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그 실력으로 말입니까? (4)
조평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릅떴다.
이겼다.
그의 아들이 조걸이 저 당잔을 상대로 승리했다.
하지만 조평은 도무지 조금 전 본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잔이 누구던가?
사천을 지배하는 사천당가. 오로지 혈족만이 가치를 가지는 당가에서도 직계에 드는 이다.
그 실력은 굳이 검증이 필요하지 않고, 그 명성은 사천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그가 지금 조평의 아들에게 패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가 아들을 화산으로 보낸 것은 검에 대단한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아니, 아니!
재능이야 있었겠지!
재능이 있으니까 상인이 되어야 할 녀석을 검문으로 보내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 재능이 당가의 직계를 검으로 이겨 낼 만큼이었던가?
아니다.
조평은 확신했다. 제 아들을 과소평가한다는 말을 들어도 어쩔 수 없다. 상인인 조평은 상대의 가치를 정확하게 판단하는 게 업인 사람이다.
아끼는 자식이라고는 하나 조걸이 그리 대단한 재능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건 조평이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런 아들이 무려 당잔을 꺾었다.
저 당잔을.
"……."
무슨 말이든 해야 하는 건 알고 있지만, 쉬이 나오질 않았다.
그 순간 조걸이 당잔의 어깨에 올렸던 검을 회수하고는 몸을 빙글 돌린다.
그리고 조평이 보기에도 멋진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
"사숙. 제가 이겼습니다."
"그래, 조걸아!"
휘청.
휘청.
"제, 제가 이겼……. 아, 뭐가……. 응? 언제 피가 이렇게 많이 났……. 사숙 좀 어지러운……."
"마, 말하지 마라!"
"히익! 사숙! 조걸이 목에서 피가 계속 나옵니다! 저러다가 죽는 거 아닙니까?"
"의원! 의원! 당장 의원을 불러라!"
백천과 윤종이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는 와중, 유이설이 잽싸게 나서서 조걸의 목을 움켜잡고 지혈을 했다.
"아, 사고. 저는 괜찮……."
"말하지 마. 기운 빠진다."
"아, 네."
조걸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이기긴 했지만, 다친 목에서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아무래도 마지막 유엽비도가 혈관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쯧쯧쯧."
청명이 혀를 차며 다가오더니 조걸의 목 부분을 두 군데 꾹꾹 눌렀다.
그러자 퐁퐁 솟던 피가 멎기 시작했다.
"이야. 반 치만 더 들어갔으면 죽었겠는데?"
"뭔 재수 없는 소리를!"
"악담을 해라! 악담을! 인마!"
돌아오는 격앙된 반응에 청명이 입을 삐죽 내민다.
"그냥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끄응."
백천과 윤종은 소리를 버럭버럭 질러 댔지만, 당사자인 조걸은 그저 실없이 웃기만 했다.
"좋아?"
"그럼."
"그렇게 좋아?"
"그렇다니까!"
"그럼 나 만 냥만 빌려줘."
"그래, 빌려줄……. 아니, 인마!"
"에이. 안 속네."
청명이 혀를 쯧쯧 찼다.
조금 더 놀리고 싶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세상 다 얻은 듯 웃는 조걸을 보니 놀릴 의욕도 뚝 떨어진다.
무당의 제자들을 이겼을 때도, 심지어는 혼원단을 손에 넣었을 때조차 이렇게까지 행복해하진 않았었다.
'조걸 사형에게는 그만큼 당가가 큰 벽이었던 거겠지.'
그 벽을 뛰어넘은 이상 조걸은 더 성장할 것이다.
애초에 검에 대한 재능만을 따진다면 조걸은 화산의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청명이 없었다면 화산제일검의 명성은 백천에서 조걸로 이어졌을 것이다.
'이 일로 개화할 수 있다면 좋겠네.'
매화를 피워 내야 하는 건 검만이 아니다. 화산의 사람 역시 피어나야 한다.
청명이 고개를 획 돌렸다.
당가의 세 사람이 보였다. 그중 당잔은 아직도 패배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반쯤 풀린 눈으로 허공만 응시하며 서 있었다.
"안 가요?"
"……."
"아니면 뭔 검증이 또 필요하신가?"
당잔이 입술을 질끈 깨문다.
할 말은 많다. 하지만 그 어떤 말도 이번 상황에서 의미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화산신룡도, 화정검도 아닌 조걸에게 패했다. 아직 변변찮은 별호조차 가지지 못한 조걸에게 말이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패배다.
당잔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굴욕감과 패배감. 이루 말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들이 그의 안에 소용돌이친다.
이 일로 가문에서의 입지가 얼마나 추락할지를 생각하면 눈앞이 아찔해진다.
그때였다.
"여기요."
"……?"
