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억울하면 너도 살아나든가. (3)
"그놈은 반드시 훗날의 천하제일인이 될 것이다."
"예."
"그 능력과 잠재력은 천하에 견줄 이가 없다. 반드시 세상에 그 이름을 크게 울리는 무인이 될 것이다!"
"예!"
"그리고 천하의 개새……."
"……예?"
당잔이 고개를 획 들어 당군악의 등을 바라보았다. 뒷짐을 진 그의 등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크흐흐흐흐흠!"
당군악이 커다랗게 헛기침을 했다.
……잘못 들었나?
"크흐흐흠!"
크게 헛기침을 한 당군악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천하제일인의 가치는 네 상상을 초월한다. 천하제일인은 때로는 명분이 되고, 때로는 힘이 되며, 때로는 이유가 된다. 천하의 모든 문파가 천하제일인을 배출하기 위해 자금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 이유가 있다."
"예, 가주님."
"그런데 하필 그런 중요한 자리를 그런 개……."
"……예?"
"아, 아니다."
당잔이 귀를 후볐다. 아까부터 자꾸 이상한 말이 들리는 것 같은데?
당군악이 이를 갈아붙인다.
"천하제일인이 될 수 없다면, 천하제일인과 친구가 되어야 한다."
당잔이 살짝 눈을 가늘게 떴다.
일견 들으면 맞는 말이다. 하지만 한 가지가 빠져 있다.
"하나, 가주님."
당잔이 살짝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 화산신룡의 능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화산이라는 그의 출신이 저를 불안하게 합니다. 제 아무리 천하제일이인이라고 한들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지 않겠습니까?"
"어리석은 소리!"
당군악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가 화산 출신이 아니라면 투자할 가치도 없다. 충분한 세력과 자금을 갖추었다면 그가 굳이 우리와 친구가 되려고 하겠느냐?"
"아……."
"오히려 지금의 화산이 과거만 못하기에 손을 뻗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를 이용하고 그는 우리를 의지한다. 그렇다면 더없이 좋은 관계가 될 수 있겠지."
당잔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거라! 그 성장한 화산신룡의 힘에 우리 당가의 힘이 더해진다면?"
그렇다면 그야말로 천하제일의!
"천하제일의 망종이 탄생하겠지. 빌어먹을!"
"네?"
이번에는 당군악도 말을 바꾸지 않았다.
"날강도 같은 놈……. 아무리 내가 잘못을 했다지만 천독단을……. 이젠 당가에도 몇 개 남지 않은 천독단을! 끄으으으응!"
당군악의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그 세차게 흔들리는 어깨에서 그가 지금 얼마나 격노하고 있는지 훤히 보였다.
"당잔!"
당군악이 고개를 획 돌린다.
어…….
가주님 눈이 좀 붉어지신 것 같은데…….
설마, 아니겠지?
"네 형은 소가주의 자리에서 물러날 것이다."
당잔이 두 눈을 부릅떴다.
"가, 가주님?"
"생각해 보거라."
"……무엇을?"
"네가 화산신룡이라면 당패가 가주인 당가와 손을 잡고 싶겠느냐?"
"아!"
당잔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당패는 비무를 하던 청명을 암습한 사람이니까. 그 어떤 벌을 받는다고 해도 화산신룡의 분노가 풀릴 리가 없다.
"중요한 건 사람이 아니라 가문이다. 당패가 가주가 되어 얻을 이익보다 화산신룡을 당가의 사람으로 만들어 얻을 이익이 크다면 그쪽을 선택한다. 그게 당가의 법도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쪼잔한 놈이 이걸 잊을 리가 없지……."
"……."
당군악의 몸이 다시 부들부들 떨렸다.
그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걸 태어나서 처음 본 당잔은 그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간신히 진정한 당군악이 말했다.
"소가주의 자리가 공석이 되었구나."
"……."
"네 형제들과 경쟁해야 할 것이다."
"노력하겠습니다."
"네게 한 가지 임무를 맡기겠다."
