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갑자기 너무 거물이 나오시는데? (1)
대 사천당가.
수백 년의 역사를 이어 온 사천의 패자이자 천하 오대세가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그 명문가의 가주전에서 차갑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사천당가의 가주.
당군악(當群岳)이 감정 하나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화산 놈들에게 얻어맞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냥 돌아왔단 말이더냐?"
"……예."
"요즘 이름을 떨치고 있는 화산신룡도, 화정검도 아니라…… 그 사해상회의 둘째에게?"
"예."
당군악의 눈에 살짝 살기가 어렸다.
"이게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 있느냐?"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 당군악을 곁에서 보좌하던 사천당가의 소가주 당패(當覇)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그런 것치고는 무릎이 뻣뻣하구나."
당잔이 당패를 한번 바라보고는 다시 당군악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하지만 당패는 그리 간단히는 넘어갈 생각이 없다는 듯 다시 차가운 목소리로 물고 늘어졌다.
"너는 가문의 직계이자 가주님의 아들이다."
"……."
"그런데 네가 그 조걸이라는 어중이떠중이에게 얻어맞고 돌아왔다. 성도의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지 모르느냐?"
"알고 있습니다."
"모두가 고소해하겠지. 그리고 은연중에 사천당가가 이제는 별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생겨날 것이다. 그러다 보면 가문의 행사에 반기를 들고, 외지의 거파와 결탁하려는 이도 생길 수밖에 없지."
당잔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 작은 일 하나가 그만한 사태를 부를 수 있다. 네가 이것도 짐작하지 못하는 머저리는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형님."
"공적인 자리다."
"예, 소가주님."
당패가 싸늘하게 일갈한다.
"이 모든 사태를 어떻게 책임질 생각이더냐? 네 실수 하나로 작게는 사천당가의 명성이 땅에 떨어지고, 크게는 사천에 대한 가문의 지배력이 흔들리게 생겼다. 네 목숨을 내놓는다 해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벌은 각오하고 있습니다."
"하면……!"
당패가 차갑게 답하려던 그때였다.
당군악이 가만히 입을 연다.
"당잔."
"예, 가주님."
당군악이 차가운 눈으로 당잔을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물었다.
"각오하고 있다고 했느냐?"
"예."
"그렇다는 건 네가 저지른 잘못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다는 뜻이겠지?"
"물론입니다."
"그럼 어째서 너의 얼굴은 그토록 후련해 보이느냐."
이게 당군악이 정말 묻고 싶은 말이었다.
그가 아는 당잔은 승부욕의 화신과도 같은 사람이다. 그의 아들 중 당잔보다 승부욕이 뛰어난 이는 없었다.
그 누구라도 몇 번씩은 울며 달아나는 혹독한 당가의 수련을, 강해지겠다는 일념 하나로 군말 없이 버텨 낸 이가 바로 당잔이다.
천하의 당군악조차 성인이 되기 전까지 무려 세 번이나 수련을 피해 당가를 탈출한 적이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당잔의 승부욕은 무시무시한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당군악이 모든 자식들 중 당잔을 특히나 아꼈던 건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당잔이 패하고 돌아와서도 되레 편안해 보인다.
당군악은 어쩌면 이 일이 사해상회에서 일어난 일보다 배는 더 중요한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당잔이 입을 열었다.
"얻었기 때문입니다."
"……얻었다?"
"제가 가야 할 길을 얻었고, 세상이 넓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천하에 저보다 강한 이들이 넘쳐날 정도로 많다는 것을 알고 더욱 노력할 수 있는 의욕을 얻었는데 그깟 벌이 두렵겠습니까?"
당군악이 미간을 좁혔다.
"너보다 강한 이들이 많다? 사해상회의 둘째를 말함이더냐?"
"그와의 승부에서 패한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다시 붙는다면 결과가 달라질 수 있겠지요. 하지만…… 다른 이들은 아닙니다."
"화정검과 화산신룡이구나."
"화정검은 분명 조걸보다 강할 것입니다. 그리고 화산신룡은……."
막힘없이 말을 쏟아 내던 당잔이 입을 꾹 다문다.
당군악은 재촉하지 않고 그의 아들이 말을 정리하기를 기다렸다.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긴 침묵 끝에 나온 대답은 당군악의 예상을 꽤 많이 벗어나 버렸다.
"모르겠다?"
"예. 저는 그를 모르겠습니다. 그가 강한지, 약한지. 아니, 그런 것보다 되레……."
당잔이 한숨을 내쉰다.
"아니, 역시 모르겠습니다. 저로서는 그를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듣고 있던 당패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끼어들었다.
"네가 약하기 때문에 파악할 수 없었던 거겠지."
"……그럴지도 모릅니다."
"가주님 더 들을 필요도 없습니다. 잔이를 벌하고 저를 사해상회로 보내 주십시오. 제가 해결하고 돌아오겠습니다."
당군악이 고개를 슬쩍 돌려 당패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본 당패가 움찔하며 즉시 고개를 푹 숙였다.
