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어머나, 세상에. 이게 뭔 일이야. (4)
"지금 운남이라고 했느냐?"
조평의 목소리에 살짝 노기가 어렸다.
조걸은 그 목소리를 들으며 살짝 눈을 감았다. 오랜 세월 만에 다시 본 그의 아버지는 그새 흰머리가 늘어 있었다.
"예."
"운남이 어떤 곳인지는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알고 있습니다."
"아는데도!"
조평의 얼굴이 살짝 떨린다.
"오 년 만에 집에 와서 한다는 소리가 운남으로 갈 방도를 알아다 달라는 것뿐이냐. 집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었느냐?"
"아닙니다."
"이 녀석아!"
조평은 황당하기 그지없다는 눈으로 조걸을 바라보았다.
"네가 집으로 돌아오기로 약조한 날이 벌써 한 해는 지났다. 그렇게 뒤늦게야 돌아와 놓고서는 아직 집으로 돌아온 게 아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게냐?"
분명 노기가 서린 목소리다.
그러나 아들에 대한 화보다 걱정과 안타까움이 더 크다는 걸 모를 조걸이 아니었다.
'이래서 오기 싫었는데.'
한숨을 내쉰 조걸이 고개를 들었다. 언젠가 한 번은 반드시 그가 마주해야 할 상황이었다.
"아버지."
"그래. 어디 한번 말해 보거라."
"운남으로 가는 건 제가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네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은 가문으로 돌아와 상회를 잇는 일이다."
"그건 형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가문의 전통을 잊었느냐? 모든 가족이 함께 가업을 이어 가는 것이 가문의 법도이며 전통이다!"
조걸이 한숨을 내쉰다.
"저는 장문인께 이번 운남행을 반드시 성공시키겠다고 약조를 드렸습니다."
"나와 한 약조는 약조가 아니더냐?"
"그건……."
"여러 말 할 것 없다!"
조평이 단호하게 일갈한다.
"네가 상회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네 자신을 시험해 보고 싶다 하여 몰락한 화산에 입문하는 것도 허락했다. 없는 곳에서 고난을 겪어 봐야 훌륭히 성장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는 나와의 약조를 저버리고 그 화산에 틀어박히겠다 하고 있지 않으냐!"
"화산은 더 이상 몰락한 문파가 아닙니다. 곧 화산의 이름이 천하를 울릴 것입니다."
조평이 조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네가 그리 말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그는 쉽사리 아들의 말을 부정하거나 무시하지 않았다.
"하나 그건 화산의 일이다. 네가 힘을 써야 할 곳은 다름 아닌 사해상회, 우리 가문이 아니더냐?"
"……."
"걸아."
조평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네 애비다. 자식 놈을 타지에 보내 놓고 사는 아비의 심정을 어찌 이토록 헤아리지 못하느냐?"
"……아버지."
조걸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다. 결국 이건 서로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는 대화다. 그리고 그 역시 자신의 잘못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운남으로 갈 방도를 찾아 주십시오."
"끝까지……!"
"그 이후에 다시 이야기를 나눴으면 합니다."
조걸을 바라보는 조평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조걸은 그 시선을 똑바로 받으면서 입을 열었다.
"이건 사내로서, 그리고 화산의 제자로서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 일을 끝내지 않고서는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번 한 번만 더 제 뜻대로 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으음."
조평이 무거운 침음성을 흘렸다.
"운남으로 가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알고 그러는 것이냐?"
"예. 각오하고 있습니다."
"네 뜻이 무엇인지는 알겠다. 하나, 나라고 해서 운남으로 갈 뾰족한 방도가 있는 게 아니다."
조걸이 가만히 조평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성도 내에 운남산 보이차가 돌고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
"가문의 상회에서도 보이차를 팔고 있더군요. 판로가 없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아무리 남만야수궁이 막는다 한들 최소한의 물량 정도는 풀리고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으음."
조평이 침음을 흘렸다.
그가 알기로 조걸은 오늘 도착했다. 그리고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성도를 돌았을 뿐이다. 그런데 이미 보이차가 어떻게 돌고 있는지를 모두 파악했다는 건 진즉에 이런 경우를 생각했다는 뜻이다.
'저 좋은 상재를 두고.'
어린아이 놀음 같은 검에나 빠져 있다니. 도통 이해가 되질 않는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운남으로 가는 상행이 있을 겁니다."
조걸이 눈을 빛냈다.
"밀무역이든, 야수궁의 허락을 받은 정식 무역이든, 소규모든 대규모든 상행은 분명 있을 겁니다. 그 상행에 동행시켜 주십시오. 짐꾼이라도 기꺼이 하겠습니다."
"안 된다."
거절의 말을 한 이는 조평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가만히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조걸의 어머니 화연비였다.
"어머니."
