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억울하면 너도 살아나든가. (2)
멍하다.
모든 것이 모호하다.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걸까?
코로 훅 밀려드는 혈향.
피부를 따갑게 만드는 살기.
이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하다.
"도사 형님!"
청명의 등 뒤에서 세 개의 비도가 날아들어 그에게 달려들던 마교도들의 미간에 틀어박힌다.
콰득!
섬뜩한 소리와 함께 마교도들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털썩.
청명이 조금 멍한 눈으로 바닥에 쓰러진 이들을 바라보았다.
꿈틀대던 마교도들의 고개가 모로 돌아간다. 이내 눈에서도 빛이 사라진다.
죽음.
그래, 죽음이다.
"뭐 하는 겁니까? 싸우는 도중에 갑자기. 도사 형님답지 않게!"
청명이 고개를 천천히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당보.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청명에게 다가온다.
"……아니."
청명이 손을 들어 미간을 꾹꾹 눌렀다.
이상하게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모르겠군. 조금 지쳤던 모양이야."
청명이 매화검을 떨쳐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고는 검집에 밀어넣었다. 당보가 히죽 웃으면서 손을 뻗어 비도를 회수한다.
"지칠 만도 하지요. 사흘 간 내내 싸웠으니."
"음."
"……진짜 많이 지친 모양이네, 이 형님? 말수도 줄어들고."
"……."
"약 하나 드립니까?"
"됐다."
"아니, 이 형님 또 이러시네. 남들은 당가비전 영단이라고 하면 눈을 까뒤집고 먹으려 든다니까요. 당가 못 믿으십니까? 당가?"
"당가는 믿지."
"그런데요?"
"너를 못 믿는 거지."
"하. 또 섭섭하게 이러신다, 또? 저번에 제가 드린 독단은 제가 착각해서 잘못 드린 거라니까요."
"입만 살아 가지고. 확 그냥!"
청명이 몸을 획 돌렸다.
"돌아간다."
"아니, 거 같이 좀 갑시다. 형님."
당보가 재빨리 청명의 뒤로 따라붙었다.
"저놈들의 별동대를 다 쳐 죽였으니, 전세가 이쪽으로 좀 기울겠죠?"
"그래야지."
그렇지 않으면 이리 개고생을 한 이유가 없으니까.
그때 불현듯 청명은 팔에 느껴지는 차가운 감각에 고개를 돌렸다. 당보가 그의 팔에 금창약을 바르고 있었다.
길게 베인 상처가 진득한 금창약으로 덮인다.
"상처 제때 치료 안 하면 고생한다고 제가 몇 번 말 합니까?"
청명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내버려 두면 알아서 낫는다."
"네, 그렇죠. 그런데 약을 바르면 더 빨리 낫습니다. 가만히 계십쇼."
당보는 아예 청명의 옷자락을 찢어 내고는 금창약을 덕지덕지 발랐다.
"당가 비전 금창약은 돈 주고도 못 사는 겁니다. 고마운 줄 아십시오."
"입만 열면 당가가 싫다고 지껄이면서 당가 물품은 잘도 쓰고 다니는구나."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게다가……."
당보의 얼굴이 살짝 씁쓸해졌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이제는 가문이 왜 그리 억척스러웠는지 알 것 같습니다. 결국 힘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지요. 당가가 조금만 더 힘이 있었더라면 사천에서 이리 도망치지도 않았을 거고, 그 많은 식솔들이 목숨을 잃지도 않았을 텐데."
"……."
갑자기 무거운 목소리로 말하는 당보를 보며 청명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요즘은 그런 생각을 합니다. 도사 형님."
"무슨 생각?"
"제가 가문 놈들이 하는 말에 사사건건 딴지를 걸 게 아니라, 그냥 믿어 주고 밀어주었으면 가문이 좀 더 강해지지 않았을까……. 그럼…… 그럼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릴 수……."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외려 힘을 믿고 맞서다 몰살을 당했을 수도 있다."
"……그렇겠죠."
당보가 씁쓸한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숙인다. 잠시 후 다시 고개를 든 그의 얼굴에선 씁쓸함은 씻은 듯 사라져 있었다. 대신 장난스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그래서 전쟁만 끝나면 이번에는 가주 녀석을 조금 도와줘 볼 생각입니다. 제가 이름만 태상장로고, 말만 어른이지 그놈들을 제대로 돌봐 준 적이 없잖습니까."
"패악질만 부렸지."
"그거야 형님만 하겠습……."
"뭐?"
"아니, 아닙니다. 거 날씨가 참……. 어. 우중충하네. 날씨가 왜 이러냐. 어허."
청명이 피식 웃었다.
사실 사문에 해 준 것이 없는 걸로 따지면 청명 역시 당보보다 나을 게 없다.
그가 사문에 준 것이라곤 매화검존의 명성뿐. 제대로 제자를 키우지도 못했고, 후인들을 도와주지도 않았다.
그저 내키는 대로 살고, 발 가는 대로 움직였을 뿐이다.