당잔이 고개를 든다.
그를 향해 술병을 내밀고 있는 청명의 모습이 보였다.
"속 쓰릴 때는 한잔하는 게 최고죠. 쭉 들이키세요."
"……."
당잔의 얼굴에 황당함이 어렸다.
'이 작자가 지금 나를 놀리는 건가?'
범상치 않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리 경우를 모를…….
"평생 한 번도 안 질 것 같았어요?"
"……."
갑자기 찔러 들어온 말에 당잔이 눈을 치떴다.
청명의 말이 그의 내심을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하지만 당잔은 당장은 인정을 거부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나는 그리 오만하지 않소. 당장 가문내만 하더라도 나보다 강한 형님들은 널리고 널렸소이다!"
"네. 하지만 형이죠."
"뭐?"
청명이 피식 웃었다.
"동생에게는 져 본 적이 없겠죠. 같은 나이 또래에게도 져 본 적이 없을 거고."
"……."
"지금 당신보다 강한 사람은 많지만, 결국은 다 따라잡을 거라 생각했죠?"
당잔이 아무 말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청명이 그 모습을 보며 씨익 웃었다.
'왜 아니겠어?'
이 나이 대에 잘 나가는 후기지수들은 다 같은 생각을 한다. 이대로만 성장할 수 있다면 언젠가는 천하제일인이 되는 건 꿈이 아니라고 말이다.
청명?
물론 청명도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정말 안 졌지만, 뭐…….'
하지만 대부분의 후기지수들은 그럴 수 없다. 언젠가는 패배를 경험하고 언젠가는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게 된다. 다만…….
"패해 보지 않은 자가 강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
당잔이 청명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내 움찔한다.
지금까지 봐 온, 장난기 가득한 모습이 아니다. 가라앉은 눈으로 이쪽을 물끄러미 보는 청명의 모습엔 천하의 당잔마저도 숨죽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상처가 아물면 살은 더 단단해지죠. 거꾸로 말하면 상처를 입지 않은 몸은 강해지지 않는다는 소리죠."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선택은 그쪽이 하는 거예요. 이 패배라는 상처를 발판 삼아 더 강해질 건지. 아니면 그 잘난 자존심에 입은 상처 때문에 빌빌댈 건지."
청명이 술병을 다시 쑥 내밀었다.
"선택은?"
"……."
가만히 청명을 바라보던 당잔이 청명이 내민 술병을 낚아채듯 받아 들었다.
그리고 고민 없이 병째로 술을 들이키기 시작한다.
"크."
독한 화주의 맛에 눈을 찌푸리며 술병을 청명에게 다시 돌려준다.
"쓰군."
청명이 씩 웃으며 당잔이 내민 술병을 받아 들었다.
꼴꼴꼴꼴.
"크으으으으!"
술을 시원하게 들이켠 청명은 더없이 좋다는 얼굴로 말했다.
"뭐 그렇게 실망할 건 없어요. 지금이야 창피하겠지만."
청명이 슬쩍 조걸을 돌아보았다.
"곧 저 사람에게 패한 게 창피하지 않은 일임을 천하가 알게 될 테니까."
"……."
당잔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리되어야 할 것이오."
"물론이죠."
청명이 몸을 돌리려고 하자 당잔이 그를 다시 불러 세웠다.
"하나 물어도 되겠소?"
"네?"
청명이 의아한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당잔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그대는 얼마나 강하오?"
"하하."
청명이 피식 웃었다.
"지금 당신으로는 어렵죠."
"……그야……."
"그래도 혹시 모르죠."
"음?"
청명의 얼굴에 다시 장난기가 돌아왔다.
"그 비도가 열한 개가 아니라 열두 개가 된다면 나도 조심해야 할 테니까."
"……."
당잔이 충격을 받은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그걸 어…… 어떻게……."
"뭐, 그건 먼 훗날의 일이겠지만. 여하튼 열심히 해 보세요. 그럼 나는 못 이겨도 당가제일인 정도는 될 수 있어 보이니까."
청명이 손을 살짝 흔들고는 완전히 몸을 돌리며 말했다.
"손님들 가신대요!"
그리고 홀연히 전각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백천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헛기침을 하며 당잔에게로 다가갔다.
"실례했습니다. 워낙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라."
"……아니오."
당잔이 고개를 내젓는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해졌다.
'알 수 없는 일이로군.'
그 짧은 몇 마디 대화로 마음이 편해질 리가 없는데 말이다.
당잔이 백천을 향해 포권을 했다.
"무례에 사과드리오."
"천만에요."
백천도 당잔을 향해 마주 포권 한다.
그러면서도 백천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당잔을 보는 걸 잊지 않았다.
'기이한 일이군.'