"운남은 위험한 곳이다. 그리고 네가 굳이 운남에 신분을 속이고 들어가려는 이유는 그곳에서 더 위험한 일을 하려 함이 아니더냐?"
조걸은 대답 없이 고개를 숙였다.
오 년 만에 만난 부모에게 거짓을 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체 어느 부모가 자식을 사지로 보낼 방법을 찾아 준단 말이더냐. 안 된다. 절대 안 돼."
"어머니."
조걸이 단호하게 말한다.
"상단을 이끈다는 건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라고 누누이 제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
"운남행 하나 해내지 못하는 이가 무슨 수로 좋은 상인이 되겠습니까? 보내 주십시오."
"상인이 될 생각도 없는 녀석이!"
그때 조평이 영 내키지 않는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꼭 가야 한다는 것이냐?"
"예."
"내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조걸의 눈에 단호한 결의가 어렸다.
"이 매화가 새겨진 옷을 입고, 걸어서라도 운남에 들어가겠습니다."
"이놈이!"
끝내 화를 이기지 못한 조평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눈으로 아들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조걸은 그저 담담한 시선으로 그 눈빛을 받을 뿐이었다.
얼마간의 대치 후, 맥이 탁 풀린 조평이 자리에 다시 앉았다.
'어른이 되었구나.'
저건 치기가 아니다.
수많은 거래를 해 온 상인인 그는 알 수 있었다. 저건 치기도 객기도 아니다. 자신의 길을 세운 사내의 의지다.
이 이상 딴지를 걸고 발목을 잡았다가는 정말 자식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조평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럼 이리하자꾸나."
"……어찌?"
"네가 지금 운남에 가려는 건 화산의 일을 처리하기 위함이겠지?"
"그렇습니다."
"그럼 화산의 문하들과 그 행동을 함께하겠지?"
"그……렇지요?"
조걸의 목소리에서 점점 힘이 빠진다.
어…….
이게 이렇게 가면 안 되는데?
"그럼 너와 함께 온 화산 분들이 운남으로 동행하는 이들이겠고?"
"어……. 음, 어……."
조평은 조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럼 내가 그분들을 만나 보고 결정하겠다. 정말 너를 믿고 맡길 수 있는 분들인지 말이다. 이게 내 최선의 양보다. 어찌 생각 하느냐?"
"어……."
조걸의 눈에서 총기가 사라진다.
머릿속에서 조평의 말이 실행되었을 경우를 생각해 본 조걸은 떨리는 눈동자를 고정하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하……."
"하?"
"하, 한 사람만 빼면 안 됩니까?"
"……."
조평이 영문을 모르겠단 눈으로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았다.
* * *
"그리하여 여러분을 모셨소이다."
백천이 가볍게 포권을 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화산의 이대제자인 백천이라 합니다. 뜻하지 않게 사질의 가문에 방문하게 되어 준비가 미흡했던 점을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내 집이라 생각하시고 편히 묵어 주십시오. 걸아의 사숙이라면 제게도 가족이나 다름없습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백천이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다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어 염치 불고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짚어야 할 부분이라 하시면?"
백천의 시선이 근엄하게 조걸을 내리눌렀다.
"조걸 사질이 상단주님과 그런 약조를 했다는 사실을 화산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만약 그 사실을 알았다면 장문인께서는 조걸을 바로 돌려보냈을 것입니다. 화산이 무도한 짓을 했다 생각지는 말아 주십시오."
"아, 물론입니다. 저 아이가 그런 면이 있지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평이 백천의 품행을 보며 나직한 감탄을 터뜨렸다.
'천하의 기재로다.'
백의 무복을 입은 백천의 모습은 남자가 보아도 절로 경탄이 나올 정도로 헌앙했다. 그런 이가 예의와 품격마저 갖추고 있으니 어찌 감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백천의 좌우를 지키고 있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우측에 앉은 이는 딱히 돋보이지는 않지만, 눈빛이 심후한 것이 침착한 성정을 갖췄다는 것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좌측에 앉은 여인은 조평이 생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정도의 미색이었다. 더불어 몸짓에서 절도와 부드러움이 함께 엿보인다.
'화산에 이리 기재들이 넘쳐날 줄이야.'
조걸이 왜 화산을 좋아하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중에 왜?'
그 옆에.
그래. 그 옆에.
마지막 한 명의 화산의 제자가 영 좀……. 그래, 좀 이상하다.
이곳에 들어온 이후로 저 아이는 자신의 앞에 있는 술병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마치 눈빛으로 술을 마셔 버리겠다는 듯 뚫어져라 그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쪽 분은……."
"아."
백천이 단호하게 손을 젓는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아니, 신경을……."
"괜찮습니다. 원래 그러니까요. 지금 술을 마시다가 중간에 끊겨서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응?
술을……. 응?
도사가?
청명이 입맛을 다시며 술병을 바라본다.
"그러니까 나는 안 온다고……."