당잔이 고개를 들어 당군악을 바라보았다.
"당문의 누군가는 화산신룡과의 친분을 다져야 한다."
"……."
"내가 보기에 화산신룡은 자신의 사람에게 무척이나 관대한 자다. 네가 그의 사람이 될 수 있다면 당가는 단순한 계약 관계를 뛰어넘어 더 많은 것을 얻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가주님."
당잔이 단호한 눈으로 당군악을 바라보았다.
"저는 소가주의 자리에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흐음?"
"하나!"
당잔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게 가문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당연히 하겠습니다."
당군악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살짝 뜸을 들인 그가 가만히 말을 덧붙였다.
"다만."
"……예?"
"조심해라."
"……."
"그놈은 보통 놈이 아니다."
고개를 살짝 돌린 당군악의 눈가에 살짝 물기가 보이는 것 같았다.
헐?
우세요?
* * *
당잔은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반드시 화산신룡의 마음을 얻어 낸다!'
단순히 지인이 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어떻게든 화산신룡의 친우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은 그와 친분을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
끊임없는 노력으로!
다만…….
다만 한 가지
'그 노력이라는 게 이런 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말이야…….'
당잔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야, 손이 논다."
"……죄송합니다."
당잔이 정신을 차리고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그의 손에 들린 부채가 시원한 바람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크으. 당가는 부채도 잘 부치네."
"……."
친구가 되라고 했던 것 같은데.
이건 따까리 아닌가?
"흐음."
푹신하고 커다란 의자에 드러누워 있던 청명이 잠깐 몸을 일으키더니 휘파람을 불며 앞에 놓인 과일을 집었다.
과일뿐 아니다.
청명 앞의 탁자에는 온갖 산해진미가 줄지어 놓여 있었다.
중화 사대진미 중 하나로 불리는 사천요리의 정수가 온갖 진귀한 재료를 만나 예술로 승화된 수준이었다.
꼴꼴꼴꼴꼴.
"크으으으으으으!"
사천의 백주(白酒)까지 시원하게 벌컥벌컥 마신 청명이 의자에 늘어졌다.
"크으. 좋다, 좋아! 이곳이 무릉도원이구나."
하지만 지켜보는 이들의 평가는 전혀 달랐다.
"……주지육림 같은데."
"도사가 술에 고기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새삼스레 대단하다."
화산의 제자들은 청명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미쳤지. 걱정할 게 없어서 저놈을 걱정하다니."
"아니, 뭔 칼 맞은 놈이 저리 멀쩡해?"
"……사람이 아니네."
그러거나 말거나 청명은 다시 한번 호쾌하게 백주를 들이켜더니 오리 다리를 쭉 찢어서 입에 밀어 넣었다.
"크으. 사숙, 사형! 이것 좀 먹어 봐. 진짜 죽인다니까. 그리고 이거, 이거 술 진짜 비싼 거야. 아주 그냥 달달한 것이!"
"……."
백천이 멍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이래도 되는 걸까?'
아니, 뭐 물론 굳이 대접해 준다는데 굳이 안 받는 것도 이상하지. 꼭 거절하는 것만이 예의는 아니니까.
하지만 이건…….
백천의 떨리는 시선이 의자에 드러누운 청명에게로 향했다.
'제집……. 아니 제집보다 더 편해 보이는데.'
그리고 지금 청명의 옆에서 부채를 부치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당군악의 아들인 당잔이다.
이게 말이나 되는 광경인가?
백천의 시선을 받은 당잔이 얼굴을 붉혔다.
"사, 사천당가는 손님을 귀히 대접합니다. 부담 가지지 마시고 편히 쉬어 주십시오."
당신 때문에 부담되는 거거든요?
대체 왜 거기서 그러고 계십니까?
하지만 모두의 생각과는 다르게 청명은 이 상황이 너무도 편한 모양이었다.
"아이고. 좋다."
참다못한 백천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청명아."
"여기가 무릉도원……."
"청명아아."
"응?"
청명이 고개를 찔끔 돌린다.