당패를 시선만으로 눌러 버린 당군악은 표정을 바꿔 흥미롭다는 얼굴로 당잔을 바라보았다.
당잔이 누군가를 이런 식으로 평가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네 말만 들으니 그의 강함이 특출해 보이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맞느냐?"
"……제가 보기에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너는 그들 중에서 화산신룡을 가장 의식하고 있구나."
당군악의 눈이 빛났다.
"이유가 무엇이냐. 네가 강호 내의 명성 같은 가치 없는 것에 의미를 두지는 않을 테고. 그에게는 어떤 특별함이 있었느냐?"
"그는……."
당잔이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제 비도에 하나의 비도가 더해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뭐라?"
당군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까지 나름의 여유를 지키고 있던 그의 모습이 아니다. 당군악의 전신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뿜어졌다.
그 가공할 기세에 당패와 당잔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자식들 앞에서 이만한 기세를 뿜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당군악이 얼마나 놀랐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뭐라 했느냐?"
"……그가 열두 번째 비도를 언급했습니다."
"그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겠지?"
"예."
당잔이 눈을 가늘게 떴다.
'십이비도(十二飛刀)를 알고 있다고?'
대외적으로 알려진 사천당가의 비도술은 십일비도다. 하지만 십일비도를 완성한 이는 또 하나의 비도를 다룰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십이비도.
사천당가 비도술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비전 중의 비전이다.
세인들은 당가라고 하면 만천화우를 떠올리고 무형독을 언급하지만, 십이비도는 그 두 가지 비전에 결코 뒤지지 않는 또 하나의 비전이었다.
너무도 난해하고 어려워 이제는 거의 실전되어 버렸지만 말이다.
"그 아이가 그 사실을 미리 알았을 확률은?"
"……저는……."
"아니, 없겠지.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열두 번째 비도의 존재를 아는 이는 당금 강호에는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사천당가에서도 기밀 중의 기밀인 일이다.
외부인이 알았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지. 세상에 완전한 비밀은 없으니까. 하지만 그 사실을 안 이가 하필 그런 어린아이일 수는 없다. 더구나 몰락했던 화산의 제자이지 않은가?
당군악의 눈이 차가워졌다.
"비무의 양상을 말해 보거라."
"예."
얼마 후, 당잔에게 모든 양상을 들은 당군악은 무겁게 침음성을 흘린다.
"암폭비(暗爆匕)를 사용했다고?"
"예."
"그럼에도 패했다라……."
물론 그 사실도 놀랄 일이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승부의 결과 따위가 아니었다.
"암폭비는 십이비도로 가는 길에 지나지 않는다. 완성된 암폭비는 은밀하게 발출된 열두 번째 비수와 함께해야 한다. 앞에서는 암폭비가 시선을 끌고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게 발출된 회선비(回旋匕)가 등을 노리는 것이 정석이지."
"예."
"그렇다면 암폭비만을 보고 초식의 미진함을 알아채어 또 하나의 비수가 필요하다는 말을 했다는 뜻이렷다?"
"……."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있을 수 없는 일."
당군악은 자식들이 앞에 있다는 것을 잊은 듯 중얼거렸다.
"그게 가능하다면 무학에 대한 이해도가 나를 뛰어넘는다는 뜻이지. 아니, 아니야. 머리로 계산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저 감각이겠지. 하지만 감각만으로 그걸 알아챘다는 건……."
귀재(鬼才).
그런 말로도 모자란다.
"화산에 귀재가 났단 말인가?"
당군악의 얼굴이 차게 굳었다.
그러더니 이윽고 결심을 굳힌 듯 당잔에게로 다가섰다.
"준비해라."
"예?"
"내가 직접 사해상회로 간다."
"……가, 가주님?"
당패가 당황하여 소리쳤다.
"가주님! 그건 안 될 일입니다! 가주님의 체면에 걸맞지 않는……."
당군악이 노기 어린 눈으로 당패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당패가 움찔하여 몸을 움츠린다.
"……당가가 어떻게 수백 년 동안 사천의 패자로서 자리할 수 있었느냐?"
"그건……."
"대답해라."
당패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가문의 선조들께서 목숨을 걸고 가문을 키워 왔기 때문입니다."
"틀렸다!"
당군악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목숨을 걸고 가문을 키워 온 건 당씨만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도 수많은 가문과 수많은 세가들이 모든 것을 걸고 가문을 키워 내고 있다. 그럼에도 당가가 그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한 위상을 얻어 낸 이유는 단 하나!"
자신의 아들들과 시선을 마주친 당군악이 작게 속삭인다. 커다란 비밀을 이야기하듯이.
"집요하기 때문이다."
"……."
"어찌 보면 소인배의 짓거리에 불과하지. 하지만 그 집요함이 당가를 만들어 냈다.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치지 않는 집요함! 가문에 해가 될 수 있는 것은 일만 리를 추적해서라도 없애는 집요함! 이득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집요함!"
당군악이 당패를 노려보며 말한다.
"너는 군자가 되고 싶으냐?"
"……아닙니다."
