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그 실력으로 말입니까? (5)
다음 날.
"청명아! 일어나라! 상회주님께서 찾으……. 헐? 이게 뭐야?"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윤종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 아니 이 술병이 다?"
바닥에 술병이 잔뜩 널브러져 있고, 그 가운데서 청명이 대자로 뻗어 곯아떨어져 있었다.
윤종은 기겁하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이걸 혼자 다 마셨다고?'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못해도 다섯 동이는 되겠구먼.
윤종이 황급히 청명을 흔들어 깨웠다.
"청명아! 청명아, 이놈아! 일어나 봐!"
"끄으으으으……."
반쯤 눈을 뜬 청명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손을 내젓는다.
"하, 하지 마……. 머리 울려."
"아니, 이 미친놈아. 술을 그만큼 퍼먹었는데 그럼, 괜찮을 리가 있나! 내공으로 주독을 빼내면 되잖아!"
"그, 그럴 거면 술을 왜 먹어……."
어……. 그건 맞는 말이지.
확실히 그렇게 취기를 빼낼 거면 술을 마실 필요가 없지. 차라리 차를…….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일어나라! 상회주님께서 아침 같이 먹자신다!"
"끙."
청명이 마지못해 미적미적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완전히 일어나지는 못하고 앉은 채 머리를 감싸 쥐곤 앓는 소리를 내었다.
"으으으으. 죽겠다!"
윤종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 윤종을 따라 방 안으로 들어온 유이설이 방 안을 둘러보더니 미간을 확 찌푸렸다.
"민폐."
"……."
"사질의 집에 와서 민폐. 끔찍해."
"……."
"윤종."
"예, 사고."
"치우자."
"……."
윤종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그녀와 함께 널브러진 술병들을 주섬주섬 쓸어 모으기 시작했다.
'그런데 웬 술을 이렇게 마셨지?'
청명이 술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때와 장소를 가릴 줄은 안다. 그래서는 안 될 곳에서 과음하는 일은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건…… 정말이지 정신을 놓아 버린 듯 술을 마셔 대지 않았는가?
"무슨 일 있었어?"
"일은 무슨."
청명이 끄응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비척비척 입구로 걸어 나간다.
"끙. 안 되겠다. 아깝긴 하지만."
청명이 입맛을 다시더니 손을 밖으로 뻗는다.
'응?'
청명이 하는 양을 바라보던 윤종이 눈을 크게 떴다.
화륵!
청명의 손끝에서 갑자기 불이 피어올랐다. 그와 동시에 사방으로 매캐한 주향이 풍기기 시작했다.
"뭐, 뭐야? 갑자기 뭔 불이야 저거!"
아니, 저 미친놈이 이제 하다 하다 남의 집에 불을 지르네!
하지만 윤종이 놀라거나 말거나 청명은 손끝에 피워 낸 불을 더욱 크게 키웠다.
저 미친…….
"어?"
잠깐만 사람 손끝에서 불이 타오른다고?
설마?
'삼매진화(三昧瞋火)?'
윤종의 눈이 툭 튀어나왔다.
"아니, 저 미친놈이 삼매진화를 주독 날리는 데 쓰네?"
내력의 운용이 경지에 올라야 사용할 수 있다는 삼매진화를 청명이 벌써 쓸 수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 삼매진화로 주독을 날려 대고 있다는 게 더 놀랍다.
천하의 명검으로 무를 썰어 요리하는 격이 아닌가!
"끄으응."
주독을 모두 말려 버린 청명은 불꽃을 끄더니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셔 댔다.
"내가 옛날에는 죽으면 죽었지, 술독 빼는 짓은 안 했는데."
"대체 몇 살부터 술을 처마신 거야!"
"어? 그렇게 되나?"
청명이 겸연쩍게 웃었다.
"자자. 쓸데없는 건 신경 쓰지 말고 가 보자고."
청명이 막 발을 떼려는 찰나였다.
턱.
유이설의 손이 청명의 어깨를 짚는다.
"응? 사고?"
고개를 돌려 보니 무표정한 유이설이 청명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왜?"
유이설이 턱짓으로 뒤쪽을 가리킨다. 술병으로 엉망이 된 실내가 청명의 눈에 들어온다.
"치워."
"……네."
그래도 지은 죄가 뭔지는 아는 청명이었다.
방을 정리하고 그 김에 깔끔하게 씻은 뒤 옷까지 갈아입은 청명이 사형제들과 함께 식사 자리로 향했다.
조평은 상석에 앉아 있었다.
'얼씨구?'
청명은 그를 보고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근엄한 표정을 지으려 애는 쓰고 있지만, 입꼬리가 연신 춤을 추고 있다. 어떻게든 진정시키고 싶어 악을 쓰긴 하지만 도무지 얼굴이 말을 듣지 않는 모양새였다.
'그럴 만도 하지.'