백천이 이마에 핏대를 세우고는 청명에게 말한다.
"여기는 사천당가다."
"에이. 알아, 사숙. 내가 설마 그런 것도 모를까 봐."
"……그럼 최소한 앉기라도 해라. 거기 의자가 아무리 넓다지만 그게 드러누우라고 있는 곳은 아니잖으냐? 남의 집에 왔으면 최소한 예의는 지켜야지."
"아, 물론 나도 그러고 싶지."
"그런데?"
청명이 돌연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흰 붕대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런데 앉기만 하면 칼 맞은 데가 너무 쑤시는 걸 뭘 어쩌겠어. 나을 때까지는 이렇게 지내야지."
"……."
백천이 답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윤종이 슬그머니 다가와 백천에게 말한다.
"덮칠까요?"
부상을 입었을 때 처리하자는 말이다. 하지만 백천은 힘없이 고개를 젓고 말았다.
"그냥 둬라. 저러다 철들겠지."
물론 그날이 오지 않을 확률이 더 높지만.
백천이 한숨을 푹 내쉰다.
'진짜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는데.'
고작 사흘 만에 저리 쌩쌩해질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정말 경이로운 회복력이다.
"당잔 소협."
"예, 백천 소협."
"당가주님께서는 안 오십니까?"
"공무에 바쁘셔서."
"그렇습니까……."
웬만하면 당군악의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지만, 청명이놈이 하는 꼴을 보고 있으니 차라리 빨리 와 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 정도다.
그 마음이 하늘에 닿은 것일까?
벌컥!
대전의 문이 확 열렸다. 그리고 당군악이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안으로 들어온 그는 청명이 누운 꼴을 보더니 살짝 움찔했다.
"……."
화산신룡을 부족함 없이 잘 대접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은 다름 아닌 당군악이다.
하지만 이건 뭐랄까…….
"……지내는 데 부족함은 없는가?"
"네. 덕분에요. 크, 사천요리는 참 맛있네요. 조금 맵고 얼얼하긴 하지만."
"익숙해지면 그 이상의 맛이 없지."
"네. 그래서 익숙해질 때까지 한번 먹어 보려고요."
"……좋은 생각이네."
당군악의 입꼬리가 애매하게 말려 올라갔다.
무표정한 얼굴에 입만 웃는 모양새였다. 그 모습에 당군악을 보던 모든 이들이 작게 헛기침했다.
'웃는 거야? 화내는 거야?'
'둘 다 아닐까?'
그러거나 말거나 당군악은 청명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다른 불편함은 없는가?"
"있던 곳보다 습하고 더워서 조금 불편하긴 한데."
청명이 슬쩍 고개를 돌리자 당잔이 다시 열심히 부채를 부치기 시작했다.
"……."
"……."
당잔과 당군악의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한다.
"……아들놈이 자네가 마음에 든 모양이군."
"그러게요.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러네요. 고맙게도."
전혀 고마워하지 않는 표정으로 청명이 백주를 꼴꼴꼴 마셔 댔다.
"크으. 술도 맛있고, 음식도 맛있고! 여긴 정말 좋은 곳이에요."
"그렇겠지."
그 모습을 보며 당군악이 이번만은 진심 어린 미소를 지었다.
다른 화산의 제자들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온다. 아마 청명이 큰 무례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모르는 소리.'
이들은 당가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당가에서 손님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예의가 바로 지금의 저 청명처럼 편히 먹고 마시는 것이다.
타 문파에서는 무례일지 모른다. 하지만 당가에서만은 최고의 예의다.
이건 당가가 독과 암기를 주로 사용하는 문파이기에 생긴 현상이다. 아무리 담이 큰 자라고 해도 당가에서 주는 음식과 술만은 꺼리기 마련이다.
독을 쓰는 이가 주는 술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마실 이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철담을 자랑하는 이조차 당가에서는 마실 술을 반으로 줄이고 먹는 음식을 삼간다.
하지만 지금 청명은 말 그대로 부어라 마셔라 음식을 흡입하고 술을 병째로 입 안에 쑤셔 넣고 있었다.
