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속 터져 죽는 것보다는 낫잖습니까. (4)
"그래서……."
허도진인이 손에 든 찻잔을 가만히 다탁 위에 올려 두었다.
"그 화산의 아이들에게 망신을 당하고 돌아왔다?"
허산자는 말없이 그저 눈을 감고 있었다.
"허산."
"예, 장문인."
"기이하구나. 분명 부끄러워야 할 일이건만 네 얼굴에는 조금의 부끄러움도 보이지 않는다. 내 이를 어찌 받아들여야 하겠느냐?"
조근조근한 질책에 허산자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장문인."
"편히 말해 보거라."
"제가 부끄럽지 않은 이유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
"제가 방심했거나 어리석어 이런 일들을 겪었다면, 당연히 장문인께 문책을 청했을 것입니다. 하나……."
"최선을 다했고, 그 힘이 모자랐던 것뿐이기에 부끄러울 것이 없다?"
"그러합니다."
허도진인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허산자는 신중함과 사람을 이끄는 힘을 겸비했다. 그렇기에 가장 신뢰하는 이들 중 하나였다. 그런 이가 이렇게까지 말한다는 건 정말 불가항력(不可抗力)이었다는 뜻이다.
"검총에 가서 망신만 당하고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왔는데도, 부끄럽지 않다라……."
다시 찻잔을 든 허도진인은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그리고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달칵, 찻잔 내려놓는 소리가 울렸다.
"네가 그리 말한다면 그런 거겠지."
"……장문인."
"애초에 검총에 아무것도 없었다면, 얻어 나올 것도 없었을 터. 네 탓을 할 일은 아니구나."
"죄송합니다."
"죄송할 일이 아니다."
고개를 가로저은 허도진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본디 과욕은 화를 부르는 것이지. 우리 무당이 가진 것이 적지 않음에도 더 많은 것을 가지려 했구나. 화를 크게 입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다. 쓸데없이 제자들을 보내 고생만 시킨 나를 용서하거라."
"그것이 어찌 장문인 탓이겠습니까."
"욕심에 이성을 잃은 게지. 혼원단과 약선이라는 이름에 너무 혹해 버렸구나. 약선이 설마 그런 곳을 만들었을 줄이야."
이백 년 전의 사람에게 농락당했다는 생각에 헛웃음이 나는 허도진인이었다.
"무학이란 결국 허무하다는 건가?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간 이가 할 말 답군."
허산자가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하나 허도진인은 굳이 허산자에게 자신이 이해한 것을 설명하지 않았다. 때로는 모르는 게 나을 때도 있는 법이다.
그는 다만 살짝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며 허산자에게 물었다.
"다만 한 가지."
"예."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다. 네가 화산의 어린아이와 동수를 이루었다고 했느냐?"
"그렇습니다."
허도진인의 미간이 좁아진다.
허산자의 무력이 무당의 장로 중 대단히 특출하다고는 할 수 없다. 아니, 오히려 무학만 따진다면 조금 처지는 편이라 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렇다고 해도 허산자 역시 무당의 장로라는 것. 이제 겨우 약관이나 되었을 법한 어린아이와 어우러질 정도는 아니다. 절대로.
하지만 다른 이도 아닌 허산자가 직접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천재이던가?"
"귀재입니다."
허도진인이 낮게 탄식했다.
허산자는 침착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그대로 승부를 이어 갔으면 제가 이겼을 거라 자신합니다. 하지만 그건 의미가 없는 말이지요."
"그렇지. 이기는 게 당연하니까."
"문제는 시간을 얼마나 들여야 그 아이를 제압할 수 있었을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말인즉……."
"동수로군."
"그렇습니다."
허산자가 말한 대로라면, 그 날의 몸 상태와 작은 운으로도 승부가 뒤집힐 수 있다는 뜻이다. 그 정도라면 거의 동수라고 봐도 된다.
"허허. 화산의 삼대제자가 무당의 장로와 동수를 이룬다는 말이던가? 내 그 아이가 무진을 쓰러뜨렸다 했을 때도 웃어넘겼거늘."
이제 더는 웃을 수 없는 일이 되었다.
"화산에 귀재가 났다……. 귀재가."
생각에 잠긴 허도진인의 손이 살짝 어수선해졌다. 묵직하게 찻잔을 잡고 있던 그의 손끝이 연신 잔의 표면을 꾹꾹 누르다 떨어지기를 반복한다.