"조용히 해라."
백천이 말을 떼는 것과 동시에 유이설의 청명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청명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입을 꾹 다문다.
"크흠."
그 기이한 광경을 본 조평은 조걸이 빼고자 했던 한 명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래. 모두가 기재일 수는 없지.'
그런데 왜 저 기재들과 저 아이를 같이 보냈을까?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운남으로 가는 일 때문에 저희를 부르셨다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조평이 한숨을 내쉬었다.
"오 년 만에 돌아온 아들놈이 운남으로 가겠다고 떼를 쓰니 제가 무척이나 곤란합니다."
백천의 시선이 조걸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조걸이 움찔하여 고개를 숙인다.
'이것 봐라?'
자신이 호통을 칠 때도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있던 조걸이 백천의 시선에는 바로 꼬리를 만다. 조걸이 백천을 얼마나 존경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모습이다.
"저희가 무엇을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사실 도와주신다기보다는……. 그 위험한 운남으로 제 아이를 데리고 가실 분들을 믿을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러셨군요."
백천이 살짝 눈을 감았다 뜬다.
"그러실 것 없습니다."
"……예?"
백천이 단호하게 말했다.
"어느 부모도 자식이 험지로 가는 것을 원치는 않을 겁니다. 조걸은 운남에 데려가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상단주님께서는 저희가 운남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
"저는 갑니다, 사숙!"
조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를 떼 놓고는 절대 못 갑니다! 다리가 부러지면 기어서라도 갈 겁니다! 절 떼어 놓을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앉아라."
"사숙!"
"앉으라 했다."
조걸이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마지못해 다시 자리에 앉는다.
그 와중에 청명은 술병으로 뻗었던 손을 슬그머니 회수했다.
'거, 조금만 더 싸우지.'
그럼 몰래 한잔할 수 있었는데.
"사숙. 저는 장문인께 운남으로 가서 일을 성공시키겠노라 말씀드렸습니다. 아무리 사숙이라 해도 저를 막을 순 없으십니다."
"너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예?"
"장문인께서 이 일을 아셨다면 네게 운남으로 가라고 하셨겠느냐 이 말이다."
"그건……."
백천은 단호하기 짝이 없었다.
"사문은 중요하다. 하지만 가문 역시 중요하다. 부모가 원치 않는 일을 하는 것이 진정 너의 도이더냐?"
"……사숙."
"너는 이곳에……."
"도는 얼어 죽을."
그때.
그동안은 술병에만 관심을 주던 청명이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도지!"
"……."
백천이 골치가 아프다는 듯 청명을 바라본다.
"가만히 좀!"
"아니. 그게 아니지, 사숙!"
"……뭐가 아니라는 말이냐?"
"거 운남 좀 편하게 가겠다고 사형을 떼 놓고 가는 게 말이나 돼? 차라리 좀 더 힘들고 말지."
백천의 얼굴이 살짝 굳는다.
"이건 조걸 가문의 일이다."
"우리가 하는 건 사문의 일이지."
청명답지 않게 진지한, 장난기라고는 없는 목소리였다. 때문에 백천도 자연히 진지한 얼굴로 그를 마주 보았다.
"가문과 사문 중 어느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길 것인가는 사숙이 정할 게 아냐. 그걸 정하는 건 온전히 조걸 사형의 몫이지."
"하지만……."
"아무리 사숙이 사형의 윗사람이라고 해도 그걸 강요할 수는 없어. 그건 그저 마음에 달린 일이니까. 그래, 그저 마음이지."
이상하게 현기가 묻어나는 말이었다.
백천이 입을 닫자 청명이 조걸을 돌아본다.
"사형은 어떻게 할 거야?"
"……내가 정할 수 있다는 거냐?"
"당연한 거 아냐?"
"하지만 운남으로 가기 위해서는 가문의 도움이 필요……."
"거참."
청명이 단호하게 조걸의 말을 잘라 버렸다.
그리고 거침없이 손을 뻗어 술병을 움켜잡고는 병째 나발을 불었다.
술이 꿀꺽꿀꺽 넘어간다.
"크으!"
입가를 소매로 슥 문질러 닦은 청명이 피식 웃으며 말한다.
"별게 다 걱정이네. 내가 누구야! 이런 거 안 해도 야수궁이고 나발이고 대가리 다 깨 줄 테니까. 그런 것 신경 쓰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해!"
청명이 팔을 살짝 굽히며 알통을 만들어 보인다.
그 모습에 조걸은 그만 웃어 버렸다.
'이상하게 저 녀석이 저러는 걸 보면 마음이 편해진다니까.'
한결 표정이 밝아진 조걸이 가만히 입을 연다.
"나는……."
바로 그때였다.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살짝 높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가주님."
"……무슨 일이더냐?"
"소,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이 밤에?
조평의 얼굴이 차게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