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속 터져 죽는 것보다는 낫잖습니까. (1)
백상이 화산의 전각들을 돌아보며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요새 영 분위기가 싱숭생숭한 것 같은데.'
정확하게 말하면 싱숭생숭하다기보다는 뭔가 붕 뜬 것 같은 느낌이다.
따지고 보면 청명이 놈이 화산에 들어온 이후로는 쭉 분위기가 묘하긴 했지만, 얼마 전 청명과 그 일행이 남영에서 복귀하면서부터 더욱 심해졌다.
이제는 심지어 장로님들까지 들떠 있는 게 확실히 보인다.
'보나마나 뭔가 대단한 걸 했겠지.'
이제는 이대제자 중 누구도 청명의 대단함을 부정하는 이가 없다. 이 년이나 겪었으니 알기 싫어도 알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그 역시 청명으로부터 받은 것이 있으니까.
까놓고 말해 풀떼기만 뜯어 먹고 다 떨어진 옷만 입고 살던 때와, 고기를 물릴 때까지 뜯으며 좋은 옷을 입고 다니는 지금을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도사라고는 하지만, 이슬만 먹고 살 수는 없는 법. 문파 전체가 자금난에 시달리던 그때보다야 지금이 백배 낫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다만.
때때로 백상은 과거의 적막하던 화산이 살짝 그립기도 했다.
청정도량 본연의 느낌이 살아 있던 그때의 화산이 말이다.
"너무 과한 생각……."
우르릉.
돌연 귀에 들려온 소리에, 백상의 고개가 위쪽으로 향했다.
"소나기라도 오려나?"
갑자기 천둥소리가…….
우르릉.
어?
지금 옆에서 들린 것 같은데?
하기야 여기가 워낙 지대가 높으니까 천둥소리가 가깝게 들린다고 해도 이상한 건 아니…….
우르르르릉!
백상의 고개가 획 돌아간다.
아니. 아무래도 천둥소리가 아닌 것 같은데……?
소리가 난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백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저거 왜 저래?"
장문인의 처소에서 먼지가 피어오르고 있다.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먼지가 피어오른다.
"이, 이게……."
우르르릉!
천둥 치는 소리가 또다시 울리자, 이윽고 전각이 통째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 저거 저러면 안 되는데?
저기 저거 장문인 처소인데 분명……?
그리고.
"으아아아아아아!"
"아니, 이게 뭔 일이냐고!"
"제발 좀! 제발 적당히 좀 하자! 제발!"
그 전각에서 백천과 사질, 사매, 장문인, 장로님까지 빛의 속도로 튀어나왔다. 그 광경에 백상은 그만 넋을 놓고 말았다.
"……또 무슨."
생각할 시간은 길지 않았다.
콰르르르르르릉!
벼락이 떨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급기야 전각이 통째로 무너진다. 기와가 사방으로 비산하고 기둥이 넘어갔다.
"헐……."
저기가 저렇게 무너지면 안 되는 곳인데. 저거…….
장문인 처소인데. 중요한 덴데…….
멍한 눈으로 폭삭 무너진 전각을 바라보던 백상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진짜 문파 꼴 잘 돌아간다."
개판이네. 개판이야…….
"……."
폭삭 주저앉아 버린 전각을 보는 현종의 눈썹이 쉴 새 없이 경련을 일으켰다.
"그……."
뭐라 할 말이 없다.
"에헤이! 콜록! 콜록! 에헤이!"
옆에서 연신 기침을 하던 현영이 손사래를 치며 눈을 찌푸린다.
"뭔 놈의 전각이 고작 이런 걸로 무너지나 그래."
아니, 인마!
지금 내 집이 무너졌는데, 그러고 끝날 일이냐?
"쯧쯧. 꼼짝없이 새로 짓게 생겼네."
살짝 발끈했던 현종의 귀가 일순 움찔했다.
새집?
어……. 그건 좋은데?
새집을 얻게 되었으니 좋아해야 할지. 헌집이 무너졌으니 슬퍼해야 할지.
"아, 아니지."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고개를 휘휘 저은 현종이 목을 쭉 뺀다.
"청명이 녀석은 어떻게 되었느냐?"
"저기 있잖습니까."
"응? 어디?"
"노안이 오셨나? 저기요, 저기."
현영이 가리킨 곳을 본 현종이 눈을 가늘게 떴다.
무너진 전각의 잔해들이 두어 번 들썩거리더니 그 안에서 한 사람이 뽈뽈뽈 기어 나온다.
"아니, 이게 왜 무너졌어! 누구야! 어떤 놈이야?!"
너다, 이놈아.
네가 했다고! 네가!
청명이 마구 짜증을 내며 밖으로 나오더니 무너진 전각을 보며 혀를 내두른다.
"얼마나 막 지었으면 이게 무너지냐! 누가 자재 빼먹었어!"
"……."
현종이 답도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려는 그때였다.
"장문사형. 오기조원 아니었습니까?"
"글쎄……."
현영의 말에 현종이 침음을 흘렸다.
"내가 알던 오기조원과는 조금 다르더구나. 오기조원을 이룬 이들은 운공을 할 때, 오색의 원이 다섯 개 나타난다고 들었다. 하지만 오색의 광채는 보였으나, 원은 없었지 않느냐?"
"……그럼 그 비슷한 정도는 될까요?"
"그것도 글쎄다."
현종이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여하튼 혼원단을 먹인 게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구나."
그리고 청명을 보며 허허 웃고 말았다.
