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어머나, 세상에. 이게 뭔 일이야. (3)
모두가 커다란 전각과 조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초점 풀린 시선들이 연신 두 곳을 오간다. 그 시선의 주인공이 된 조걸이 주먹을 입에 대고 낮게 헛기침을 했다.
"여기라고?"
"그래."
"여기?"
"아, 그렇다니까!"
청명이 입을 쩍 벌렸다.
"……조걸 사형이 여기 아들내미라고? 그냥 하인 같은 건 아니고?"
"우리 집이거든?"
청명은 고개를 내저으며 조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니야. 사형 잘 생각해 봐."
"뭘?"
"사람이란 결국은 얼굴에 삶이 드러나는 법이야. 조걸 사형 얼굴을 보고 누가 부잣집 아들내미라고 생각하겠어. 누가 봐도 저기 어디 깡촌……."
"에라이!"
참다못한 조걸이 청명을 걷어차 날려 버렸다.
"왜! 내가 있는 집 자식이라니까 이상해?"
"무척."
"굉장히."
"진짜. 진짜 이상하다, 조걸아."
심지어 백천까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조걸이 고개를 푹 숙이고 만다.
'이런 사람들을 내가 사형제라고.'
뭔가 눈이 따가운 느낌이다.
"조걸아. 솔직하게 말해 봐라. 여기가 진짜 너희 집이냐?"
"사혀엉……."
윤종마저 믿지 못하겠다는 투로 물어 오니 결국 조걸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윤종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말했다.
"아, 아니. 그런데 너 나한테는 너희 집이 벽지의 조그마한 상단이라 했잖느냐?"
"……말씀드리기가 좀 곤란해서."
"허어. 너무 잘 어울려서 찰떡같이 믿었는데."
"아니, 제가 그렇게 없어 보입니까? 그렇게 이상합니까?"
"아, 아니. 뭐 이상하다는 게 아니라……."
"눈은 이상하다고 말하고 있잖습니까! 지금!"
"어……. 그게 보이디?"
윤종이 눈에 띄게 당황한다.
그리고 그 반응이 조걸을 더 서글프게 만들었다.
그때 엉덩이를 걷어차여 날아갔던 청명이 재빨리 제자리로 돌아온다.
"아니지, 아니지. 가능한 일이지. 그런 일도 흔하잖아. 잘나가는 집안의 천대받는 아들내미가 버티지 못하고 집을 떠나서……."
"흐지믈르그……."
백천이 이를 악물고 바들거린다.
"아, 사숙 이야기는 아니었어."
"망할 놈 같으니!"
그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안에서도 들린 모양이다.
"누가 감히 사해상회의 문 앞에서 이리 떠드는 것이냐?"
거대한 문이 벌컥 열리며 날카로운 인상의 한 노인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날선 시선으로 화산의 제자들을 쏘아보았다.
그러더니 이윽고…….
"어? 어엇? 도, 도련님!"
도련……. 도련님.
청명이 윤종에게 속삭였다.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것 맞겠지?"
"그런 것 같다. 귀를 파내고 싶은 기분이 드는 걸 보니."
노인이 다급하게 조걸에게 뛰어왔다.
"아니! 아니! 도련님이 아니지! 이공자님! 이공자님이시지요! 세상에! 이리 헌앙해지셨다니!"
청명이 다시 속삭였다.
"사천에서는 '헌앙하다'라는 말을 다른 뜻으로 쓰는 모양인데?"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방언이 아닐까?"
"다 들린다고, 다!"
조걸이 바들대며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노인의 눈에는 다른 화산의 제자들은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숫제 눈물을 쏟아 낼 기세로 조걸을 끌어안는다.
"이공자님! 정말 잘 돌아오셨습니다! 정말!"
"사, 삼총관. 진정 좀 해!"
청명이 다시 귓속말을 한다.
"진짜 있는 집 자식인가 본데. 할아버지한테 반말하는데?"
"음. 정말 그……. 아니, 잠깐. 그건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않냐?"
그 와중에도 이건 못 넘어가겠다는 듯 윤종이 눈을 부라린다.
"여봐라! 여기! 당장 이공자님이 돌아오셨다고 전하거라! 지금 당장!"
노인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하인들이 황급히 안으로 우르르 달려갔다.
청명은 쯧, 혀를 차며 삼총관을 진정시키느라 여념 없는 조걸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사람을 겉모습만으로는 알 수 없다지만, 설마 저 조걸이 이런 부잣집 아들내미였을 줄이야.
