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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77화 (177/1,567)

177화. 속 터져 죽는 것보다는 낫잖습니까. (2)

현종이 도끼눈을 뜨고 청명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청명은 그 날카로운 시선을 받으면서도 배부른 강아지 같은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으헤헤."

"……."

"큽. 크흡. 으헤헤!"

"……."

도가에 투신한 지가 어언 수십 년.

망해 버린 화산을 이끄느라 수많은 위기와 고통을 겪으면서도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던 현종의 평정이 지금 이 순간 빠직빠직 금이 가고 있었다.

'뒤통수 한 대만 후려갈기면 소원이 없겠다.'

원시천존이시여.

어찌 저런 것을 화산에 보내셨습니까. 제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화와 복은 함께 온다더니 저놈이 딱 그 짝이었다. 화산의 가장 큰 홍복이 화산의 가장 큰 재앙이라니, 이런 경우가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크흡. 장문인. 감사……. 크흐흡!"

청명이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며 가슴께를 문지른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속에서 천불이 나는 현종이었다.

'아까워서 이러는 게 아니야! 아까워서!'

이건 숫제 강탈이 아닌가!

거 좋게좋게 줄 수도 있는 것을 이리 강탈해 가나! 그것도 장문인 품에 든 것을?

"끄으으응!"

현종이 영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자 현영이 슬쩍 눈치를 주었다.

"장문인."

"안다, 알아!"

괜히 현영에게 성질을 한번 부린 현종이 살짝 이를 갈며 청명에게 말했다.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크으으으. 걱정하지 마십시오, 장문인! 혼원단이 있는데 뭐가 걱정이겠습니까?"

"……."

저 새끼 저거 일부러 저러는 건가?

'뒤통수 한 대만! 진짜 딱 한 대만!'

하지만 그건 이뤄질 수 없는 꿈이었다.

"크흐흠."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는 것을 깨달은 현종은 무겁게 한숨을 쉬곤 크게 헛기침을 했다.

"청명아."

장문인의 목소리가 진지해진 것을 파악한 청명이 몸가짐을 바로 했다.

"예, 장문인."

"자꾸만 너희에게 어려운 일을 시키는 것 같아 내가 마음이 편치 않구나."

청명이 고개를 들어 현종을 바라본다.

"장문인."

청명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다 그런 것이라…….

어쩐지 맥이 풀린 현종은 그만 웃어 버렸다.

때때로 속을 박박 긁어 놓기도 하고, 때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한 일도 종종 벌이지만, 그럼에도 청명을 미워할 수 없는 것이 이런 점 때문이었다.

미묘하게 달관한 태도.

어떨 때는 정말 나이에 맞지 않을 정도로 아이 같은 느낌이지만, 어떨 때는 오히려 현종보다 더 연장자로 느껴지기도 한다.

'여전히 기이함이 사라지지 않는구나.'

한 사람 안에 어찌 저리도 여러 가지 면이 있을 수 있는가?

현종은 헛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어 갔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다 그런 것이지. 하지만 이 미안함은 어찌할 도리가 없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거리가 좀 멀다는 것 말고야 문제 될 일이 없으니까요."

"새외오궁은 모두가 그 폐쇄성과 괴팍한 성정으로 유명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남만야수궁의 궁도들은 중원의 법도가 통하지 않을 만큼 괴이하고 거칠다고 들었다."

"괜찮습니다."

청명이 흐뭇하게 웃었다.

"따로 방법이 있느냐?"

"헤헤. 아시면서."

청명이 슬쩍 허리에 찬 검을 툭 건드린다.

"……."

어……. 그렇긴 하지. 그게 예로부터 많은 일들의 정답이었지.

하지만 여기는 도가인데…….

현종이 눈을 질끈 감았다.

애초에 도가를 따질 거라면 청명을 밖으로 내돌려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런 현종의 마음을 헤아린 것인지, 백천이 슬쩍 청명의 앞으로 나섰다.

"장문인.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오."

보아라.

저 헌앙한 기세를.

청명을 보고 있다가 백천을 보니 봄볕을 받은 눈처럼 고통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남만야수궁이라고는 하나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은 아닐 것입니다. 최대한 대화로 풀어 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진심으로 다가간다면 그들도……."

"우리 모가지를 잘라서 장대에 걸겠지."

"예, 참 보기 좋은……. 내가 말을 하잖아, 인마!"

"말 같은 말을 해야지! 애초에 대화로 모든 게 해결될 것 같으면 전쟁은 왜 일어나나!"

