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어머나, 세상에. 이게 뭔 일이야. (5)
이곳은 사해상회다.
천하에서는 몰라도 성도에서는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르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문을 닫은 상회의 문을 이 야밤에 두드린다는 것은 무례 중의 무례. 이 성도에서 그런 무례를 저지를 이들은 딱 두 부류밖에 없다.
하나는 거래가 너무 시급해서 무례를 감수하고라도 상회를 찾는 이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상회에 무례를 저지르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이들.'
전자는 누구라도 될 수 있겠지만, 후자가 될 수 있는 이는 이 사천에서 딱 한 곳밖에는 없었다.
"누구시더냐?"
"그게……."
조평은 살짝 말끝을 흐리는 하인의 목소리에서 방문자가 누구인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바깥쪽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기다려 주십시오. 마음대로 그쪽으로 가시면 안 됩니다."
조평의 얼굴이 확 굳었다.
아무래도 그의 짐작이 들어맞은 모양이다.
'하필 지금.'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직감한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손님들을 객청으로 모셔라."
"예!"
조평이 재빨리 걸어가 문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바글바글 모여 있는 하인들과 그들을 무작정 밀고 들어오는 사람 몇이 보였다.
단 세 명.
나이가 많지 않아 보이는 세 사람이 수많은 하인들을 뚫고 유유자적 걸어오고 있었다.
녹색의 무복.
그리고 살짝 거무튀튀한 손.
그 두 가지만 보더라도 강호에서 칼밥을 먹는 이라면 이들의 소속을 짐작하기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물러서라!"
"예, 상회주님!"
하인들이 그제야 좌우로 우르르 길을 열었다. 길이 열리자 세 사람은 여유로운 얼굴로 다가왔다.
"사해상회주를 뵙습니다."
선두에 선 자가 포권 하자 조평이 마주 포권을 하였다. 그리고 이내 그자의 얼굴을 보며 눈을 크게 치떴다.
"당소협이 아니시오?"
선두에 선 자는 당잔(當盞)이라는 자로 사천당가의 소공자 중 한 명이었다.
'당잔. 사천당가 가주의 다섯째 아들.'
다른 문파에서 가주의 다섯째 아들이라면 권력에서 벗어나 있는 방계나 다름없다.
그러나 사천당가는 다르다. 혈육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핏줄로 모든 것이 계승되는 사천당가에서 가주의 다섯째 아들이라면 권력의 핵심이나 마찬가지다.
아직은 나이가 어려 요직을 맡고 있지는 못하지만, 십 년만 지나면 당가의 중추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이가 이 야심한 밤에 갑자기 사해상회로 쳐들어온 것이다.
조평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무래도 좋은 일로 찾아온 건 아닌 모양이구나.'
저쪽에서 이렇다 할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조평이 빠르게 선수를 쳤다.
"당가의 영웅들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지만 이 야심한 밤에 소식도 없이 찾아오셔서 대접에 소홀함이 있을까 걱정이 큽니다."
에둘러 이 야밤에 찾아온 것을 탓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당잔은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빙그레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호승심이 가라앉지 않아 무례를 범했습니다. 그러니 상회주께서는 저희를 너무 탓하지 마십시오."
"……호승심이라 하셨소?"
"예."
당잔이 조평의 뒤쪽으로 슬쩍 시선을 보낸다. 그가 전각 안쪽을 살핀다는 걸 알아챈 조평은 서둘러 말을 돌렸다.
"일단은 안으로 드시지요. 제가 차부터 한잔……."
"먼 곳으로 배움을 청하러 갔던 사해상회의 이공자가 돌아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의 말을 끊고 들어오는 당잔의 무례에 조평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 소식이 벌써 당가에 들어갔다는 말인가?'
조걸이 돌아온 것은 불과 반나절 전이다.
아무리 이곳이 성도라지만 그 소식이 벌써부터 저쪽의 귀에 들어가다니. 이는 당가가 얼마나 성도를 완전하게 장악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고 있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살짝 찔러 들어오는 당잔의 말에 조평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예, 그렇습니다. 불민한 아들놈이 막 집에 돌아온 참입니다."
