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그 실력으로 말입니까? (3)
일격?
당잔의 눈에 경악이 어렸다.
일격. 오로지 일격이었다.
당잔의 시선이 바닥에 쓰러진 당호에게로 향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당호가 당잔에 비해서는 실력이 처지는 편이라고는 하나, 그 역시 사천당가 가주의 아들. 어중이떠중이에게 당할 실력은 아니다. 아니, 어디에서도 처지는 실력은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당호가 일격에 의식을 잃고 꼴사납게 바닥에 쓰러져 있다.
방심해서?
물론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상황을 여기까지 만든 것이 면책되지 않는다. 방심한 상대의 허점을 노리는 것 역시 실력이니까.
뭔가 말을 하려 입술을 몇 번 달싹이던 당잔은 결국 입을 꾹 닫고 말았다.
지금은 어떤 말도 의미가 없다.
당혹함을 어떻게든 감추려 애쓰는 당잔과 다르게 조걸의 얼굴은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와, 어떻게……!'
그의 눈에 바닥에 쓰러져 있는 당호가 들어온다.
당가의 직계.
과거의 조걸에게는 무슨 수를 써도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자 평생을 지고 가야 할 천형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 그 벽이 무너졌다.
기쁨과 흥분이 교차한 얼굴로 조걸이 검 손잡이를 꽈악 잡는다.
그리고 그 순간.
"다으으으음?"
"……."
삐딱한 목소리가 조걸의 귀를 파고든다.
'돌아보지 말아야지. 절대 뒤돌아보지 말아야지.'
등 뒤에서 사형제들이 어떤 눈으로 보고 있을지 눈에 훤하다. 저 승냥이 떼에게 틈을 보여서는 안 된다.
"아주 검신 납셨네."
"겉멋만 들어서는!"
"저거, 저거 더 맞아야 돼, 저거."
훈훈하지 않은가.
얼마나 훈훈한지 몸에서 땀이 절로 배어날 정도다.
'한동안은 절대 눈도 마주쳐서는 안 돼.'
마주쳤다가는…….
"다아아아으으음?"
"……."
일단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놈은 죽어도 피해야 한다.
낮은 헛기침으로 민망함을 날려 버린 조걸이 검이 들고 당잔을 정확하게 겨눈다.
"오지 않을 셈입니까?"
"……."
그 말에 발끈한 것은 당잔이 아니라, 그의 옆을 지키고 있던 당명(當明)이었다.
"이놈이 감히!"
당명이 이를 갈며 앞으로 나서려는 찰나, 녹피 장갑을 낀 손이 그의 앞을 가로막는다.
"형님?"
당잔이 차게 가라앉은 눈으로 당명을 보았다.
"물러서라."
"하지만 저놈이 너무 방자……."
"네 상대가 아니다."
당명이 눈을 부릅떴다.
지금 당잔의 입에서 나온 말이 어떤 의미인지 모를 그가 아니다. 당잔과 조걸을 번갈아 보던 당명의 시선이 이내 바닥에 쓰러져 있는 당호에게 가 닿았다.
"……."
당호와 그의 실력은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다. 당호가 당했다면 그 역시 당할 수 있다는 뜻.
나아가, 조걸이 당호를 쓰러뜨린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의미다.
기세가 죽은 당명이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말없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번에는 당잔도 그를 말리지 않았다.
당명은 바닥에 쓰러진 당호를 들쳐 업고는 자리로 돌아왔다.
"물러나 있거라."
"예."
설사 조걸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당잔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다. 형제라곤 해도 당잔과 그는 가문에의 입지가 다르니까.
당명을 뒤로 물린 당잔은 조걸과 그 뒤에서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화산의 문하들을 바라보았다.
"동생이 실례를 저질렀소."
"……."
"하나, 나는 저 녀석과는 다르니 조심하는 게 좋을 거요."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말투였다. 그 말을 들은 조걸의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머리가 이해하기 전에 몸이 당잔의 강함을 파악한 것이다.
'무당의 이대제자 이상인가?'
이미 무당의 진자 배와 검을 섞어 보았고, 그리 어렵지 않게 승리를 따 냈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당잔은 그보다 한 차원 위의 존재 같았다.
하기야.
무당 같은 거대 방파의 제자와 당가와 같은 소수정예 세가의 직계를 비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잔을 상대하려면 검룡 정도는 직접 나와야 할 것이다.
'검룡이라.'
백천이 상대했던 검룡을 조걸이 상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얼마나 강할까?'
조걸의 가슴이 살짝 흥분으로 들떴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저 봐, 저 봐. 어깨 들썩이는 것 봐. 뒈질라고."
"……."
저 귀신 같은 새끼.
청명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조걸의 귀를 파고들었다.