"윤종 사형. 사형은 뭐 숨겨 놓은 뒷배 같은 것 없어? 고관대작 자제라든가?"
"……나 고아인데."
"그렇지. 보통 그게 맞지."
희한하단 말이지.
눈물의 상봉이 한참 더 이어지고야 삼총관이 그들에게 관심을 주기 시작했다.
"이 분들께서는?"
"사문의 사숙과 사형들이셔."
"아!"
백천이 삼총관을 향해 포권 했다.
"화산의 이대제자 백천이라 합니다. 뜻하지 않게 사질의 가문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연통을 넣지 못하고 이리 급작스레 방문하게 된 점을 사과드립니다."
"아닙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이리 찾아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삼총관이 소매로 눈가를 훔친다.
"이공자님께서 화산으로 간 뒤, 오랜 세월 동안 연락도 없으셔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가주님의 명이 아니었다면 벌써 몇 번은 찾아갔을 텐데."
조걸이 어색해 죽겠다는 듯 손을 내젓고는 삼총관의 등을 밀었다.
"일단 들어가자, 일단. 사숙을 여기 이렇게 세워 두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아, 제가 너무 기쁜 나머지 잠시 정신이 나갔었나 봅니다. 어서 드시지요!"
삼총관이 그들을 이끌고 상회의 안으로 향했다. 커다란 정문을 통과하는 화산 제자들의 마음은 하나같았다.
'이거 화산 산문보다 큰 것 같은데?'
'살다 살다 이런 으리으리한 집은 처음 본다.'
'세상에, 사람이 달라 보이네.'
화산의 제자들은 없이 살아 돈에 민감(?)하다. 그러다 보니 있는 집안 자식 조걸에게서 광채가 뿜어져 나오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걸아!"
그들의 시선에 버선발로 뛰쳐나오는 두 사람이 보였다. 비단으로 지은 궁장을 입은 중년 여인과 붉은색 비단옷을 입은 장년의 사내였다.
이쯤 되면 저 두 사람의 정체를 모를 수가 없다.
중년 여인이 달려들어 조걸을 확 끌어안는다.
"이 무심한 녀석아! 왜 이제야 왔느냐!"
"죄송합니다, 어머니."
중년인이 뒷짐을 지고는 고개를 획 돌린다. 아마도 차오르는 눈물을 참는 모양이다.
그, 뭐랄까…….
단란하다고만 표현하기에는 복색이나 주변 환경이 너무 화려하고……. 여하튼 뭔가 따뜻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다.
병풍처럼 선 세 고아와 한 가출인이 이마에 핏대를 세웠다.
'거 인생 불공평하네, 진짜!'
'같은 처진 줄 알고 잘해 줬는데!'
'기만자! 기만자!'
심지어 청명조차도 그 광경을 보며 부들부들 떨어 댔다.
'누구는 다시 태어나 보니 거지굴이었는데!'
이런 집안에서 태어났으면 여기까지 오는 과정이 열 배는 더 쉬웠겠다!
그렇게 하나의 화산 문하가 가족을 다시 만났고.
남은 네 화산 제자가 사형제의 행복에 배 아파했다.
* * *
"……그러니까."
청명이 자신의 앞에 차려진 진수성찬을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획 들어 조걸을 노려본다.
조걸이 그 시선에 움찔했다.
"돈이 많으셨겠다?"
"……."
"크으, 내가 그것도 모르고! 이렇게 부잣집 도련님! 그렇지, 도련님이셨는데! 내가 그것도 모르고!"
조걸이 크게 헛기침을 한다.
"사문에 들면 모두가 같은 사형제일 뿐이다. 집안 따위가 뭐가 중요하겠느냐?"
"중요하지! 나는 집이 없는데!"
"나도."
"나도 없음."
"어, 나는 어……."
백천이 살짝 머뭇거리자 청명이 애잔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숙도 괜찮아. 사숙은 쫓겨났으니까."
"내 발로 나왔다고! 내 발로!"
청명이 백천의 변명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바들거렸다.
"이렇게 돈이 많았으면서 화산이 망해 자빠지는데 동전 한 푼 안 보탰다, 이 말이지?"
"아, 아니! 내가 나이가 몇인데 가문의 돈을 쓸 수 있겠냐고! 그게 내 돈이냐? 내 돈이야?"
"부탁하면 되잖아! 적선만 해도 먹고살았겠고만!"