"전쟁은 너 같은 놈이 있어서 일어나는 거지! 너 같은 놈 때문에! 세상에 너 같은 놈만 있으면 그게 사람 사는 곳이겠느냐! 아비규환이지?!"

"오늘 화산 한번 아비규환 만들어 봐?"

"……."

아웅다웅하는 백천과 청명을 보며 현종이 고개를 내저었다.

저놈도 글렀다.

예전의 그 헌앙했던 백천은 이미 청명에게 물들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래서야 화산의 미래가…….'

밝은 것도 같고, 어두운 것도 같고…….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크흠. 여하튼 최대한 이 녀석이 날뛰지 못하도록 막을 테니, 저희를 믿어 주십시오."

현종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천은 듣거라."

"예, 장문인."

"지금부터 너는 나를 대행한다. 남만에서 네가 하는 말은 나의 말이 될 것이고, 너의 뜻은 곧 화산의 뜻이 될 것이다."

전권을 준다는 말이었다.

그 말의 무거움을 아는 백천이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너무 무겁습니다, 장문인."

"너라면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종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경험이라는 것은 애초에 그런 것이다. 해 보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두려움이 앞설 수밖에 없다. 그 두려움을 짊어지고 하나하나 해 나가야만 비로소 자신의 세상이 더 넓어지는 법이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건승을 기원하마."

백천이 그 자리에서 꾸벅 절을 했다. 그러자 남은 이들도 현종을 향해 절을 하고는 하나둘 자리를 떠났다.

일행은 남영행을 갔던 이들과 달라진 게 없었다.

백천, 청명, 윤종과 조걸. 그리고 유이설.

다시 말하자면 지금 이 면면이 화산의 중진들이 가장 신뢰하는 이들이라는 뜻이다. 물론 청명은 '신뢰'라는 말과 조금 맞아떨어지지 않지만.

그들이 산문을 벗어나는 모습을 보며 현상이 살짝 걱정스런 어투로 입을 열었다.

"인솔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으음."

현종 역시 현상의 말이 걸리는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전의 남영행은 아이들만 가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다릅니다. 험지에 아이들을 보내면서 누구 하나 따라가지 않는 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저라도 보내 주십시오. 제가……."

"거, 사형. 괜히 엉덩이 비집고 들이밀지 마십쇼."

현상이 떨떠름한 얼굴로 현영을 돌아보았다.

현영의 표정은 태연하다 못해 뚱했다.

"우리가 가서 인솔하면 뭐가 달라집니까?"

"이 사람아. 그래도 우리가 어른 아닌가?"

현영이 코웃음을 쳤다.

"그 어른으로서 여태껏 우리가 한 게 뭡니까? 화산 말아먹고, 현판 내릴 지경으로 만든 것밖에 더 있습니까?"

"크흐흠."

현상이 슬쩍 얼굴을 붉히며 크게 헛기침을 했다.

현영은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늙은이들이 어린 녀석들을 보면 모든 게 다 걱정스럽고, 못 미더운 법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일이 간섭하려 들다가는 아이들의 성장을 발목 잡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네가 언제부터 아이들을 그리 신뢰했느냐?"

"신뢰 안 합니다. 제가 저놈들을 어떻게 믿습니까?"

"그런데?"

현상의 반문에 현영이 피식 웃었다.

"신뢰하지 않지만, 적어도 저놈들이 저보다 낫다는 건 압니다."

현상이 입을 다물었다.

그때 잠자코 듣고만 있던 현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품 안의 자식이라……."

내어놓으면 걱정스럽고, 그저 바라만 보게 되는 것이 자식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자식을 품 안에 끼고 사는 건 자식을 위한 길이 아니다. 때로는 험지를 겪고 상처를 입어야 성장하는 법이니까.

"화산의 선인들께서 저 아이들을 지켜 주시겠지."

그 선인들을 되레 괴롭히던 놈이 아이들 사이에 끼어 있다는 건 결코 알 수 없는 현종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객이 찾아왔으니! 화산의 도우들께서는 박정케 내치지 마시고 시원한 냉수 한 잔만 내어 주시오!"

"으응?"

뒤숭숭해진 화산을 단속하던 현영이 산문에서 들리는 커다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객?'

뭔 놈의 객?

오늘 화산에 찾아올 객이 있었나?

마침 수문위사도 세우지 않은 상황이라 객을 맞아 줄 사람이 없었다. 결국 현영이 직접 산문으로 가 닫힌 문을 열어젖혔다.

'거지?'