"사람이 그만큼 상대를 앞에 두고 흥분하지 말라고 귀에 못이 박이도록 이야기를 하는데, 어떻게 일다경도 안 돼서 여물 본 소처럼 들썩거리지? 귀에 만년한철이라도 덧씌워 놔서 못이 안 박이나?"
푸욱.
청명의 말이 비수처럼 조걸의 등에 꽂힌다.
"전장에 나가면 흥분하는 놈이 제일 먼저 뒈진다고 몇 번이나 말을 했는데 안 듣는 이유가 뭘까? 정말 뒈지고 싶어서 그러는 걸까? 그럼 꼭 그렇게 안 죽어도 될 건데. 접시 물에 코를 박아도 되는데 왜 꼭 남의 손에 죽으려는 걸까?"
또다시, 푸욱.
조걸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실제 몸에 비수가 박혀도 이렇게 아프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아픈 것만은 아니었다.
'내가 미쳤지.'
눈앞에 적을 두고도 그 적과 싸울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하다니. 검을 처음 잡은 어린아이도 이런 바보 같은 실수는 하지 않을 것이다.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가슴도 차갑게!'
화산의 무공은 검 끝의 섬세함에 모든 것을 건다. 검을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한다면 그 위력이 반도 드러나지 않는다.
'차갑게. 더 차갑게.'
조걸의 눈이 낮게 내려앉았다.
"흥."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청명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다.
"꼭 말을 해야 기억하지."
알아서 좀 잘하지! 알아서!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그동안의 수련이 헛된 건 아닌 것 같아서 마음이 조금 놓이는 청명이었다.
그런 그를 향해, 뒤에 선 백천이 묘한 시선을 던졌다.
'이 녀석은…….'
백천은 청명처럼 사질들을 이끌 수 없다.
그처럼 앞서 나가 알려 주고 가르칠 수 없다. 하지만 저들을 보듬고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것은 청명보다는 자신이 나을 것이라 생각해 왔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백천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진짜 사질들을 생각하는 건 이 녀석인지도 모르겠군.'
품에 끼고 있어서는 성장할 수 없다. 무릎이라도 깨질까 봐, 혹여 물에 빠질까 봐 물가로 내보내지 않는다면 아이는 평생 물에 발을 담가 볼 수 없는 법이다.
내보낸다.
걱정되고 불안해도 믿으며 내보낸다. 그게 사람을 키우는 방식이다.
청명이 직접 나선다면 당잔 따위는 단 일 초식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청명은 그 손쉬운 방법 대신, 주먹을 꽉 쥐며 불안한 마음을 애써 달래는 쪽을 택했다.
'나는 아직 멀었구나.'
백천이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조걸의 등을 바라보았다.
믿는다.
그의 사질들을.
그리고 화산의 제자들을.
당잔의 눈이 조걸을 노려본다.
고요하다.
검을 겨누고 있는 조걸의 얼굴에는 어떤 잡념도 떠오르지 않는다.
놀라운 집중력이다.
아니, 어쩌면 집중력마저 넘어선 무아(無我)의 일종일지도 모른다.
'나는 저토록 집중할 수 있는가?'
무리다.
적어도 지금은.
하지만 당잔은 자신이 밀린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집중력은 그저 무력의 한 방편일 뿐, 더 강한 힘 앞에서는 무의미하다.
까드득.
소매 안으로 잡은 유엽비도(柳葉飛刀)가 섬뜩한 마찰음을 낸다.
까드득. 까드득.
그 마찰음이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마치 분위기를 고조하기라도 하듯이.
그리고 일순!
당잔의 소매 안에 들어가 있던 손이 섬전처럼 뽑혀 나왔다. 동시에 세 자루의 유엽비도가 빛살처럼 조걸을 향해 날아간다.
쇄애애애애액!
뭔가 번쩍하는 순간 이미 비도가 조걸의 지척에 다다라 있었다.
조걸의 눈이 빛을 발한다.
카앙! 카앙!
두 자루의 비도를 쳐 낸 조걸이 몸을 크게 뒤틀었다. 화산 삼대제자 중 제일가는 쾌검을 자랑하는 그로서도 세 자루의 검을 모두 쳐 내는 데에는 실패했다.
남은 하나는 몸을 비틀어 피해 낼 수밖에 없었다.
쇄애애액!
그러자 다시금 두 자루의 유엽비도가 조걸을 향해 날아든다.
"탓!"
몸의 균형이 무너진 조걸이 바닥으로 검을 내리친다. 그리고 그 반동으로 허공에 몸을 띄워 유엽비도를 가까스로 피해 냈다.
사삭.
유엽비도가 그의 머리끝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며 머리카락이 잘려 흩날린다.
'강하다!'
그 와중에도 조걸은 상대의 강함에 전율했다.
단순한 비도술.