조평은 쉽사리 다른 말을 하지 않고, 당잔의 말을 기다렸다. 이곳에 찾아온 저들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하하. 사해상회의 이공자인 조걸 공자는 저희 당가에서도 탐내던 인재였지요. 그래서 상회주께서 공자를 다른 곳으로 보내셨을 때 가주님께선 상심이 매우 크셨습니다."
가주라는 말이 나오자 조평이 움찔한다.
'좋지 않다.'
가주를 언급한다는 것은 이 일이 단순히 저들의 치기로 벌어진 행사가 아니라는 뜻이다.
대놓고 말을 하지야 않겠지만, 저들이 이곳으로 찾아온 것이 당가의 뜻이라는 의미다.
"그렇기에 확인을 해 보고자 합니다."
"확인이라 하셨습니까?"
"예."
당잔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제가 알기로 조걸 공자는 화산에 입문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확인해 보고자 합니다. 당가타에 들어와 무학을 배우는 것도 마다하고 화산에 입문해서 대체 무엇을 얻고 돌아왔는지 말입니다. 조걸 공자께서 큰 배움을 얻고 돌아오셨어야 저희의 섭섭함이 조금이라도 가시지 않겠습니까?"
"……."
조평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언젠가는 이런 일이 터질 줄은 알았지만, 설마 이리 급격하게…….'
성도에 있는 모든 유력가의 자제들은 대부분 당가타에 들어 당가의 무학을 배운다.
물론 절대 핵심적인 독과 암기술은 가르쳐 주지 않는다. 당가의 비전은 오직 당씨만이 배울 수 있으니까. 심지어 비전의 유출을 우려하여 당씨 성을 가진 여아조차 비전은 배울 수 없다.
오로지 당씨 성의 남아만이 당가의 암기술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당가타에 드는 유력가의 자제들은 어설픈 껍데기만을 수년 동안 배워야 한다는 의미다.
당가는 그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통해 성도의 모든 유력가의 자제들이 무학에 전념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당가를 의지하게 만드는 동시에 당가의 방계라는 소속감을 심어 넣는 것이다.
그런 과정이 백여 년이 넘게 반복되면서 당가는 성도의 모든 상가를 완전하게 장악했다.
그리고 조걸은 이 짓에 동참하기를 거부했다.
- 왜 제가 허수아비가 되어야 합니까?
그리고 조평 역시 그 의견을 은근히 지지했다. 아들이 당가의 꼭두각시가 되는 것만은 막고 싶었다.
하나 그렇다 해서 사천 밖에 있는 유력 문파에 보낸다면 당가의 분노를 살 것이 빤했다.
그래서 고민 끝에 고른 곳이 화산이었다.
몰락하여 당가의 심기를 거스를 것도 없고, 과거에는 나름 명성이 있었으니 자신만 잘한다면 능력을 키울 수는 있을 듯했고, 무엇보다 사천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
조걸에는 딱 걸맞은 곳이었다.
"아시다시피 저희 아이가 입문한 곳은 화산입니다. 화산이야 명실공히 몰락한 문파가 아닙니까. 그저 아이가 검을 워낙 좋아하여 그곳으로 보냈을 뿐입니다."
"하하, 알지요. 압니다. 다만……."
당잔의 눈이 살짝 차가워졌다.
"화산이 몰락했다는 말은 조금 어폐가 있습니다. 지금 화산의 명성은 사해를 울리고 있지 않습니까?"
"……예? 그게 무슨……."
"이런이런. 상인이라는 분이 이렇게 정보가 늦으셔서야. 지금 화산파의 명성은 중원 전체에 울려 퍼지는 중입니다. 그중에서도 화산의 삼대제자인 조걸과 윤종, 이대제자인 백천과 유이설의 이름이 쉴 새 없이 중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중이지요."
조평이 눈이 흔들렸다.
물론 과장일 것이다. 지금 저들은 자신을 압박하고자 온 것이니까.
하지만 당잔이 읊은 이름들이, 아들과 함께 온 이들과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는가?
