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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92화 (192/1,567)

192화. 갑자기 너무 거물이 나오시는데? (2)

"가, 가주?"

웬만해서는 침착함을 잃지 않는 백천조차도 순간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사천당가주.

그 어마어마한 이름 앞에 당황하지 않을 강호인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

"우와, 갑자기 너무 거물이 나오시는데?"

아, 저기 한 명 있네.

저기.

저 망할 놈은 당황이란 걸 모르지. 빌어먹을!

"다, 당가주라니."

윤종도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애들 싸움에 어른이 끼어드는 것도 아니고, 여기서 사천당가의 가주가 직접?"

백천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당가가 직접 개입할 수도 있다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사천당가의 가주가 직접 나서는 상황까지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백천뿐만이 아니다. 다들 이 어마어마한 사태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때 바닥에 주저앉았던 조평이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밖을 향해 외쳤다.

"당가주가 직접 오셨다는 말이더냐?"

"예! 그, 그렇습니다."

"당가주께서는 지금 어디 계시느냐?"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조평이 이를 악물었다.

주인이 문을 열어 줄 때까지 밖에서 기다린다는 것은, 당가주에게 아직 예의를 차릴 의사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그가 진정으로 피를 볼 각오로 왔다면 지금쯤 이곳에 있는 이들은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적어도 조평은 그렇게 생각했다.

"걸아."

"예, 아버지!"

조걸이 창백해진 안색으로 서둘러 조평에게 다가섰다.

"지금부터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나서지 마라."

"예?"

"약속해라!"

"……."

"어서!"

"……예, 알겠습니다."

조평이 무시무시한 시선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요. 절대 나서서는 안 됩니다. 사천에서 당가주의 심기를 거스른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그대들은 모르오! 절대 나서지 마시오! 절대!"

그 간절하고도 단호한 어조에 백천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심호흡을 한 조평이 굳은 얼굴로 몸을 돌려 전각을 나섰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모두에게 달아나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차피 당가주가 여기까지 와 버린 이상, 달아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사천당가의 가주는 결코 혼자 움직일 수 있는 위치가 아니니까.

아마 지금쯤이면 암중에서 그를 호위하는 호위대에 의해 사해상회 전체가 포위되었을 게 분명하다.

'호굴이로군.'

호랑이에게 물려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겠지.

천 명 중 한 명쯤은 운 좋게 탈출할 수 있을 것이고, 그는 정신을 똑바로 차린 이였을 테니까.

문제는 호랑이에게 물려간 대부분의 사람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든 아니든 어차피 죽는다는 것이다.

입술을 질끈 깨문 조평이 사해상회의 정문 앞에 섰다. 이 문 뒤에 호랑이가 있다.

아니.

호랑이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진정으로 두려운 자가 지금 그를 물어뜯기 위해 이곳에 도착했다.

문을 지키는 이들이 덜덜 떨고 있는 것을 본 조평은 새삼 밖에서 기다려 준 당가주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가 다짜고짜 밀고 들어왔다면 이 중 몇은 혼절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성도에서 사천당가의 가주란 그런 위치였으니까.

"문을 열어라!"

"예!"

조평의 외침과 함께 드디어 대문이 좌우로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틈으로 녹색의 무복을 입은 당당한 체구의 중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평은 채 문이 다 열리기도 전에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대 사천당가의 가주님을 배알하게 되어 크나큰 영광입니다."

당군악이 가만히 조평을 바라보다가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이오."

"예, 가주님. 제가 먼저 찾아뵈었어야 하는데, 귀한 분을 이곳까지 행차하게 만든 저를 벌해 주십시오."

"예의는 그만하면 됐소. 용건이 있소이다."

조평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일단 안으로 드시겠습니까?"

"나쁘지 않겠지."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조평이 긴장으로 딱딱히 굳은 얼굴로 당군악을 상회의 내전으로 안내했다.

당군악이 조평을 안내를 받아 걸음을 옮기자 당패와 당잔이 그 뒤를 따랐다.

