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그 실력으로 말입니까? (1)
조평의 눈이 반쯤 밖으로 튀어나왔다.
"어……. 어어……."
'뒈질라고?'
조평은 순간 자신이 들은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한참 되새겼다.
저 당잔을 향해 저런 상스러운 말이 쏟아지는 풍경은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다.
당잔이 누구인가?
사천의 유력가이자, 성도의 지배자인 사천당가의 다섯째 공자가 아니던가?
다른 곳도 아닌 성도에서 사천당가의 자제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이가 있을까?
있다면 사천당가조차 발아래로 둘 수 있는 천하의 강자거나 아니면…….
'그냥 미친놈이겠지.'
불행하기 짝이 없게도 지금의 상황은 아무리 봐도 후자에 가깝다. 이 어린 청년이 사천당가조차 안중에 두지 않을 강자일 수는 없으니까.
그 말인즉슨.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하지?'
머릿속이 하얗게 질린다.
사천당가가 소수에 불과함에도 천하에 그 이름을 떨치는 이유는 단순히 그들이 강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 집요함과 표독함.
정파임에도 오히려 사파에 가깝다고 평가될 만큼, 원한을 잊지 않고 모독에 민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사천당가를 저리 대놓고 모독했으니 그 뒷감당을 어찌하려는 것인가.
심지어 이 여파는 단순히 화산에서 그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사해상회 역시 이 일을 일정 부분 책임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조평의 우려와는 달리, 당잔은 딱히 흥분하지 않았다.
분노보다는 황당함이 크기도 했고, 어떤 상황에서도 흥분해서는 안 된다는 가문의 가르침이 그를 억누르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뜬 그는 흥분하는 대신 문밖으로 걸어 나온 이를 면밀히 주시했다.
매화 무늬가 새겨져 있는 화산의 무복.
아직은 어린 티를 완전히 벗지 못한 얼굴은 나름 헌앙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화산의 제자라는 것은 확실하지만, 저자가 화산의 제자 중 누구인가는 확실치 않았다.
"귀하는 누구시오?"
당잔은 자신이 지금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침착함과 예의를 담아 입을 열었다.
하지만 돌아온 반응은 그가 차린 예의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넌 누군데?"
"……."
심드렁하다 못해 무례한 반응.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
그리고 손에 들린 술병.
그 모든 것을 종합해 본 결과, 당잔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취했네.'
취객과 드잡이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다만.
'외지에서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시다니. 강호에 떠도는 화산 제자들에 대한 소문은 다 과장이었단 말인가?'
당잔의 머릿속에서 화산에 대한 평가가 수직으로 하락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그 평가에 반발이라도 하는 듯이 화산의 무복을 입은 이들이 방에서 우르르 뛰쳐나왔다.
"아하하하하하!"
"애가 많이 취해서요. 죄송합니다!"
"들어가자! 자아, 청명아! 들어가자, 어서!"
화산의 제자들이 취객의 사지를 움켜잡고 안으로 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여기까지라면 그저 웃어넘길 수 있을 일이었지만…….
문제는 그 취객의 이름이다.
"청명?"
당잔의 입에서 당황을 숨기지 못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저자가 그 화산신룡 청명이란 말이오?"
"……."
이내 눈에도 경악이 어렸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조평 역시 황당하단 눈으로 화산의 제자와 당잔을 번갈아 보았다.
"화, 화산신룡? 저 사람이?"
조평의 말이 당잔의 심정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화산신룡.
이제 그 이름 앞에는 한 가지 수식어가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따라붙는다.
천하제일 후기지수.
이 말에는 강호인들의 선망과 기대가 어려 있다.
천하제일인의 자리를 꿈꾸는 후기지수들이 누구나 손에 넣고 싶어 하는 자리. 당대의 단 한 사람만이 이름을 올릴 수 있는, 영광스럽기 짝이 없는 별호다.
종남의 이대제자 열 명을 상대로 승리.
심지어는 무당의 진자 배도 아닌, 무자 배를 상대로 승리했다는 소문마저 몰고 다니는 이.