장문인의 복잡한 심사를 짐작한 허산자는 입을 꾹 다물고 그가 생각을 정리하길 기다렸다.
차 한 잔이 식을 시간이 지나서야 허도진인이 입을 연다.
"내버려 두면 되겠지."
"괜찮겠습니까?"
"네가 무슨 말을 하고픈지는 안다. 과거의 화산은 도가의 대문파였고, 한때는 무당의 앞에 그 이름을 놓을 뻔한 곳이었지. 그런 곳에 귀재가 났다는 건 분명 좌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허도진인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한 명의 천재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특히나 화산처럼 몰락한 문파에서는 더더욱. 그 아이는 결국 화산이라는 문파를 끌고 끌다가 제풀에 지쳐 쓰러질 것이다."
"보통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무에 대한 재능은 둘째 치고 판단력과 과감함까지 겸비했습니다."
"네가 그 아이를 더없이 좋게 본 모양이구나."
허산자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다.
"원한다면 무당의 제자로 받아 주겠노라 설득도 했습니다."
"……그 정도로?"
"후대의 장문인 자리도 얻을 수 있노라 했지요."
허도진인의 미간이 좁아진다.
이건 분명 장로의 권한을 넘어서는 일이다. 그럼에도 이리 당당히 말을 하는 건, 허도진인이 그 아이를 눈으로 보았다면 똑같은 말을 했을 거라는 의미였다.
'이 이상의 평가가 있을 수 있을까?'
어렵다.
이건 경탄을 넘어 찬사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다르지 않다."
"……."
"혼자의 힘으로는 그저 명성을 드높일 수 있을 뿐이다. 한 문파를 이끌어 가는 것은 한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수많은 이들의 힘이 합쳐져야 하고, 또한 그들 모두에게 확고한 주체 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 아이가 그 모든 것을 감당할 수는 없다."
허도진인이 고개를 내젓는다.
"적당히 화산에 대한 감시의 시선을 강화하는 수준에서 마무리를 짓자꾸나."
"장문인, 하나 저는 여전히 그 아이가 마음에 걸립니다."
"그리 걱정할 것 없느니라. 아마 그 아이를 다시 볼 때쯤에는 내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게 될 테니까."
허산자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몸을 추스르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이 많구나."
"예, 장문인. 그럼……."
허산자가 꾸벅 절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금방이라도 나갈 듯 문 앞에 섰던 그는 문득 다시 멈춰 섰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음?"
허산자가 슬쩍 고개를 돌려 허도진인을 보며 묻는다.
"그 아이가 장문인께서 말씀하신 것을 알고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홀로는 문파를 이끌 수 없단 것 말이냐?"
"예."
허도진인이 잠시 생각에 빠졌다. 하지만 이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럴 일은 없다. 그리고 그렇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을 것이다. 인재란 마음먹는다고 키워 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알겠습니다."
탁.
허산자가 문을 닫고 나가자 허도진인은 가만히 찻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알고 있다면 어떻게 되냐고?'
대답은 같다.
그럴 일은 없다.
왜냐면 이건 그 아이가 얼마나 대단한 기재이고, 얼마나 영특한지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오로지 경험으로만 체득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 젊고 혈기가 넘치는 동안에는 결코 깨달을 수 없는 법.
그 사실을 끝내 경험하여 얻어 냈을 때는 이미 그 아이는 지금처럼 젊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만에 하나…….
정말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결국엔 화산의 이름이 무당 앞에 서는 날이 올지도 모르지.'
허도진인이 살짝 헛웃음을 흘렸다.
'과한 생각이야.'
너무도 과한.
* * *
빠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아악!"
털썩.
모로 넘어간 조걸이 파들파들 경련을 일으키다가 손을 덜덜 떨며 자신의 목을 더듬었다.
붙어 있다.
부러지지도 않았다.
너무 격렬하게 목이 돌아가서 목뼈가 부러지지는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별 이상이 없는 모양이다.
그러고 나자 이제는 고통이 밀려왔다.
"아아아아아아악!"
아프다.
인간적으로 이건 너무 아프다.
조걸이 턱을 부여잡고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하자 청명이 그 광경을 보며 혀를 찼다.
"쯧쯧. 엄살 보소."
조걸이 눈을 까뒤집었다.
엄살? 이게 엄살이라고?
