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속 터져 죽는 것보다는 낫잖습니까. (3)
화산을 내려와 화음에 도착한 청명 일행은 지체 없이 은하상단의 지부로 향했다.
기다리고 있던 황종의가 정중하게 말했다.
"오르시지요."
백천은 커다란 마차를 보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걸 타는 겁니까?"
마차 앞에 매여 있는 네 마리의 말을 보고 있자니, 과연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는지 회의감이 먼저 들었다.
"너무 과한 듯합니다만."
"과하지 않습니다."
황종의가 겸연쩍은 얼굴로 덧붙였다.
"저희의 부족함으로 생긴 일입니다. 도울 수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해야지요."
황종의는 송구함에 연신 허리를 접어 댔다.
화산이 의뢰한 일을 은하상단에서 해내지 못해 벌어진 일이다.
물론 이건 은하상단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화산으로 인해 많은 이득을 보고 있는 입장이다 보니 아무래도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었다.
황문약 역시 화산의 제자들이 다음 일을 행하는 데 있어, 불편함이 없도록 지원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말이다.
"크으. 사두마차라니. 돈 좀 쓰셨네요."
청명이 어깨를 으쓱한다.
"그런데 이게 별 쓸모가 없을 것 같네요. 저희가 뛰어가는 게 더 빠르거든요."
"뭐, 뭔 소리야!"
"사람이 어떻게 말보다 빨리 가!"
사형제들의 반발이 튀어나왔지만, 청명은 당연하게도 웃으며 사뿐히 찍어 눌렀다.
"돼. 돼. 걱정하지 마. 사람은 노력해서 못할 게 없어!"
"아니! 이 미친놈아!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야 할 것 아냐!"
"어허. 그 상식을 부수는 게 무인이 해야 할 일이지. 개 발에 땀나도록 뛰면 말보다 빠를 수 있어!"
"……미쳤나 진짜."
청명의 말에 황문약이 웃어 버렸다.
"물론 청명도장이라면 가능하겠지요. 물론 다른 화산 분들께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겁니다. 다만 가는 길에 힘을 조금이라도 아끼시는 게 좋겠지요. 그 부분도 다 생각을 했습니다."
"오?"
"사천으로 가는 길 중간중간에 저희 상단의 상인들이 말을 준비하고 기다릴 겁니다. 말이 지칠 때쯤 바로 말을 갈고 달릴 수 있게 말입니다. 쉬는 시간 없이 계속 달릴 수 있다면 운남까지 가는 시간을 확 줄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백천이 깜짝 놀라 물었다.
"그 귀한 말을 말입니까?"
"귀하다 한들 화산 분들이 하시는 일보다 귀하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 상단에 이 정도 여력은 있습니다."
백천이 재빨리 황종의를 향해 포권 했다.
"은하상단의 호의에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진정으로 감사하고 감탄한 부분도 있다.
하지만 이리 빨리 감사를 표해 버린 것은 저 청명이 놈이 죽어도 뛰어가겠다 할까 봐서다.
"흐으으음."
저 봐. 저 봐.
벌써부터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입을 삐죽 내밀고 있잖아. 저 주둥아리를 그냥!
"은하상단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닐 테니! 염치 불고하고 타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이를 말입니까?"
"모두 타라!"
백천은 황급히 앞장서서 마차에 뛰어들듯 올랐다.
그러자 다른 사형제들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차에 오른다. 그러자 청명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살짝 앓는 소리를 내며 마차에 탔다.
이내 청명의 시선이 모두를 훑었다.
모두가 일제히 약속이라도 한 듯 시선을 내리깔고 청명의 눈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뭐……."
청명이 고갤 끄덕였다.
"뭐, 좋아. 이게 차라리 나을 수도 있지."
"……."
너무 순순히 납득하잖아……?
저 새끼 또 무슨 꿍꿍이지?
모두가 불안에 떨어 댔지만, 상황을 잘 모르는 황종의는 그 광경을 보며 미소 짓고 말았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그저 사이좋은 숙질간의 모습으로만 보일 것이다.