'알고 하는 행동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은근히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어찌할 수 없는 당군악이었다. 저 행동은 청명이 당가를 그만큼 믿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행위였으니까.
'이상한 놈이란 말이지.'
사람을 기분 좋게 했다가 부들부들 떨게 했다가. 같이 지내다가는 간담이 무사하지 못할 것 같다.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그게."
당군악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원래대로라면 그가 화산신룡을 만나기로 한 건 오늘이 아니라 며칠 뒤다. 그때 따로 화산과 당가의 거래를 마무리 짓기로 했다.
그럼에도 그가 이리 청명을 찾아온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게……."
당군악이 말꼬리를 늘이며 자꾸 뒤를 힐끗거렸다.
영 마뜩잖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꽉 깨문 그는 살짝 억눌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무 일 없네! 그냥 와 본 걸세!"
그 순간이었다.
탕!
저 뒤에서 뭔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빼꼼.
"응?"
열린 문 옆에서 뭔가가 살짝 튀어나온다.
어, 저거…… 사람 머리인가?
"끄응."
당군악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갑자기 귀신 같은 얼굴로 청명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왜 저래, 저 아저씨?
무섭게.
"소개……. 소개해 줄 사람이 있네."
"네? 소개요?"
"……젊은 사람들끼리 친하게 지낸다면 그 이상……. 좋을 게 있겠는가?"
"그렇긴 하죠."
"그게 하필 너 같은……."
"네?"
"아니. 아닐세."
당군악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는 짜증이 한껏 담긴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들어오너라."
그 순간 활짝 열린 문 사이로 한 사람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어?"
"어어……."
"으으응?"
"……."
화산의 제자들이 다들 눈을 크게 떴다.
놀랄 일?
아니, 놀랄 일까지는 아닌데, 놀랍긴 놀랍고…….
처음 그들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화려한 궁장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 시선들은 이내 궁장 위에 있는 얼굴로 향했고, 그 얼굴을 본 이들은 다들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뭐지? 예쁜데?'
'어마어마한 미인이다. 사매에게 뒤지지 않아.'
'헐. 당가에 저런 사람이 있었나?'
윤종과 백천, 조걸이 멍한 눈으로 안으로 사뿐사뿐 걸어 들어오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인사해라."
"당가의 당소소(當小小), 화산의 영웅들께 인사 올립니다."
얼굴도 얼굴이지만, 환한 미소에 가식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저토록 밝게 웃는 사람을 누가 미워할 수 있겠는가?
"어……."
윤종이 멍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다.
"아, 안녕하세요."
조걸이 팔꿈치로 윤종의 옆구리를 쑤셨다. 윤종이 움찔하고는 고개를 번쩍 든다.
그 반응들을 보며 당군악의 얼굴이 한층 더 일그러졌다.
"내…… 딸일세. 마침 나이대가 비슷한 듯하여, 좋은 친우…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불렀네."
근데 이는 왜 가세요?
그리고…….
"……당가는 집 안에서 저런 걸 입나 보죠?"
"친우를 처음 만나는 자리라 신경…… 썼겠지."
저게요?
두 번 신경 썼다가는 목이 꺾일 판인데? 아니, 대체 머리에 장신구를 몇 개나 꽂은 거야?
설마 저게 다 암기는 아니겠지?
당군악의 시선이 청명에게 고정된다.
"저 아이가 네놈……. 아니, 자네를 만나고 싶어 해서 소개해 주기 위해 데리고 왔으니 헛수작……. 아니.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으면 좋겠군. 좋은 관계가 말이야."
엥?
어?
설마…….
청명이 좌우를 둘러보았다. 사형제들이 모두 묘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고 있다.
"……어라?"
이게 정략혼인가 뭔가 하는 그건가?
"나?"
당군악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 아니 나는……."
도산데?
"어……."
"인사하게."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는 당소소를 보며 청명이 빙그레 웃는다.
사형.
장문사형.
살려 주십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