순간적으로 턱이 없어진 줄 알았는데?
"그만 엄살 부리고 얼른 일어나. 사형에 대한 내 애정이 아직 이렇게 넘치도록 남아 있잖아."
그 망할 애정 두 번 가졌다가는 아주 사람을 갈아 마시겠다, 이 미친놈아!
조걸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느 순간 화산의 모든 제자들은 같은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저 새끼에게서 달아날 방법은 없다!'
저놈은 사냥개보다 더 집요하고, 말보다 더 끈질기다. 마음먹은 것은 어떻게든 해내는 놈이다.
다 떠나서, 여기서 도망치고 징징댄다고 저 주먹에서 힘이 빠질 리는 없다!
그렇다면?
"으아아아아아! 한 대만! 딱 한 대만 패 보자!"
조걸이 눈을 뒤집고 청명을 향해 달려들었다. 추궁과혈이 어쩌다보니 대련이 되어 버린 상황이었지만, 청명은 오히려 그런 상황이 기꺼운지 싱글벙글 웃어 댔다.
물론 그렇게 웃는다고 사람이 좋아 보이진 않는다.
환하게 배시시 웃으며 사형 대가리를 깨는 놈이 어디 사람으로 보이겠는가?
"그렇지, 그렇지! 달려들어야지!"
빠아아아악!
"허리가 비었네!"
빠아아아아악!
"사형! 사형!"
"응?"
"발이 비었어!"
콰득!
끝내 조걸의 눈에서 눈물이 찔끔 배어났다.
청명의 발에 짓밟힌 발등이 격한 통증을 호소했다.
"허리! 허리! 허리! 허리! 허어어어리!"
조걸은 인간의 몸에서 허리라고 부를 수 있는 부분이 이렇게나 많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말은 다 같은 허리인데 어떻게 이리 구석구석 팰 수 있는가?
"끄륵!"
조걸이 허리를 접으며 반쯤 정신을 놓았다. 그러자 청명은 곧장 깔끔한 회축으로 그를 후려 차 날려 버렸다.
아스라이 조걸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음!"
청명이 다음 먹이를 찾아 눈을 번뜩였다. 그 눈빛을 받고 움찔한 유이설이 검을 꽉 움켜잡으며 당당하게 말했다.
"여자라고 봐주지 마……."
퍼어어억!
"응? 뭐라고?"
"……아냐."
유이설이 눈에 독기를 품고 청명에게 달려들었다. 그녀의 검이 더없이 날카롭게 청명의 목을 찔러 간다.
사질이고 나발이고 목을 따 버리겠다는 기세!
청명은 그 날카로운 검을 보며 더없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살기 보소."
퍼어어억!
유이설의 검을 획획 피하며 청명이 유이설의 전신을 잘근잘근 다지기 시작했다.
"가볍다는 걸 잘못 이해하는 모양인데!"
퍼어어어억!
"힘을 빼는 게 가벼운 게 아냐. 그 힘이 가볍게 나아가야 가벼운 거지. 그냥 가볍게 휘두르는 건 세 살 먹은 애도 한다, 애도!"
"이이이익!"
유이설이 찢어지는 기합을 내지르며 검을 찌르고 들었다. 청명의 몸이 살짝 떨린다 싶더니 그녀의 뒤에 나타났다.
"으라차, 등짝!"
단번에 십이 연격을 날려 유이설의 등을 터뜨릴 듯 두드려 준 청명이 몸을 획 돌렸다.
"끝!"
털썩.
바닥에 쓰러진 유이설이 움찔움찔 경련을 일으켰다.
"자, 충분히 한 것 같으니까……."
청명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사숙과 사형들을 보며 상쾌한 미소를 지었다.
"조금 쉬고 다시 하자."
"야, 이 새끼야!!"
"네가 사람이냐? 이러고도 네가 사람이야?"
"아이고오! 선조시여! 대체 어느 사제가 사형을 이렇게 팹니까!"
쓰러져 있던 이들이 벼락같이 벌떡벌떡 고개를 들고 온갖 말로 청명을 욕해 댔다.
"응? 뭐라고? 너무 약해서 잘 안 들리는데?"
청명이 귀에 손을 대는 시늉을 하자 욕설의 강도가 한층 강해진다.
그리고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은하상단의 이보 행수는 끝내 더없이 흐뭇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개판이네.'
소단주가 왜 청명을 조심하라고 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