어찌되었건 집 떠났던 자식이 돌아오자마자 사천의 패자인 사천당가 가주의 아들을 꺾어 버렸는데 기분이 좋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더구나 청명이 보기에 이 남자는 자식에 대한 애정이 굉장히 큰 사람이다. 그러니 평범한 아버지의 두 배는 더 기쁘겠지.
"크, 크흠. 오셨……. 오셨습니까!"
"아. 네."
웃음을 참으려다 보니 목소리가 들쭉날쭉한다. 청명이 고소를 머금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를 따라 유이설과 윤종도 자리에 앉았다.
그다음으로 청명의 시선을 잡아끈 이는 다름 아닌 조걸이었다.
'입에 파리 들어가겠네.'
목에 붕대를 칭칭 감은 조걸도 아까부터 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부자가 아주 쌍으로 좋아 죽네.'
이렇게까지 반응이 큰 것으로 보아 사천에서 사천당가를 이겼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크흐흠! 크흠!"
저러다 목 상하겠네.
크게 헛기침을 다시 한번 한 조평이 얼굴을 괴이하게 일그러뜨리며 입을 열었다.
"아, 아무래도 어젯밤에 워낙 큰일이…… 큰일이 있었으니, 그에 대한 대책을 논의할 겸 하여 조반을 함께 하고자 여러분을 모셨습니다."
그 말을 하는 와중에도 조걸을 한번 정감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걸 잊지 않는 조평이었다.
아주 눈에서 꿀 떨어지겠네.
백천이 살짝 웃으며 상황을 정리했다.
"아드님이 자랑스러우시겠습니다."
"하……. 그저 운이 좋았던 것뿐 아니겠습니까?"
겸양을 떠는 조평의 말을 백천이 곧장 바로잡아 주었다.
"운이 아닙니다."
"……."
"조걸의 실력이지요."
조평의 눈이 살짝 흔들린다.
"운으로 당가의 직계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조걸이 그동안 화산에서 쉬지 않고 자신을 혹독하게 몰아치며 수련을 한 결과입니다. 자식이 칭찬을 받고 엇나갈 걸 걱정하는 상회주님의 걱정은 이해하지만, 좋은 성과에는 올바른 대접이 필요한 법입니다."
"내 백 소협의 말을 겸허히 받아들이겠소이다."
조평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훈훈하기 짝이 없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곳에는 훈훈의 훈자만 들어도 두드러기가 나는 인간이 하나 존재했다.
"성과아아아아?"
"……."
"……."
백천과 윤종이 동시에 고개를 획 돌렸다.
'저게 또 뭘 하려고!'
'닫아라. 청명아. 제발 입 좀 닫아라!'
하지만 그들의 간절함은 청명에게 닿지 못했다.
"성과 두 번 올렸다가는 관짝에 들어가겠네!"
조걸이 움찔한다.
"내가 그흐렇게 입이 마르고 닳도록 설명을 했는데! 마르고 닳도록!"
"끄으응."
조걸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왜 저놈은 입만 열면 바른 말이지?'
이 순간 조걸은 역사에 남은 충신들이 왜 그리 단명했는지 알 것 같았다. 계속 듣게 되면 틀린 말보다 더 속 터지는 게 바른 말이라는 걸 이해해 버린 것이다.
"……그래도 피했잖아."
"생각만 똑바로 했으면 안 다쳤어!"
"그건 그렇지만……."
조걸이 입맛을 다셨다.
청명이 그들에게 알려 준 것은 단순한 훈련법만이 아니다. 강호에서 겪게 될 수많은 위기에 어찌 대처해야 하는지도 수도 없이 들려주었다.
물론 훈련 도중 개 패듯 패면서, 혹은 지쳐서 쓰러진 사람 옆에서 깐죽거리면서 떠드는 식이었기 때문에 받아들이기가 쉽진 않았지만 말이다.
여하튼!
그중에는 어제의 비무와 같은 상황에 대한 설명도 분명 존재했다.
- 일격필살이 왜 일격필살이야? 한 방에 죽이니까? 위력이 어마어마하게 세니까? 아니야. 다 쏟아부어서 못 죽이면 자기가 죽으니까 일격필살이야. 한 방 갈기고 나면 네가 죽든 내가 죽든 둘 중 하나는 죽는다는 뜻이라고.
- …….
- 그런데 그 일격으로 적을 못 죽이면? 내가 죽지! 그러니까 일격필살로 끝내려는 적을 보면 무조건 몸 중심선을 막아. 무조건!
팔 하나 날리고 죽고 싶어 하는 이는 없으니, 일격필살의 수는 반드시 일격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부위를 노린다.
그리고 그건 대부분 머리부터 사타구니로 이어지는 몸의 중심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상대가 최후의 일격을 사용한다 싶으면 일단 횡으로 회피하는 게 최선이다.
'서른여섯 번쯤 들었지. 아니, 좀 더 될 수도 있겠는데.'