그리고 그토록 위험했던 검총에 뛰어들어 몰살을 막아 내고 끝내 무당 허산자의 인정을 받아 낸 이.
무력과 지력을 겸비한 당대 최고의 후기지수!
"……저자가?"
당잔과 조평의 고개가 동시에 삐딱해졌다.
'아닌 것 같은데.'
에이, 설마.
당장 저 주정뱅이의 옆에 있는 이들이 훨씬 더 훌륭한 무인 같아 보인다. 그중 하나는 당잔마저도 긴장하게 만들 만큼 굉장한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그런데 저런 자를 내버려 두고 저 주정뱅이가 화산신룡이라고?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게 아니면 천하에 알려진 화산신룡에 대한 평가가 완전한 거짓이든가.
당잔의 미간이 좁아졌다.
살짝 고민을 하던 그는 잠시 후 입을 열었다.
"그대가 화산신룡 청명이오?"
질질 끌려가던 청명이 그의 목소리에 반응했다.
"놔 봐! 놔 보라고! 쟤가 나 부르잖아!"
"아니야, 아니야. 아무도 안 불렀어."
"잘못 들었어. 잘못! 들어가자, 청명아!"
"아니, 지금 불렀다니까! 읏차!"
팔을 휘저어 사형제들을 떨쳐 낸 청명이 다시금 휘적휘적 걸어 앞으로 나섰다. 그러더니 당잔을 보며 눈을 가늘게 뜬다.
"나 불렀어?"
"……그대가 청명이오?"
"하."
청명이 한숨을 푹 내쉰다. 그리고 낮게 혀를 찼다.
"아니, 요즘 애새끼들은 다들 예의를 밥 말아 처먹었나. 남의 이름 묻기 전에 자기 이름부터 말해야 한다는 건 기본 아냐?"
당잔이 입을 꾹 닫았다.
듣고 보니 자신이 실수를 한 게 맞다. 워낙 황당하다 보니 예의를 잠시 잊은 것이다.
"넌 누군데?"
"……실례했소. 나는 사천당가의 당잔이라고 하오."
"당가?"
"그렇소이다."
"아니……."
청명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당가면 배울 만큼 배운 놈일 텐데, 이 야밤에 쳐들어와서는 사람을 내놓으라 난리를 친다고? 내가 아는 당가는 싹 다 뒈지고 그새 다른 당씨 놈들이 당가를 새로 만들었나?"
청명의 말이 쏟아질수록 당잔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를 모욕하는 것은 상관없다. 그러나 이건 당가를 직접 모욕하는 말이었다.
결국 흥분한 당잔이 막 한소리를 하려는 찰나, 윤종이 후다닥 앞으로 뛰어나와 청명의 입을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요놈의 주둥이! 요놈의 주둥이!"
찰싹! 찰싹!
"악! 아악! 왜 때려!"
"에라!"
아예 청명의 뒷덜미를 움켜잡은 윤종은 그를 질질 끌고 뒤로 물러났다.
그 광경을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는 당잔의 앞으로, 백천이 슬쩍 헛기침을 하며 나섰다. 그 역시 얼굴이 약간 붉어져 있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화산의 백천이라 합니다."
"……화정검이시오?"
"과분하지만 그런 별호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귀하께서 그 무당의 검룡을 꺾은 바로 그 사람이시군요."
"……가볍게 손을 나눴을 뿐입니다."
당잔의 눈이 서늘해졌다.
어쨌건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났다. 워낙 황당한 일을 겪다 보니 상대가 경우를 안다는 사실에 반가움까지 느끼는 당잔이었다.
"이 야심한 밤에 찾아뵌 무례를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천하에 이름을 떨치는 화산의 제자들이 성도에 들었다는 말을 들으니 들끓는 호승심을 감당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무례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저 저희가 감히 당가의 호승심을 불러일으킬 만한지, 민망할 따름입니다."
당잔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특히나……."
당잔의 시선이 백천의 뒤에 선 조걸에게로 향했다.
"조 공자와 당가는 얽힌 것이 많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조 공자께서 화산에서 무엇을 배워 오셨는지 오늘 이 자리에서 확인해 보고자 합니다."