"명심해라. 당가에 군자는 필요 없다. 체면을 차리는 이는 감히 당가를 이끌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천하 모두가 손가락질을 하더라도 가문에 이익이 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만이 대 사천당가의 가주 자리에 앉을 수 있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며, 명심하겠습니다. 가주님!"
"모자란 것."
차게 쏘아붙인 당군악이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사해상회로 간다. 그놈이 귀재인지, 아니면 그저 입만 산 놈인지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다."
당잔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다.
* * *
"아니! 왜 안 가냐고!"
"아, 그냥 안 가."
"이놈이 갑자기 왜 또 강짜를!"
윤종이 답답함에 가슴을 쾅쾅 쳤다.
여하튼 이놈은 도무지 짐작이 불가능한 놈이다.
"진짜? 진짜 안 가?"
"어."
결국 윤종의 얼굴에 노기가 어렸다.
"그럼 여기 있어! 우리는 운남으로 갈 거야! 너는 여기서 살아!"
"그러든가."
"끄으으으응."
윤종이 머리를 벅벅 긁어 댔다.
막 그가 한마디를 더 하려는 찰나였다.
"사형."
유이설이 넌지시 백천을 부른다.
"왜?"
"당가가 가만히 있을까요?"
백천이 한숨을 내쉬었다.
"가만히 있을 리가 있느냐. 당연히 우리를 찾으려고 하겠지. 그러니 하루빨리 운남으로 가야 하지 않겠느냐? 여기에 있으면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그럼 사해상회는요?"
"……응?"
"당가는 화가 났겠죠. 그런데 저희가 없어요. 그럼? 사해상회는요?"
당가의 분노가 사해상회로 쏟아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백천이 슬쩍 조평을 돌아보았다.
조평이 허허 웃으며 고개를 내젓는다.
"그런 걱정은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사해상회는 당가와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그만한 일이 있었다고 문제가 벌어지지는……."
"사천당가가요? 그 사천당가가?"
조평이 입을 닫았다.
딱히 이런저런 말이 필요하지 않다. 사천당가라는 네 글자에는 그들이 얼마나 집요하고 잔혹한지가 충분히 담겨 있으니까.
"저도 조금 걱정입니다."
윤종이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뗐다.
"어제 밤늦게 이곳으로 쳐들어온 것은, 그들 역시 조걸의 입지를 낮추는 게 중요하다 여겼단 뜻이겠죠. 그런데 그 목적을 달성하기는커녕 오히려 망신만 당했으니 그 분노가 작지 않을 것입니다."
백천이 미간을 좁혔다.
'이곳을 빨리 떠나 버리는 것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뜻인가?'
백천이 다시 조평을 바라보았다.
사람 좋게 웃던 그의 얼굴에 살짝 곤란함이 떠올라 있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우리를 보내려 했구나.'
아마 조평은 이 모든 일을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당가가 쳐들어오기 전에 화산의 제자들을 빨리 성도에서 내보내 운남으로 보내려 한 것이다.
제아무리 당가라 해도 운남까지 쫓아가지는 못할 테니까.
그리고 당가의 분노는 그저 사해상회가 온전히 감당할 생각이었겠지.
'내가 이걸 놓치다니.'
백천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조걸이 당잔을 꺾었다는 사실과 운남으로 갈 방법을 찾았다는 사실에 흥분해 이 간단한 것을 놓치고 말았다.
그럼?
백천의 고개가 획 돌아간다.
이유 없이 떼를 쓰던 청명의 행동이 이해가 가기 시작한다. 아마도 청명은 이걸 알았겠지. 그렇지만 조평의 앞에서 사해상회가 걱정돼서 못 가겠다는 말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니. 그렇다고 다 큰 게 떼를 쓰냐, 인마?"
"어?"
"……됐다."
백천이 한숨을 내쉬었다.
"상회주님."
"예. 백천소협."
"아무래도 운남행은 조금 미뤄도 될 것 같습니다."
"……소협."
백천이 고개를 내젓는다.
"저희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저희가 감당해야지요."
"왜 그게 우리 때문이야. 사숙 때문이지."
"……여하튼."
백천이 표정을 관리하며 단호히 말했다.
"저희는 이곳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떠나더라도 당가와의 일을 마무리 짓고 나서 가겠습니다."
애써 태연한 척하던 조평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지며 무너졌다.
"당가가 얼마나 위험한 자들인지 알고 하는 말이오? 걸아가 당잔을 꺾은 것은 사실이나, 당잔은 당가의 진짜 힘에 비하면 어린아이에 불과한 자요! 지금 당장 이곳에서 떠나시오! 그러지 않으면……."
"아. 그건 이제 괜찮아요."
"응?"
갑자기 불쑥 끼어든 청명의 말에 조평이 고개를 갸웃했다.
청명이 씩 웃으며 말한다.
"생각보다 훨씬 빨리 왔네요. 벌써 도착한 모양이에요."
"……."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갑자기 바깥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이, 이런 벌써!"
조평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이라도 이들을 달아나게…….
"가, 가주님!"
그 순간 이 이상 다급할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천당가의 가주님께서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조평의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끝장이다.'
다리에 힘이 풀린 조평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