청명이 화산의 제자가 아닌 다른 문파의 사람에게 이리 관심을 보이는 건 처음이다. 애초에 타 문파 사람을 만난 적이 별로 없긴 하지만…….
그때 문득 백천의 시선이 한 군데에 꽂혔다. 녹피 장갑을 벗는 당잔의 손.
멀리서 볼 때는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 손에 자잘한 상처가 수도 없이 나 있다.
'노력하는 이라는 건가?'
알 수 없는 일이지. 저놈의 속을 누가 짐작이나 하겠는가?
"우리는 이만 돌아가 보겠소."
"이걸로 된 겁니까?"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소. 이미 말했듯이 이건 가문의 일이오. 나는 그저 돌아가 내가 조걸에게 패했다고 보고할 뿐이지. 그 뒤의 일은 가문에서 정할 것이오."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살펴 돌아가십시오."
"그럼."
당잔이 바닥에 떨어진 유엽비도들을 회수하고는 몸을 돌린다.
"가자!"
"예, 형님!"
당명이 쓰러진 당호를 들쳐 업고는 당잔의 뒤를 따랐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화산의 문하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폭풍 같았네요."
"당가가 가만히 있을까요, 사형?"
"글쎄다."
백천이 턱을 긁었다.
'사천당가는 사소한 원한도 잊지 않는다고 했다.'
당잔은 뒤끝이 없어 보이지만, 그의 뜻이 사천당가를 대변할 수는 없다. 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당가는 반드시 이 일을 수습하려 들 것이다.
백천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놈이 또 사고를 쳤구나."
"……."
"……."
조걸과 윤종이 황당하다는 눈으로 백천을 바라보았다.
"사고는 사숙이 치……."
"들어가자. 상처를 치료해야지."
"아니. 일을 벌인 건 사숙……."
"어허. 너는 말을 하지 말거라. 부상이 깊다."
"……."
"크흐흐흐흠!"
백천이 크게 헛기침을 하고는 안쪽으로 휘적휘적 걸어가 버렸다.
그 자리에 남은 유이설과 삼대제자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사형."
"응?"
"사숙도 요즘 조금 이상해지는 것 같지 않습니까?"
"……요즘? 조그음?"
"……."
"끄으응. 화산이 어찌 될는지."
남은 세 사람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 * *
쪼르르륵.
어수선한 분위기를 피해 방으로 돌아온 청명은 그답지 않게 술을 잔에 따랐다.
그리고 그 잔을 자신의 건너편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탁자 너머에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청명은 마치 그곳에 누군가 있는 것처럼 술병을 살짝 들어 잔을 부딪치는 시늉을 했다.
"닮았더라."
청명이 피식 웃는다.
당잔의 모습은 그에게 옛 기억을 떠올리게끔 했다.
옛날. 아주 오랜 옛날.
그래. 아주 오랜.
- 아니, 도사 형님! 내 몫도 남겨 달라고 했잖소! 마교 새끼들 등짝에 칼 꽂아 버리는 건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없다니까!
- 저 빌어먹을 새끼들 때문에 사천이 쑥대밭이 되어 버렸소! 내가 절대로 저놈들은 곱게 안 돌려보낼 거요!
- 형님 진짜 도사 맞소? 아니, 내 살다 살다 형님 같은 말코 도사는 생전 처음……. 아니, 그 검 내려놓으시고! 뭔 사람이 대화를 입이 아니라 검으로 합니까! 으악!
- 형님……. 당가…… 당가를……. 제 숙질들을…… 부탁…….
탁.
술병을 조금 거칠게 내려놓은 청명이 가만히 눈을 감는다.
화산은 모든 것을 걸고 마교와 싸웠다.
하지만 그 긴 전쟁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이들이 어디 화산뿐이었겠는가?
'미안하다.'
당가를 보살펴 달라는 그 유언은 결국 지키지 못했다. 청명 역시 죽고 말았으니까. 천마를 쓰러뜨리는 것으로 당가를 지켜 냈다고도 할 수는 있겠지만…….
청명은 알고 있다. 그것만으로는 그 약속을 온전히 지켰다 할 수 없다는 걸.
"네 절기는 이어지고 있다."
열두 개의 비수.
십이비도.
아직은 열한 개에 불과하지만 언젠가는 당잔의 손에서 열두 개의 유엽비도가 발출되는 날이 올 것이다.
"물론 내게는 화산이 우선이다."
그렇지만…….
"걱정할 것 없어. 당가가 사고 쳐도 웬만한 일이면 한 번은 봐줄 테니까."
네 얼굴을 봐서 말이야.
청명이 건너편에 놓은 잔을 집어 안에 든 술을 마셔 버리고는 다시 채웠다.
"간만에 한잔하자꾸나. 예전 같은 맛은 아니겠지만."
청명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