마차의 문 바로 앞에 선 황종의가 아쉽다는 듯 말했다.
"원래는 제가 수행을 했어야 하는 일이지만, 자목초가 아닌 다른 물건들도 구하기가 그리 쉬운 것들은 아닌지라 부득이하게 운남까지 동행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에이, 당연하죠. 뭐 대단한 일이라고."
청명이 손사래를 치자 황종의가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는 듯 웃었다.
"대신 운남까지의 상행에 익숙한 이가 마차를 몰고 여러분을 모실 것입니다. 이 행수."
"예!"
한 사내가 앞으로 나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은하상단의 이보(李寶)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을 운남까지 모시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드려요."
이보가 공손하게 인사를 하는 화산의 제자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소단주님의 말씀과는 다르게 무척 예의 바르신 분들이로군.'
도가에서 엄격한 수행을 하는 이들이니 이 정도는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소단주님께서는 이들을 조심하라고 한 걸까? 잘 모시라는 말과 조심하라는 말은 분명히 다를 텐데.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조심스레 마차 문을 닫은 이보가 황종의를 돌아보았다.
"다녀오겠습니다. 소단주님."
"이 행수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준 것 같아 내 마음이 편하지 않소. 상단의 존폐가 걸린 일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주시오."
"물론입니다! 소단주님!"
이보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지체 없이 고삐를 당기며 마차를 출발시켰다.
저 멀리 사라지는 마차를 보는 황종의의 안색이 살짝 무겁게 가라앉았다.
'아무리 청명 도장이라고는 하나, 남만야수궁은 쉽지 않은 곳일 텐데.'
괜히 말해 봐야 잔소리밖에는 되지 않는다 싶어 이런저런 말을 삼갔다. 하지만 걱정되는 것만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 *
마차는 쉼 없이 나아갔다.
황종의의 호언장담대로 말들이 달리다 지칠 때쯤에는 관도에 이미 새로운 말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덕분에 말을 재빠르게 교체하고 다시 나아가기를 반복하는 게 가능했다.
물론 그러다 보니 마차에서 침식을 해결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지만, 누구도 불만을 품지 않았다. 이번 운남행이 화산에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다들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숙. 남만야수궁은 어떤 곳입니까?"
"음."
윤종의 물음에 백천이 낮은 침음성을 흘렸다.
"사실 나도 남만야수궁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러니 일단 운남으로 가는 길에 사천의 개방 지부에 들러서 정보를 얻어 볼까 한다."
"개방 지부요?"
"그렇다. 이번 남영의 일로 개방과 관계를 만들었으니 그 정도 정보야 얻을 수 있겠지."
"아아."
확실히 개방과 연을 만들어 둔 것이 크게 작용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이었다면 정보를 얻을 곳이 없어서 고생깨나 했을 것이다.
"하지만 듣자 하니 야수궁에 대한 정보는 개방에도 그리 많지 않은 모양이다. 이미 중원과 교류가 끊긴 지 한참이나 되었으니 말이다."
"그렇겠네요."
"외공을 주로 사용하고, 야수궁이라는 말 그대로 신수들을 부린다는 말은 들어 보았다만…… 이 역시 워낙 오래된 정보라."
그때, 가만히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청명이 입을 열었다.
"야수궁이 어떤 곳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응?"
"걔들이 동물을 부리든 돈으로 귀신을 부리든, 중요한 건 걔들이 어떤 놈들이냐가 아니라 얼마나 강하냐겠지."
"으음."
그도 틀린 말은 아니라는 듯, 백천이 고개를 끄덕인다.
살짝 백천의 눈치를 살핀 조걸이 조심히 입을 연다.
"제가 듣기로는 새외오궁은 하나하나 구파일방에 못지않은 힘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나도 그 말은 여러 번 들어 보았다."
"하면, 남만야수궁 역시……."
"글쎄."
백천이 고개를 내젓는다.