'당가라 해도 이 짧은 시간 만에 이곳에 든 이들의 정체를 모두 파악하지는 못했을 터인데.'
그렇다면 저들이 말하는 정도는 아니더라도 조걸의 이름이 강호에 퍼지고 있다는 말은 사실일 것이다.
"특히나……."
당잔의 눈이 흥미와 경계를 동시에 품은 채 빛난다.
"당금 천하제일의 후기지수로 불리는 화신신룡이 이곳에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감히 그 명성에 비견될 수는 없으나, 성도에 천하제일 후기지수가 들었는데 어찌 찾아뵙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응?
화산신룡?
'굉장히 거창한 이름이로군.'
그런 거창한 이름이 붙는 이들은 하나같이 굉장한 강자라는 걸, 조평 역시 알고 있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기에 저 안에 있는 이들 중 그만한 이름이 어울리는 이는 하나밖에 없다.
"백천 소협을 말씀하심이오?"
"하하하하."
당잔이 황당하다는 듯 웃는다.
"상회주? 정말 이렇게 나오실 겁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운남과 사천만을 누비시더니 중원의 정보에 소홀해지신 건지, 그게 아니면 저를 기만하려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기만이라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조평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던 당잔이 고개를 끄덕인다. 조평의 안색에서 기만의 흔적을 찾아내지 못한 것이다.
"뭐, 좋습니다.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지요. 여하튼."
당잔이 딱 잘라 말했다.
"당가인으로서 성도를 방문한 화산의 제자들을 만나 보고자 하니 그들을 불러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 상회주의 자제분 역시 포함해서 말입니다."
조평의 시선이 살짝 뒤로 향했다.
'어찌해야 하는가?'
사천, 특히나 성도에 발을 붙이고 사는 이로서 당가의 요청은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 든 화산의 제자들은 조걸의 사문 어른이자 사해상회의 손님이었다. 저리 이를 드러내고 있는 당가의 앞에 귀한 객들을 내어 놓는다는 건, 결코 해선 안 될 짓이었다.
조걸이야 상회주의 체면을 보아서라도 크게 핍박하지 않겠으나, 다른 이들은 어찌될지 모르는 일이다.
사천당가의 무서움과 표독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조평으로서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시간이 너무 늦어 객들께서 모두 침소에 드셨으니 내일 다시 찾아오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하, 벌써 침소에 들다니. 화산의 제자들은 무척 게으른 모양이지요."
"먼 여행길에 여독이 쌓여……."
"상회주."
당잔이 돌연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이건 당가의 행사입니다. 상회주께서는 지금 당가의 행사를 방해하시겠다는 겁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조평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성도에서 당가에 거스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조평과 같이 반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잔이 빙그레 웃는다.
"이거 본의 아니게 상회주를 핍박하는 모양새가 되어 버렸습니다.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당잔이 슬쩍 조평의 뒤를 보며 말했다.
"화산의 제자들은 자존심도 없는 모양이군요. 분명 제 목소리가 들릴 텐데 끝까지 그리 사해상회의 뒤에 숨어……."
그때였다.
"야! 참아! 참으라고!"
"여기 사천이야, 인마! 장문인이 사고 치지 말라고 그렇게……!"
"으아아아아! 저거 잡아, 저거!"
응?
안쪽에서 갑자기 소란스럽기 짝이 없는 고함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쾅!
강렬한 소음과 함께 문짝이 하늘로 솟아오른다.
터억!
자신의 바로 옆에 떨어진 문짝을 본 당잔이 눈을 끔뻑이다가 고개를 들었다.
꼴꼴꼴꼴.
한 손에 술병을 든 어린 청년이 병나발을 불더니 이내 입가를 쓰윽 닦는다.
'취했나?'
저건 완전히 취객의 행색인데?
그 와중에 당잔은 그의 무복 가슴팍에 매화 무늬가 새겨져 있다는 것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그가 의아한 얼굴로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넌 뭔데 야밤에 쳐들어와서 시비야?"
"……어?"
"뒈질라고."
"……."
당잔이 길지 않은 그의 삶을 통틀어 들어 본 말 중 가장 황당한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