어젯밤에는 단순히 찾아온 것만으로도 모두를 긴장시켰던 당잔이지만, 지금 조평의 눈에 당잔 따위는 보이지도 않았다. 누구도 범의 옆에 있는 살쾡이에게 시선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시선을 낮추고 더없이 겸손한 자세로, 극도의 공경을 담아 당군악을 안내하는 조평의 등은 축축이 젖어든 지 오래다.

'어찌해야 하는가?'

사실 조평은 이미 알고 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상 없다. 중요한 것은 그가 어찌 대처하느냐가 아니라 당군악이 무슨 생각으로 이곳에 직접 행차했느냐니까.

'일단은 최대한…….'

"상회주."

그때, 등 뒤에서 들려온 낮은 목소리에 조평이 그 자리에 멈춰 허리를 바짝 세웠다.

"예, 당가주님!"

"안에 그 아이들이 있소?"

"……그 아이들이라 하시면?"

"화산에서 온 아이들 말이오."

조평이 살짝 눈을 감았다.

올 것이 왔다.

"예, 있습니다."

거짓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적어도 이 남자 앞에서는.

"흐음."

당군악의 입에서 미약한 침음성이 배어 나온다.

그 작은 소리의 의미를 짐작해 보려 조평이 숨을 죽이며 머리를 굴리던 찰나, 당군악이 다시 말했다.

"내가 그 아이들을 한번 보아야 할 것 같소."

조평의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이 말이 나올 거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너무 이르다.

당군악의 목적이 화산의 제자들을 핑계로 사해상회를 압박하는 것이었다면, 그는 본론부터 꺼내지 않은 채 느긋하게 조평을 압박했을 것이다.

이 말이 이리도 곧장 나왔다는 것은, 당군악이 이곳을 방문한 목적이 화산의 문도들 그 자체에 있다는 뜻이다.

"상회주."

"예? 아! 예!"

퍼뜩 정신을 차린 조평이 고개를 푹 숙인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텐데?"

"무, 물론입니다. 하나……."

조평의 입술이 달싹인다.

머리를 쥐어짜 봐도 둘러댈 말이 없다. 뻔히 이곳에 있는 이들을 내보이지 않을 방도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당가주님. 어제 있었던 일은……."

"음, 그렇지."

당군악이 조평을 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축하하오."

"……예?"

"듣자 하니 둘째 아들의 성취가 남다르다고 하더군. 잔아가 망신을 당했다고 하던데."

조평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저 운일 뿐입니다. 제 아들놈이 어찌 감히 당잔 공자의 상대가 되겠습니까?"

"겸손은 좋은 것이오."

당군악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과한 겸손은 되레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하지. 기뻐할 만한 일이니 편히 기뻐하시오."

"다, 당가주님."

조평이 당황하여 말을 잇지 못하니 당군악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당잔."

"예! 가주님."

"네가 말해 보아라. 너의 패배에 변명거리가 있느냐?"

"없습니다. 조걸은 강했습니다."

"그렇다는군."

당군악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조평을 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그 재능이 당가의 이름하에 빛났다면 더 좋은 일이었겠지만, 어찌되었건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는 건 기꺼운 일이지."

"가, 감사합니다."

"다만."

나직한 목소리.

그러나 노기를 담은 고함 따위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무게가 실려 있었다. 조평의 고개가 무언가에 짓눌리기라도 하는 듯 점점 수그러들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어리석소. 소수의 재능을 가진 몇몇이 해낸 일을 보면 자신들도 그럴 수 있을 거라 여기지. 상회주는 이에 대해 어찌 생각하시오?"

조평의 몸이 움찔했다.

그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였다.

"사람들이 어리석다고는 하나 자신의 주제를 모르겠습니까? 삿된 욕심을 품는 이들이 많지 않을 겁니다."

"그럼 그대는 어떻소?"

조평이 고개를 획 들었다. 그의 눈에 미소 짓고 있는 당군악의 얼굴이 보인다.