"과거에는 그 평가가 틀리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과거와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마교의 발호 때 새외오궁은 모조리 박살이 나지 않았더냐?"
"북해빙궁은 제외하고 말이죠."
"그렇지."
과거 마교가 제일 표적으로 삼은 것은 중원이 아니었다. 중원과 새외의 문파들이 연합할 것을 우려한 마교는 새외오궁부터 차례차례 무너뜨렸다.
중원의 북쪽에 있어서 마교의 손이 닿지 않던 북해빙궁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마교의 손에 박살이 나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 일련의 과정에서 수많은 이들이 죽어 나갔다고 하니, 백 년이라는 짧은 기간 만에 과거의 힘을 모두 되찾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럼 일이 조금 쉬울 수도 있겠네요."
"그렇다면 좋겠지만……."
그때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청명이 마차의 창을 열고 밖으로 고개를 배꼼 내밀었다.
"이보 행수님!"
"예, 청명 도장님!"
"밥 먹고 가죠! 밥 먹고!"
"조금만 있으면 마을에 도착하는데, 거기서 쉬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니요. 여기가 좋네요."
"예, 알겠습니다."
이보가 관도 한쪽에 마차를 댔다.
일행이 모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청명을 바라보았다.
"왜 갑자기 마차는 세우고 그러느냐?"
"할 일이 있어서."
청명이 씨익 웃는다.
"다들 내려."
"……."
뭔가 살짝 불안해진 이들이 마른침만 삼키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청명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활짝 열린 문을 가리킬 뿐이었다.
"뭐 해? 안 내리고?"
"……."
불안하다.
뭔가 심각하게 불안하다.
모두가 주섬주섬 짐을 챙겨 마차에서 내렸다. 하지만 조걸은 단호하게 자신의 짐을 마차 안으로 꾹꾹 밀어 넣었다.
윤종이 슬그머니 묻는다.
"왜 짐은 두고 내려?"
"저놈이 마차를 그냥 보내면 어떻게 합니까? 짐이라도 두고 내려야 못 그러죠."
"……네 짐이 있으면 저놈이 마차를 안 보낸다고?"
"……."
"네 짐만 없어지는 게 아니라?"
조걸이 말없이 짐을 다시 들었다.
새삼 청명이 어떤 놈인지를 다시 깨달은 것이다.
화산 문하들 모두가 마차에서 내리자 청명이 고개를 갸웃한다.
"짐은 왜 가지고 내렸어?"
"뭘 하려는 거냐, 대체?"
백천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묻자 청명이 어깨를 으쓱한다.
"말했잖아. 해야 할 일을 한다고."
"그러니까 그게……."
"사숙."
청명이 백천의 말을 잘라 버리고는 역으로 묻는다.
"검총에서 사숙은 얼마나 도움이 됐지?"
느닷없는 질문에 백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는……."
도움……. 도움이라.
청명에게?
백천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자존심이 확 상하지만,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짐만 됐지."
마음 같아선 백번이고 부정하고 싶다. 하지만 이미 훤히 드러난 사실을 부정하는 게 훨씬 더 꼴사나운 짓임을, 백천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맞아."
사숙과 사형들을 망신 주려는 것은 아니지만, 이건 명백한 진실이었다.
청명은 너무 빠르게 강해지고 있고, 그가 해야 할 일은 점점 더 위험해진다. 하지만 청명과 함께 움직이는 이들은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과거의 청명이라면 이들을 두고 혼자 달려갔겠지만 이제는 아니다.
청명은 검총을 겪고, 약선의 유지를 보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명확하게 인식했다. 이들과 함께 가지 않는 길은 의미가 없다.
"운남은 검총보다 더 위험한 곳이 될 수도 있어. 그런데 사숙과 사형들이 지금 이 수준이면 목숨까지 위험해."
백천이 살짝 입술을 깨문다.
"우리라고 그걸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단기간에 무공을 높일 방법이 없지 않느냐."
"왜 없어?"
"으응……?"
청명이 피식 웃었다.