"배신자."
"기만자."
날카롭게 꽂히는 사형제들의 시선에 조걸의 속이 뒤집어졌다.
저게 다 모르고 하는 소리다.
당시에 조걸이 화산이 망할 판이니 가문의 돈으로 지원을 해 달라는 연통을 넣었으면, 아버지는 당장에 화산으로 달려와 그를 끌고 사천으로 돌아와 버렸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 역시 상인이다.
투자 가치가 없는 곳에는 한 푼의 돈도 쓸 사람이 아니다.
"여하튼."
조걸이 너무 곤란해하자 백천이 중재에 들어갔다.
"너무 사람을 몰아붙이지 말자. 우리가 오해했을 뿐, 딱히 숨기려 한 것 같지도 않으니까."
하지만 여론은 영 좋지 않았다.
"있는 집안 자식들끼리 도와주는 거 봐!"
"고아 분들 여기로 모십니다."
"그럼 나는 여기."
백천이 달아오른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그런 게 아니라!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잖으냐. 중요한 건 운남으로 들어갈 방법을 찾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끄으으응!"
니들은 화산이 망해도 돌아갈 곳이 있지 않느냐는 말로 한 번 더 갈궈 볼까 고민하던 청명은 결국 끙 소리와 함께 눌러 참았다.
"그래서 아버지는 뭐라 하셔?"
"아직 말을 못 해 봤다."
"……왜?"
"그게 조금……."
조걸이 한숨을 푹 내쉰다.
"내가 원래 화산에 있기로 약속했던 기한은 이미 지났다. 예정대로라면 작년에 이미 가문으로 돌아와 집안의 일을 도왔어야 해."
"그런데 왜 안 갔어?"
"그야……."
네놈이 나타났으니까.
하지만 이 말을 청명에게 해 주기는 싫다.
"여하튼 그렇게 됐어. 그래서 아버지는 지금 내가 가문으로 완전히 돌아온 걸로 알고 계셔. 그 오해부터 좀 풀어야겠는데?"
"아니, 뭐 괜찮아. 우리만 가면 되니까."
"무슨 소리야! 나는 화산의 제자다! 죽어도 운남으로 따라갈 거다!"
"거 신분도 높으신 분께서 뭐 하러 굳이."
청명이 어깨를 으쓱한다.
그러자 윤종이 슬며시 묻는다.
"조걸의 신분이 많이 높은 거냐?"
"쯧쯧. 사형. 딱 보면 모르겠어? 여기가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규모를 보아하니 은하상단에 그리 뒤지는 곳은 아닌 모양인데. 그럼 조걸 사형은 적어도 은하상단의 소단주! 그렇지! 황종의 소단주 정도는 되겠네!"
청명이 단호하게 말하고는 조걸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조걸 사형은 최소한 황 소단주 급은 되……. 잠깐. 이렇게 생각하니 별거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나도 좀 그런 느낌인데."
화산에만 오면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굽실대는 황종의를 생각하자 뭔가 평가가 폭락하기 시작한다.
"에이. 별거 아니네."
"나는 또 뭐 대단한 건 줄."
"하. 다시 조걸이가 친근해 보인다."
황종의가 들었으면 거품을 물고 뒤집어졌을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화산의 제자들이었다.
그리고 그 반응에, 이번에는 조걸이 부들대기 시작했다.
막 띄워 줄 때는 부담스러웠는데, 다시 무시를 받자 뭔가 이상하게 열이 받는다.
"끄응……. 여하튼."
조걸이 한숨을 쉬며 말한다.
"저는 이따가 가족들과 저녁을 함께 하기로 했으니 그때 운남으로 향할 방도를 여쭤 보겠습니다, 사숙."
"음."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잘 부탁한다. 남만야수궁과 협상을 하든 자목초의 자생지로 숨어들든, 운남 초입부터 경계를 받아서야 둘 다 요원하기는 마찬가지니까."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해 주거라."
"예, 사숙!"
사형제들을 한번 둘러본 조걸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아, 사형."
"응?"
"아랫사람 시켜서 여기 술 좀 넣어 줘."
"……."
"쯧. 도사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술을 안 주네. 안주를 이만큼 깔아 놓고 말이야. 술 좀 부탁해. 비싼 걸로."
"……."
"사형. 내가 다시 말하는데!"
청명이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꼭 비싼 걸로 부탁해!"
귀신은 뭐 하나…….
저놈 안 잡아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