그저 내력을 실어 강하게 던지는 것이 전부다. 하지만 이 비도는 당잔이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고련을 해 왔는지를 증명하는 것처럼 무시무시한 완성도를 자랑했다.
군더더기 없는 발출. 그리고 더없이 쾌속한 속도.
그 무엇보다…….
"타아아아앗!"
바닥으로 떨어지는 조걸을 향해 다섯 자루의 비도가 쇄도해 온다.
'연계!'
처음 두 자루를 던졌을 때부터 이런 상황을 의도했다는 듯, 당잔의 비도는 거침이 없었다.
파아아아앗!
다섯 자루의 유엽비도가 회전하며 조걸의 전신을 노려 온다.
단 한 자루의 비도만 박혀도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끔찍한 상처를 입을 게 분명하다. 설사 저 비도에 독이 발려 있지 않다고 해도 말이다.
'강하다.'
분명 당잔은 강하다.
하나!
'미안하지만!'
조걸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다리를 살짝 끌어당긴 조걸이 전력으로 허공을 박찬다. 기운을 내뿜은 반동으로 속도를 얻은 뒤 날아드는 비도를 향해 돌진한다.
'나는 너보다 더한 괴물과 매일같이 싸우는 중이라고!'
손끝이 검에 달라붙는다.
마치 검이 그의 팔이 되어 버린 것만 같다.
상대가 강하다고?
위험하다고?
그게 뭐 어쨌다는 말인가?
화산의 매화는 비바람 속에서도 피어나고, 심지어는 혹한의 눈보라 속에서도 피어난다.
어떤 상황이건 매화가 피지 못할 이유는 없다!
조걸의 검 끝에 작은 꽃봉오리가 만들어진다.
피어라.
피어나라!
이윽고 완성된 조걸의 매화가 흐드러지더니, 날아드는 다섯 개의 비도를 모조리 뒤덮었다.
카앙! 카카카캉!
비도가 매화를 뚫지 못하고 도로 튕겨 나간다.
기세를 살려 당잔에게 달려들려던 조걸이 그 자리에서 멈칫한다.
고오오오오오오!
마지막 유엽비도가 당잔의 손안에서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회전하고 있었다.
저 비도 안에 얼마나 어마어마한 진기를 밀어 넣고 있는지는, 그의 얼굴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십일비도!'
과거에 들어 본 적이 있다.
당가의 비도술.
'열 한 개의 비도를 가진 이를 조심하라. 마지막 비도는 알아챌 틈도 없이 너의 혼을 앗아 갈 것이다.'
그 마지막 비도가 당잔의 손안에서 조걸의 혼을 꿰뚫을 준비를 하고 있다.
우우우우우웅.
당잔의 손을 떠난 비도가 천천히 조걸을 향해 날아든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조걸이 대경한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저 속도로 날아오는데도 비도가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는 것이 괴이할 정도다. 너무 느려서 도저히 맞아 주고 싶어도 맞아 줄 수 없는 속도.
하지만 그 우스꽝스러운 모양에도 불구, 그 비도를 본 순간 조걸의 전신에서 땀이 배어나기 시작한다.
온다.
반드시 온다. 어마어마한 것이.
그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아!
마치 멈춰 있는 듯 천천히 날아오던 비수가 폭발적인 속도로 조걸을 향해 쏘아져 왔다.
도저히 눈으로 쫓을 수도 없는 속도다.
그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는 비수가 이미 조걸의 목 바로 앞에 도착한 후였다.
"조걸아!"
"아아악!"
그 가공할 속도에 놀란 화산의 제자들이 대경실색했다.
하지만 정작 조걸의 시선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내디딘다.
옆으로 한 발.
뒤틀어 낸다.
전신을!
서거억!
섬뜩한 소리와 함께 조걸의 목이 반 치쯤 베여 나갔다. 목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허공으로 흩뿌려졌다.
조걸의 몸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였다.
'잡았……!'
당잔이 쾌재를 부르려던 그 순간.
조걸의 몸이 한 바퀴 빙글 회전하더니 바닥을 박차며 당잔을 향해 섬전처럼 돌진한다.
"엇?"
그 순간 당잔이 본 것은 조걸이 아니었다.
'매화?'
그의 시야를 모두 뒤덮은 건 흐드러지게 피어난 매화였다.
그야말로 장관이 아닐 수 없다.
턱!
당잔의 어깨에 작은 무게가 느껴진다.
어느새 매화가 사라진 곳에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목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조걸.
그의 손에 들린 검이 당잔의 어깨에 얹혀 있다.
"……."
당잔은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벌렸다.
"다음……은, 에이. 못 하겠다."
조걸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젓는다.
"여하튼 내 승리요."
빙그레 웃는 그의 얼굴을 보며 당잔은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패배.
변명의 여지조차 없는 깔끔한 패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