'전쟁이 끝난다면…….'
그때는 달라져야겠지. 그때는.
"그러니, 형님."
"응?"
"도사 형님도 저랑 약속 하나 합시다. 혹시 이 전쟁 중에 내가 죽으면 형님이 당가 애들 좀 봐주십시오."
"……뭔 헛소리냐?"
"제가 암존이니 뭐니 해도 저보다야 형님이 살아남을 확률이 높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냥 동생 유언 들어준다 치고 애들 좀 돌봐 주십쇼. 내가 천독단 하나 드린다니까 그러네. 이거 돈 주고도……."
"개소리 지껄일 거면 저리 가, 저리. 확 찔러 버릴라."
"아니, 그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당가를 키우고 싶으면 네가 직접 해.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에이. 매정한 양반."
구시렁거리는 당보를 파리 쫓듯 휘휘 밀어 낸 청명이 휘적휘적 걸어 앞서 나갔다.
"약속한 겁니다?"
"거참."
"천독단 드린다니까!"
"아니, 이 새끼가 진짜?"
"네?"
"너 좀 맞자."
"하……. 하하. 아이고 아까 입은 부상이 심한 모양이네. 몸이 왜 이리……."
너스레를 떨며 물러나는 당보를 보며 청명이 피식 웃었다.
"죽은 놈이 뒤는 왜 생각해. 죽고 나면 끝인데."
"에이. 그래도 그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제가 죽어도 남은 이들은 살아가잖습니까."
"……."
"도사 형님이야 속세에 초연한 도사니까 이런 마음을 잘 모르겠지만……."
당보가 머리를 긁었다.
"그런 게 있습니다, 그런 게. 도무지 사라지지 않는 찝찝함이요."
청명이 한숨을 쉬고 몸을 돌렸다.
"남한테 일 떠넘기지 말고 네가 직접 해라."
"……."
"대신."
"네?"
"전쟁은 내가 끝내 주지. 저 천마 놈의 목을 베어서 말이다."
"흐흐. 형님이라면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그때까지……."
청명이 씹어 먹듯 말했다.
"악착같이 살아남아라."
"……예."
당보가 슬그머니 청명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가 옆에 서서 걷는 것을 본 청명이 자신도 모르게 그의 걸음에 보폭을 맞췄다.
그리고.
당보는 그 후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전사했다.
* * *
청명이 눈을 떴다.
'어?'
청명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으……."
복부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진다. 내려다보니 배에 새하얀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죽지는 않은 모양인데.'
하기야 그 정도로 죽을 내가 아니지. 예전에 전쟁을 치를 때는 단전에 대도가 박히고도 살아남았는데! 이 몸은 바퀴벌레보다 끈질기……. 아 이거 욕이구나.
'그런데 여기가 어디지?'
고개를 획 돌린 청명이 순식간에 눈을 일그러뜨린다.
"응?"
그의 눈에 말 그대로 널브러져 있는 화산의 제자들이 들어온다.
백천, 유이설, 윤종, 조걸이 바닥에 드러누워 죽은…….
아. 죽은 듯이 자고 있는 거구나.
깜짝 놀랐네.
청명이 사형제들의 상태를 살짝 살피고는 피식 웃었다.
"없이 자라서 그런가, 바닥에서도 잘 자네."
어휴. 저 안쓰러운 것들.
청명이 막 윤종을 불러 깨우려는 찰나였다.
"내버려 두게. 사흘을 뜬눈으로 지새웠으니까."
청명이 고개를 획 돌렸다.
어느새 열린 문 앞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일어났는가?"
"……."
느리게 들어오며 말을 건네는 사내는 사천당가의 가주이자, 청명과 비무를 벌였던 그 당군악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이렇다 할 표정이 떠올라 있지 않았다.
청명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한번 주위를 돌아본다.
"여기 당가예요?"
"그렇네."
"내가 왜 당가……. 아니, 잠깐만 그 전에! 사흘이나 지났다고?"
"그렇다네. 자네는 내리 사흘 동안 의식을 잃고 있었네."
청명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사흘이나?'
아니, 배때기에 칼침 좀 맞았다고 사흘을 뻗어 있었다고?
'약해 빠져 가지고는.'
청명이 이를 갈았다.
예전 같았으면 그 자리에서 툭툭 털고 일어나 약이나 발랐을 상처건만, 이 몸은 겨우 이 정도 상처에도 의식을 잃고 만다.
생각하니 화딱지가 치미는 청명이었다.
"그럼 우리 사숙들은 왜 이렇고 있는 거예요?"
"자네가 눈을 뜰 때까지 옆에서 벗어나지 않겠다더군. 좀 쉬게 하려 했으나 검까지 뽑으며 저항했네. 워낙 긴장해 있던 터라 이러다가 일이 나겠다 싶어서 내가 수혈을 짚어 재웠네."
"……."
사흘을 옆에 붙어 있었다고?
'거…….'
교대로 좀 감시하면 될 것을. 넷이나 붙어서?