백천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이해하지 못할 일입니다. 당가가 어째서 화산 제자의 성취를 확인한다는 말입니까?"
"간단한 일이지요."
당잔이 여유만만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는 화산의 제자이기도 하지만, 사해상회의 자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성도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이들 모두는 사천당가의 검증을 받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백천이 미간을 좁혔다.
네놈들이 황가도 아닌데 어찌 그런 권한이 있느냐 따져 묻고 싶었지만, 그건 의미가 없는 일이다. 적어도 이 성도 내에서는 사천당가가 왕처럼 군림하고 있다는 게 사실이니까.
어설프게 회피하려 든다면 조걸이 아니라 사해상회가 그 대가를 치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건 백천이나 조걸 모두 바라지 않는 일이다.
"사숙."
등 뒤에서 들려온 조걸의 부름에 백천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제가 나가겠습니다."
"걸아."
"잠시……."
조걸이 백천을 불러 뒤쪽으로 물러났다. 그러더니 당가의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건 성도를 살아가는 이들의 방식입니다."
"나는 이해가 안 간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화산의 명성이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성도의 유력가들이 당가의 지배를 벗어나길 원하지 않습니다. 저를 내버려 둔다면 다른 유력가의 자제도 외지의 명문파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제게 망신을 주어 애초에 싹을 잘라 버리려는 겁니다."
"허?"
백천의 눈에 황당함이 어렸다.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그게 사천의 방식이고, 당가의 방식입니다. 여기서 화산이 끼어들면 일이 더 복잡해집니다. 이 일은 제게 맡겨 주십시오."
백천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잠시 기다리거라."
"예, 사숙."
백천이 다시 앞으로 나섰다.
조금 전보다 당잔에게로 더 가깝게 다가가 허리를 곧게 펴고 입을 열었다.
"제 사질을 어찌 검증하겠다는 것입니까?"
"그야 뻔한 소리 아닙니까? 무인이 무인을 검증하는 방법이 달리 또 있습니까?"
당잔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말려 올라갔다.
"직접 손을 섞어 보면 알 일이지요."
백천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사해상회의 이공자이자 화산의 삼대제자인 조걸의 실력을 검증하고 그 결과를 성도에 공표하고 싶으니 조걸을 내어 놓으라 이 말씀이시지요?"
"조금 과격하기는 합니다만, 그리 틀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왕이면 화산의 제자 분들과도 친우를 다지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은 모양입니다. 그러니 그 일은 나중에 하도록 하고……."
당잔의 시선이 차갑게 빛났다.
"우선은 조걸을 내어 놓으십시오. 이건 사천당가의 행사입니다. 방해는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백천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물론입니다. 저희 화산은 사천당가의 행사를 방해할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말이 통하시는 분이군요."
"다만…… 문제가 조금 있는데."
"문제?"
"예, 문제."
백천이 살짝 고개를 비딱하게 꺾는다.
"일을 방해할 생각은 없지만, 지금 이곳에 있는 이들이 조걸을 검증하겠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게 왜 문제가 됩니까?"
"그 실력으로 말입니까?"
"……."
당잔이 눈을 크게 치떴다.
하지만 백천은 조금의 미동도 없이 그런 당잔을 투명한 눈으로 응시할 뿐이었다.
"감히 화산의 삼대제자를 검증하겠다고 나서시니, 이쪽도 그에 걸맞은 대접을 해 드려야죠. 오십시오. 먼저 그쪽의 실력을 내가 검증해 드릴 테니. 이래야 공평한 처사가 아니겠습니까?"
백천이 옆구리에 찬 검을 툭 쳤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내 사질에게는 손가락 하나도 댈 수 없소. 이건 화산의 행사요. 방해는 용납하지 않겠소."
뒤쪽에서 사태를 관망하던 모든 화산의 제자들이 멍한 눈으로 그런 백천을 바라보았다.
"사숙!"
"와……. 사숙."
"사형!"
……사고 치지 말라면서요.
댁이 사고를 치면 어떻게 합니까?
문파 꼴 잘 돌아가네,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