마지막 순간 그 말을 떠올리지 못했다면, 조걸은 당잔을 이길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청명은 그 생각을 떠올리는 게 늦었다고 타박을 하는 중이었다.
그래, 저것도 참 맞는 말인데. 거참.
조걸이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조평은 그 광경을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사제로 보이는 청명이 조걸을 타박하는 건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상인이고, 실력제일주의를 외치는 사람이다. 신분이나 위계 따위보다는 누가 더 큰 돈을 벌어 낼 수 있는지가 중요하고, 그런 이를 더 중용해야 한다고 믿어 왔다.
실력만 있다면 사제가 아니라 제자에게라도 배워야 한다.
그런 그가 지금 놀란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저 청명이란 자가, 조걸이 당잔을 이긴 것을 그리 대단한 성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두 번째는…….
'저자가 정말 실력이 있다고?'
청명이 조걸을 타박하고 조걸이 수긍하는 모습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그건 청명이 평소에도 조걸에게 조언하고 가르침을 주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저 아이는 대체 정체가 무엇인가?'
자식에 대한 놀라움과 동시에 화산에 대한 놀라움을 감출 수 없는 조평이었다.
청명은 그렇다 치고, 저 백천이라는 자는 조걸보다 강한 것이 분명하다. 백천을 대하는 조걸의 태도에서 그 사실을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거기다 저 유이설이라는 아이는 조걸의 사고라 하고, 윤종이라는 아이 역시 조걸의 사형이라고 하니 조걸보다 약하지는 않을 것이다.
'화산이 용담호혈도 아닐진대.'
어찌 이런 인재들이 쏟아진단 말인가?
화산문하들의 면면을 살펴본 조평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속으로 결심을 굳힌 그는 이런저런 말이 더 나오기 전에 재빨리 시선을 자신 쪽으로 끌어모았다.
"해서."
모두의 시선이 조평에게 모인다.
조평이 백천을 바라보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운남으로 간다고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조평이 고개를 끄덕인다.
"본디 저 아이를 운남으로 보내는 것은 영 불안하여 막으려 했습니다만, 어제 비무를 보고 나니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저 아이를 저리 훌륭하게 성장시킨 분들과 함께라면 운남 정도야 큰 문제가 되겠습니까?"
"아."
백천의 얼굴이 화색을 띄었다.
"그럼……."
"예."
조평이 모든 걸 내어 주겠다는 듯 설명을 잇는다.
"사실 저희 사해상회는 운남과 나름의 연을 이어 오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적은 규모의 상행 정도는 보낼 수가 있습니다. 마침 오늘이 그 상행의 출발일이니, 거기에 동행하시지요."
백천이 자리에서 일어나 조평에게 포권을 했다.
"감사합니다. 상회주님."
"하하. 감사랄 게 뭐가 있습니까? 자식 놈을 이리 훌륭하게 키워 주셨으니 외려 제가 감사드려야지요. 고맙습니다. 참으로 고맙습니다. 백 소협."
"그 감사는 제가 아니라……."
청명을 슬쩍 흘겨본 백천이 미소와 함께 말을 잇는다.
"화산의 어른들과 장문인께서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아아, 물론이지요. 저도 꼭 한번 화산의 어른들을 찾아뵙고 싶습니다."
모든 일이 잘 풀렸다.
막막했던 일이 풀려 나간다는 생각에 한껏 미소를 지은 백천이 넌지시 묻는다.
"그 상행은 언제쯤 출발하는지요?"
"오후에 출발할 예정입니다. 그러니 식사를 마치고 준비하시면 될 겁니다. 멀리서 오신 귀한 객을 제대로 대접하지도 못하고 다시 걸음을 재촉하시게 만든 것 같아 속이 편치 않습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희가 원한 일입니다. 이 이상의 대접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하.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백천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다들 상회주님 말씀 들었겠지? 식사가 끝나는 대로 곧장 떠날 채비를 한다."
"예!"
"예, 사숙!"
"알겠어요, 사숙!"
"싫은데?"
"그래. 그럼 오……."
어?
방금 뭔가 이상한 말이 끼어든 것 같은데?
백천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그곳에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는 청명이 있었다.
"……뭐라고?"
"싫다고."
"……뭐가 싫은데?"
"안 갈 건데?"
"어딜?"
"운남."
백천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아, 그러니까 운남에 안 간다는 거지. 운남에?
으득.
백천이 이 갈아붙이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결국 옆에 조평이 있다는 사실도 머릿속에서 함께 터져 버렸다. 백천의 입에서 버럭 큰 소리가 튀어나왔다.
"아니, 인마! 운남 가려고 이 고생을 했는데 갑자기 또 왜! 도대체 또 뭐가 불만이냐, 이 망둥이 같은 놈아!"
백천의 고함 소리가 사해상회를 쩌렁쩌렁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