문밖에는 웬 거지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아이고! 이놈의 산은 왜 이리 험하고 가파릅니까. 올라오다 숨넘어가는 줄 알았네."

"누구시오?"

"아!"

거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저는 개방의 홍대광이라고 합니다!"

거지가 포권을 하자 현영이 얼떨떨한 얼굴로 마주 포권 했다.

"이, 일단 냉수 좀!"

"……."

"크으으으으으!"

시원하게 냉수를 들이켠 홍대광이 고개를 들고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아이고, 이렇게 환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장문인! 저는 개방의 낙양 분타를 맡고 있던 홍대광이라고 합니다."

"허허. 내가 화산의 장문인인 현종이오."

"이렇게 연락도 없이 찾아온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홍대광이 그 자리에서 넙죽 절을 했다. 현종이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왜 이러시오. 어서 일어나시오."

그러면서 새삼 그는 달라진 자신의 위상을 실감했다.

허리에 매어진 매듭으로 보아 저 홍대광이라는 이는 칠결개가 분명하다.

개방은 매듭으로 자신의 신분을 나타낸다.

십결은 방주.

구결은 은퇴한 전대 방주나, 은퇴한 장로들.

팔결은 장로.

그리고 바로 칠결이 개방의 각 분타주들이나 본타의 요직들이 맺는 매듭이다.

다시 말하자면 칠결개인 홍대광은 개방의 실질적인 요인이자, 후대 개방 방장의 후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이가 이리 넙죽넙죽 절을 해 대다니. 과거였다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무슨 일이시오?"

"하하. 다름이 아니라 제가 이번에 새로 열린 개방 화음 분타에 분타주로 오게 되었습니다."

"아, 화음에?"

현종이 살짝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더 놀란 홍대광이 반문했다.

"화산신룡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 아이가 워낙 좀."

"으음. 그렇지요. 그럴 수 있지요."

청명을 떠올려 본 홍대광이 바로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뭘 해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이 바로 청명이다.

"하여튼 화음에 분타를 열게 되어, 화음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화산에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좋은 일이오."

현종이 흐뭇하게 웃었다.

개방이 앞마당에 분타를 연다는 건 화산의 정보를 빼 가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지만, 문파들은 그걸 꺼려하기보다는 되레 반기는 편이었다.

그 대신 더 많은 정보를 얻고, 개방과 우호를 다질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앞으로도 종종 찾아뵙겠습니다. 아, 그리고 화산신룡의 요청으로 남영에도 거지들이 상주하기로 했습니다. 화영문으로 전할 것이 있으시면 저희가 대신 전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 주시겠소?"

"하하. 물론입니다, 장문인. 화산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이런 일은 얼마든지 해 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개방의 정보가 필요하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다룰 수 있는 한도 내의 정보라면 최대한 전해 드리겠습니다."

"참으로 감사하오."

현종의 말에 홍대광이 코를 쓱 닦았다.

'장문인은 평범한 사람 같군.'

그래도 화산에 화산신룡 같은 미친놈만 있는 건 아니라 다행이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화산을 오르는 내내 찝찝하지 않았던가.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쪽이야말로 잘 부탁드리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덕담이 오고 갔다.

그러다 홍대광이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런데…… 화산신룡은 어디 갔습니까? 그래도 나름 겪은 게 많은 사이인데, 얼굴 한 번 안 비치다니."

"아……. 그 아이들은 일이 있어 방금 외유를 나갔소이다."

"외유요?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텐데."

홍대광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언제쯤 돌아옵니까?"

"글쎄……. 운남이 워낙 먼 곳이라."

"우, 운남? 운남에 갔단 말입니까? 아, 아니! 사람을 여기로 불러 놓고 자기는 왜 그 먼 데까지 갔답니까! 그럼 저는 어떡하라고?"

"……."

그걸 왜 여기에 따져?

"이, 이런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놈이 시킨 일은 다 했고, 거지들까지 잡아 왔는데! 막상 일을 시킨 놈은 운남으로 가 버리다니! 언제 출발했습니까?"

"방금……."

"으아아아아! 화산신룡! 이 망할 놈아아아아아아!"

홍대광이 부리나케 밖으로 뛰어나갔다.

문이 쾅 닫히며 현종의 앞머리가 또다시 휘날렸다.

닫힌 문을 황당하게 바라보던 현종이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허."

청명이 놈이 데리고 오는 놈은 왜 하나같이 이 모양인가.

여하튼 화산에 골칫거리 하나가 더 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현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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