"사숙은 이미 혼원단을 먹었잖아. 그 기운만 잘 소화해 내도 지금보다 두 배는 강해지겠지."
백천이 멍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혼원단의 힘은 상상 이상이었다. 덕분에 그 기운 대부분을 흡수조차 하지 못하고 단전에 고이 모셔 두지 않았던가?
문제는…….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이걸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데는 최소 몇 년이 걸린다. 그 역시 단기간이라면 단기간이겠지만."
"아, 걱정하지 마. 한 달이면 충분하니까."
"……하, 한 달?"
백천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정말이냐?"
"내가 거짓말하는 것 봤어?"
"어."
"……."
"……."
살짝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그,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이번은 아니야."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런데 대체 무슨 방법으로 이 기운을 빨리 흡수한다는 거냐? 혹여 네가 도와줄 수 있다는 게냐?"
짝!
청명이 손뼉을 쳤다.
"바로 그렇지."
백천의 얼굴에 기대감이 어렸다.
'그게 가능하다고?'
다른 이가 이런 말을 했다면 콧방귀를 뀌었을 것이다. 타인의 내력에 간섭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를 백천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가 아는 청명은, 적어도 무학에 있어서는 거짓도 허세도 없는 사람이다.
청명이 된다면 된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겪어 오지 않았던가?
"어떻게? 운기를 도와주는 거냐?"
"어…… 그런 건 아니고. 훨씬 더 간단한 방법이야."
"더 쉬운 일이라니!"
이 괴물 같은 놈!
백천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의 단전에 뭉쳐 있는 혼원단의 내력만 녹여 낼 수 있다면 단숨에 배는 더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화산의 제자들이 가장 부족한 것은 바로 내력이니까.
하지만 흥분에 떠는 그와는 달리 불안에 떠는 두 사람이 있었다.
'사형, 저 새끼 또 약 파는데요.'
'이번에는 또 뭘 하려고? 저거, 저거 웃는 거 봐라, 저거!'
청명에게 더 오랜 세월 당해 온 조걸과 윤종은 불안함에 떨 수밖에 없었다. 저놈이 저렇게 말할 때는 항상 비슷한 결과가 일어난다는 걸 경험적으로 아는 것이다.
"어떻게 한다는 거냐?"
그런 두 사람의 마음을 전혀 알아채지 못한 백천이 흥분해서 물었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냐. 조금 힘들 뿐이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 더 강해질 수만 있다면."
"……짜지?"
"응? 뭐라고?"
"그 말 진짜지?"
"……."
"정말 강해질 수만 있으면 뭐든 할 자신이 있는 거지?"
어…….
내가 말실수를 좀…… 한 것 같은데?
청명이 씨익 웃으며 백천을 향해 걸어온다.
"그렇지, 그렇지. 그런 전향적인 자세 아주 좋아. 나도 사숙을 패…… 좀 찝찝했는데 사숙이 그렇게 나와 주니 내가 마음이 편하네."
방금 뭔가 얼버무린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사숙."
"응?"
"혹시 추궁과혈이라는 말 들어봤어?"
추궁과혈?
"모를 리가 있겠느냐? 기운이 뭉치거나 막혔을 때, 때리거나 주물러서 그 기운을 풀어 주……."
어…….
그런데 그거 갑자기 왜 묻는데?
아니지? 내가 지금 생각하는 거 아니지?
……그렇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는 백천을 향해 다가서며 청명이 목을 꺾는다.
우득.
그리고 주먹을 천천히 움켜쥔다.
뿌드드득.
"사숙."
"……."
"이건 절대 내가 감정이 있어서 그러는 게 아냐. 아니, 아니지! 이건 순전히 감정으로 패는 거야! 다만!"
청명의 눈이 번들거린다.
그가 주먹을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이 주먹에 실린 게 오로지 애정이라는 걸 이해해 줬으면 좋겠군!"
"……."
백천은 흐릿해진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원시천존이시여.
저 새끼 좀 잡아가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