어휴. 저 미련한 것들.
청명이 당군악을 보며 눈을 부라렸다.
"그럼 좀 편안한 데로 옮겨나 줄 것이지!"
"옮기려고만 하면 끙끙거리면서 깨려고 하는데 어쩌겠는가?"
"……."
"사형제지간이 무척 끈끈한 모양이군. 당가의 아이들이 저랬다면 내 걱정도 조금은 덜어졌겠지. 부러울 정도야."
"부럽기는……."
청명이 슬쩍 그의 사형제들을 바라보았다.
'미련하긴.'
정말 미련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크흠."
청명이 낮게 헛기침을 했다.
뭔가 말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때, 당군악이 성큼 걸어 들어오더니 청명을 향해 고개를 푹 숙였다.
"사과하겠네."
"엥?"
"이번 일은 모두가 내 불찰일세. 설마 당패 그놈이 그런 패악을 저지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네."
"……."
"내가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면죄가 될 수 없으리란 걸 알고 있네. 하나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테니 노여움을 풀어 주게나."
"흐음?"
고개를 든 당군악이 더없이 진중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우선 이 승부는 나의 패배임을 인정하네."
"……."
"약속대로 사천당가는 화산의 청명을 당가의 영원한 객이자, 친구로 인정하겠네."
"오?"
"그리고 원한다면 당패 그놈의 목이라도 내어 주지."
청명이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자식을 잘못 키웠네. 그걸로 면죄가 된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지. 그걸로 땅에 떨어진 당가의 명예가 회복될 수 있다면!"
당군악이 씹어뱉듯 말했다.
하지만 그의 내심은 겉으로 드러난 것과는 조금 달랐다.
'이 정도까지 이야기하면 수긍할 수밖에 없겠지.'
당군악이 슬쩍 고개를 들어 청명의 눈치를 본다.
'응?'
당군악의 입장에서는 안타깝게도, 청명의 표정은 그의 예상과 조금……. 아니, 많이 달랐다.
"……."
청명의 고개가 모로 꺾인다.
"그게 다예요?"
"……으응?"
"그게 다냐고요."
"그, 그럼?"
"아이고, 세상에."
청명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으로 당군악을 바라본다. 마치 있어선 안 될 것을 보는 것 같은 눈빛에, 당군악은 흠칫했다.
"사람 배때기에 칼침 박아 놓고는 뭐? 친구? 친구우우우우우?"
"……."
"그리고 애새끼가 잘못을 했으면 부모가 책임을 져야지! 어디 은근슬쩍 애한테 책임을 떠넘겨요!"
"……."
"아이고, 동네 사람들. 당가가 이렇습니다, 당가가! 세상에! 여기가 명문이라네. 명문! 명문 다 얼어 죽었지!"
청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지! 이럴 게 아니라 제가 성도로 뛰어나가서 당가가 얼마나 일 처리가 확실한지 소문이라도 내야겠네요. 거지새끼들한테 말해 주면 되겠다. 삼 일이면 천하에 다 퍼지겠지."
"지, 진정하게나!"
당군악의 등골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당가의 가주가 화산신룡과의 비무에서 패하고, 심지어는 당가의 소가주가 정당한 비무 도중 암습을 가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당가는 끝장이다.
안 그래도 암기와 독을 쓴다는 이유로 사파 같다는 소리를 듣는 당가가 아닌가.
"에이. 아니지, 아니지. 그러다가는 목이 달아나겠네요. 비무 중에 암습으로 칼도 던지는데, 사람 목 하나 슥삭 못 할까?"
"……그럴 거면 벌써 죽였지."
"네?"
"아, 아니네. 내가 말이 헛 나왔네."
당군악이 식은땀을 소매로 훔치며 청명을 바라보았다.
"원하는 게 뭔가?"
"몰라서 물으세요? 보상이 있어야죠! 보상이! 사람 칼로 찔러 놓고 미안하다 한마디로 끝날 것 같으면 관아는 왜 있고! 전쟁은 왜 일어나나요!"
"그렇지. 그래. 당연히 보상을 해야지. 그런데 그 보상으로…… 뭘 해 줘야……."
"그건 제가 곰곰이 생각을 해 볼게요. 어떻게 해야 기둥……. 아니, 서로 좋은 거래가 될 수 있을지."
"……."
"그리고!"
청명이 눈을 희번덕거렸다.
"일단 몸이 허해서 그러는데."
"응?"
"천독단부터 한 알 주세요."
"……처, 천독?"
"네."
"……."
"지금."
"……알겠네."
당군악의 얼굴에 어찌할 수 없는 참담함이 떠올랐다.
'잘못 걸렸다.'
그리고 그런 당군악의 얼굴을 보며 청명이 해맑게 웃었다.
당보야. 당보야.
걱정하지 마라. 당가는 내가 잘 돌봐 주마.
응?
이게 돌봐 주는 거냐고?
억울하면 너도 살아나든가.
낄낄낄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