입가는 웃고 있지만 눈빛은 차게 가라앉아 있다. 그 기괴한 표정을 마주하니 절로 다리가 후들거리고 입이 바짝 마른다.

"꿈을 꿔 볼 생각이 있으시오?"

"제 꿈은 이미 당가주님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좋은 대답이군."

당군악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데려와 보시오. 화산의 아이들을."

"……당가주님. 그들은……."

"내 말이 들리지 않소?"

"……."

당군악의 눈빛에 냉기가 서렸다.

"아들의 성취가 뛰어난 것은 좋은 일이지. 하지만 그 일이 아무래도 사해상회의 판단력을 흐린 것 같군. 나는 이미 같은 말을 두 번 했소."

조평이 입도 열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이 세 번째요. 화산의 제자들을 내 앞으로 데려 오시오. 더는 말하지 않겠소."

조평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몸에 힘이 풀리고,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평범한 이가 당군악의 분노를 정면으로 받았으니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조평은 결코 쓰러지지 않았다.

다리에 힘을 주어 버틴 그는 억지로 입꼬리를 말아 올린다. 제대로 미소가 지어지지 않아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기괴한 얼굴이 된 조평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연다.

"당가주님. 화산의 문하들은 사해상회를 찾아 준 객입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제 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조평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얼굴은 이미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었지만, 고개를 내젓는 그의 동작에는 단호함이 어려 있었다.

"사해상회의 상회주로서 이유도 없이 손님을 내어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아비로서 자식을 내어 드릴 수도 없습니다."

당가주가 차가운 눈으로 조평을 노려본다.

"사해상회가 멸망한다 해도?"

"그런 것이 무서워 아들을 내어 놓는 아비가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멸망의 의미를 잘 모르는 모양인데. 내가 손을 쓰면 이곳에서는 쥐새끼 한 마리 살아 나가지 못하오. 그걸 알고 하는 말이오?"

"벌해야 한다면!"

조평이 굳은 의지를 담은 눈으로 말했다.

"제 한 목숨으로 끝내 주십시오. 사해상회 내에서 벌어진 모든 일은 제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

"죄 없는 이들은 건드리는 것이 당가의 방식은 아닐 거라 믿습니다."

그 말을 들은 당군악이 살짝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 쳤다.

"아무래도 사해상단주가 잠시 꿈에 취한 모양이군. 당가의 방식이 무엇인지도 잊은 걸 보니 말이야. 내가 친히 당가의 방식이 무엇인지 알려 주지. 다시는 잊지 못하게."

당군악의 손끝이 살짝 움직인다.

그 모습을 본 조평이 이를 악물고 모두에게 달아나라 소리치려는 순간이었다.

"아니, 저 아저씨 영 성격이 이상하시네."

벌컥!

중앙 전각의 문이 좌우로 활짝 열리더니 그 안에서 한 사람이 저벅저벅 걸어 나온다.

"처, 청명 소협!"

조평이 사색이 되어 외쳤다.

"내가 관여하지 말라고……!"

"에이, 상단주님은 상황 보면 몰라요? 저 아저씨가 일부러 여기까지 와서 이러고 있는 거잖아요! 나 들으라고!"

"……아?"

조평이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당군악을 바라본다.

그런데 정말로 당군악은 이미 조평에게 흥미를 잃은 듯 청명만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네가 화산신룡이냐?"

"몰라서 묻는 건 아니죠?"

"허?"

당군악이 허허 웃어 버린다.

감히 그의 앞에서 저런 말투를 쓰는 이가 또 있었던가?

글쎄, 모르지. 예전에는 있었을지도.

하지만 그가 당가의 가주가 된 이후로는 맹세컨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당군악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 미소를 미소라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해지는 미소를 어찌 그렇게 따뜻한 말로 표현하겠는가?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당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저런 표정을 지을 때는 살심이 깊어졌을 때라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화산신룡이라. 화산신룡. 기대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군. 아무래도 좋다."

당군악이 미소를 지으며 청명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디 한번 보자꾸나. 네가 어떤 놈인지."

그의 손이 천천히 소매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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