
못 살지.
에이. 그렇게는 못 살지.
"남 신경 쓰지 않고, 내 생활을 지킬 수 있는 혼처는 다시 안 와! 절대로! 나는 죽어도 저 인간을 잡아야 돼!"
당소소의 눈에 불꽃이 피어났다.
"아버지는 반대하시지만, 아버지가 내 인생 대신 살아 주는 것도 아니잖아? 안 그래?"
당잔은 멍하니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다.
'누이는 계획이 다 있구나.'
당가를 위한 계획도 아니다. 오로지 행복해지겠다는 목표! 그 목표에 대한 열정에 박수가 나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화산신룡이 그리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닐 텐데요. 누님 마음대로 되지는 않을 겁니다."
"얘가 또 뭘 혼자 착각하고 이래?"
"네?"
"나는 저 사람을 휘두를 생각이 없어. 아니, 못 해. 아버지가 인정한 사람을 내가 무슨 수로 휘둘러? 존중하고 배려해야지."
"애정은……."
"애정이 뭐 별거겠어? 같이 살면서 버티다 보면 싹트는 전우애가 애정이지."
"……."
무시무시할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여하튼 나한테는 이 이상의 혼처는 없어. 어쨌든 가만 보면 얼굴도 꽤 잘생겼고. 나를 길가의 돌멩이처럼 보는 게 영 마음에 안 들기는 하지만, 시간 지나면 저 사람도 생각이 바뀌겠지."
당잔은 의욕이 넘쳐나는 자신의 누이를 보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누이를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당가의 여식이 겪어야 하는 미래를 알기 때문이다.
당가의 여식들은 당가의 식솔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들은 당가의 비전을 배울 수 없고, 당가의 무학조차 익힐 수 없다. 그들에게 전수되는 것은 여인들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궤를 달리하는 암기술 몇 개가 전부다.
당가의 직계는 더하다.
당소소는 당가주의 딸이라는 이유로 바깥세상 구경도 제대로 해 보지 못한 채 당가 안에서만 살았다.
화초처럼 길러진 꽃. 그리고 때가 되면 누군가에게 팔려 가듯 시집을 가야 하는 처지다. 그런 혼인을 한 이들이 행복할 리가 있겠는가?
당군악이 아무리 당가의 가주라고 하더라도 긴 세월 당가와 함께 이어져 온 법도를 바꿀 수는 없다.
"잔아!"
"예, 누님!"
"너도 나를 도와!"
"……."
"나는 어떻게든 행복해지고 말 거야. 그리고 그 행복의 첫 번째 열쇠가 저기에 있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든 저 도사랑 혼인할 테니, 너는 나를 도와. 그럼 나도 너를 도와줄게."
"네? 뭘 돕는다는 말입니까?"
"설마 안사람의 동생을 천대하기는 하겠어? 그럼 너도 천하제일인의 처남이 되는 거잖아?"
"……."
"밀어준다."
당잔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믿습니다."
가볍게 손을 맞잡았다 뗀, 두 사람의 눈이 전각 안에 있을 누군가를 강렬히 쏘아보았다.
덕분에 청명은 알 수 없는 오한에 몸을 부르르 떨어야 했다.
* * *
처마 위로 두 눈이 빼꼼 올라온다.
'없지?'
주위를 삭삭 둘러본 청명이 한숨을 쉬며 지붕 위를 기어오른다.
'아이고. 내 팔자야.'
화산에서는 유이설에게 쫓겨 다니더니, 당가에 와서는 당소소를 피해 다닌다.
천하에 두려울 것 없었던 매화검존이 자신의 반도 살지 않은 어린 여자아이들에게서 도망치는 모습이라니.
- 고소하다, 요놈아.
"아, 거 장가도 못 간 양반이!"
청명이 하늘로 삿대질을 하고는 처마 위에 드러누웠다. 그의 손이 반사적으로 붕대가 감긴 배를 움켜잡는다.
"으……."
청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욱신욱신 무지근한 고통이 밀려온다.
'아프네.'
당가주 앞에서는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그가 청명을 높이 평가하면 할수록 얻어 낼 수 있는 게 많아질 것이다.
사형제들 앞에서도 약한 척을 해서는 안 된다. 그만큼 그들이 슬퍼하고 안타까워할 테니까.
어쩌면 자신들의 무력감의 좌절할지도 모르고.
"이상하죠, 장문사형."
예전에는 이렇게 허세를 부리지 않았는데.
날이 갈수록 허세를 부리는 일이 많아지네요.
옛날에는 허세 부리는 놈들 진짜 끔찍하다 생각했는데.
피식 웃은 청명이 입으로 술을 부어 넣었다.
"크으."
입가를 문질러 닦고는 멍한 눈으로 하늘의 달을 바라본다.
'약해.'
나약해 빠졌다.
겨우 당가주 따위와의 승부에서 상처를 입다니.
예전의 그였다면 일 검에 대가리를 쪼개 버렸을 텐데.
당패의 암습?
그런 건 변명이 되지 못한다. 끔찍한 전장에서, 비겁은 일상이요, 암습은 기술이었다. 자신이 더 강했다면 그 어떤 암습도 감히 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말 빌어먹게 약해 빠졌네."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
청명이 죽음으로부터 깨어난 지 이제 겨우 삼 년 남짓이다. 햇수로 삼 년이지 기간으로는 삼 년도 채 채우지 못했다. 그만한 기간에 이만큼 강해진 것도 용하다.
아무리 한번 겪어 본 길이라고 한들 평생이 걸려 이루어 냈던 것을 삼 년 만에 따라잡을 수는 없다.
알고 있지만…….
"그게 핑계가 될 리가 없지!"
청명의 눈이 단호해진다.
강호가 얼마나 비정하고, 얼마나 위험한지는 청명이 가장 잘 알고 있다. 느긋하게 시간을 들여 강해질 동안 그저 평화롭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럴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더 강해진다."
예전의 매화검존을 뛰어넘어, 새로운 경지로 나아가야 한다.
세상 그 어떤 위험이 화산을 덮쳐 오더라도 지켜 낼 수 있을 만큼 말이다!
청명이 품 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당가에서 갈취한 천독단과 가지고 온 혼원단을 양손에 각각 꺼내 들었다.
'이게 될까?'
청명의 눈이 살짝 가라앉았다.
굉장히 위험하다. 하지만 청명의 생각대로만 일이 풀린다면…….
'내력 문제는 단숨에 해결할 수 있다.'
과거만큼은 아니더라도 이번처럼 내력이 달려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일단 몸이 완전히 나은 뒤……."
그 순간 청명이 숨을 죽이고 처마 위에 납작 엎드렸다.
"청명 소협? 청명 소혀어어어업? 이상하다. 방에 없는 걸 확인했는데. 이분이 어딜 가셨지?"
청명이 식은땀을 흘리며 숨을 죽였다.
귀식대법까지 펼치며 숨을 죽이던 청명은 당소소가 완전히 멀어진 것을 확인하고서야 빙그레 웃었다.
'저건 못 이겨.'
세상에는 아무리 강해져도 이길 수 없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그 사실을 절절히 실감하는 청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