운공을 하더니 몸이 허공에 뜨고, 오색의 광채를 뿜어냈다. 이쯤 되면 숫제 등선할 기세가 아닌가?
"그럼 말입니다, 장문인."
"또 뭐."
"저놈은 대체 얼마나 더 세진 겁니까?"
"……."
현종이 입을 다물었다.
얼마나 더 세졌냐고?
어…….
현종이 말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현영의 눈이 가늘어진다.
"장문인도 잘 모르시는 것 아닙니까?"
"크흐흠. 그럴 리가 있느냐?"
"그럼 왜 말을 못 하십니까?"
"……."
아니. 이 사람아! 내가 그걸 어떻게 아나?
저런 건 살아생전 듣도 보도 못 했는데. 막말로 무당 장로랑 맞상대하던 놈이 영약 먹고 더 강해졌는데, 그걸 현종의 수준에서 무슨 수로 파악하라는 말인가?
싸워 보자고 할 수도 없고.
"굉장히……. 음, 굉장히 강해졌……겠지?"
"……."
"그러니까 음……. 허허허. 네게 설명하기는 어렵구나."
"……."
그, 그런 눈으로 보지 마.
현종이 슬쩍 시선을 피하자 현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여하튼 강해졌다는 건 좋은 일이니까요."
"그래. 좋은 일이지."
정말 좋은 일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전각도 날아갔고 말이지.
모두가 술렁일 때, 청명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생각지도 않게…….'
그가 영단에서 뽑아낼 수 있는 기운은 한계가 있다. 그의 몸에 쌓인 기운들은 천하에서 가장 정순한 기운이다. 아무리 영단이 정제하고 또 정제한 정기만으로 모은 것이라 하나, 청명의 기운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렇기에 과거 설매단을 먹고도 크게 효험을 보지 못한 게 아니던가?
하지만 이 혼원단은 청명이 생각한 영약과는 달랐다.
가진 바 기운이 자소단에 비해서 굉장히 높은 건 아니다. 대신 자소단에 비해서 몇 배는 더 정순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어쩌면…….
'이거 나한테 딱 맞는 물건인데?'
물론 받아들인 기운 중 이 할도 채 흡수하지 못하고 나머지는 모두 배출해야 했지만, 이 할이 어디인가?
전에 설매단을 먹었을 때는 그 쥐꼬리만 한 기운 중에서도 겨우 한 줌만 흡수하지 않았던가!
덕분에…….
청명이 살짝 주먹을 쥐었다 편다.
몸 안에 활력이 넘친다.
'아직은 갈 길이 구만 리지만.'
과거의 그의 힘을 되찾는 건 아직 요원한 일이다. 하지만 혼원단 덕분에 그 시기를 한참 당겨 낸 기분이다.
"흐으으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청명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의 사형들이 죽을상을 하고 서 있었다.
'괴물 같은 새끼!'
'보나마나 더 세졌겠지!'
'저거, 저거 눈에서 빛 나오는 거 봐. 저게 사람이냐? 사람이야?'
청명에게 익숙한 사형제들은 그의 몸에서 뿜어지는 기파만으로도 그가 과거보다 훨씬 더 강해졌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왜 같은 걸 먹었는데……."
이쯤 되면 좀 억울할 만하다.
영약이 사람을 가리는 것도 아닐진대. 누구는 영약 먹고 기운 세졌다고 좋아하는 수준이고, 누구는 공중에 떠서 전각을 날려 버리니 너무 불공평하지 않은가?
현영이 청명에게 달려왔다.
"어떠냐? 효과가 좀 있느냐?"
"크으, 장로님! 이거 약발 죽여줍니다!"
"……그, 그래. 다행이구나."
청명이 살짝 입술을 핥았다.
'생각보다 효과가 있다 이 말이지?'
지금 청명에게 있어서 가장 부족한 것은 어찌되었건 내공이다. 워낙 정순한 기운이라 시간이 지나는 것 외에는 내력을 늘릴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도움이 될 방도를 찾아낸 것이다.
'이거.'
더 먹으면 내력이 더 늘까?
청명이 살짝 눈을 번뜩거리며 현종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현종이 품 안에 든 혼원단 상자를 꽉 움켜잡았다.
'아, 안 돼.'
저 승냥이 같은 놈이 혼원단을 노리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건 화산의 미래와도 같은 물건이다.
'절대 안 돼!'
청명이 입맛을 다시며 현종을 향해 걸어온다.
"장문인."
"으, 으응?"
"그거 몇 알 더 쓴다고 별일이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죠."
"이, 이거?"
현종이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난다.
"안 된다!"
청명이 무슨 말을 더 꺼내기도 전에 현종은 마구 소리를 질렀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화산은 아직 의약당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단 말이다! 다치는 이가 나오면 혼원단이라도 써서 살려야지! 이건 더는 못 내놓는다! 차라리 나를 밟고 가져가라!"
"크으."
청명이 감격했다는 듯이 탄성을 내질렀다.
그냥 아까워서 신줏단지 모시듯 하는 줄 알았더니, 저런 깊은 뜻이 있었을 줄이야. 역시나 문파의 제자들을 아끼는 데는 현종만 한 사람이 없다.
하지만 현종은 몰랐다.
지금 자신이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 말이다.
"아, 그러니까. 부상을 입거나 했을 때 사용할 용도로 남겨 두셔야 한다는 거죠?"
"그, 그렇지?"
청명의 어투에서 뭔가 수상한 기운을 감지한 현종이 움찔했다. 분명 뭔가를 실수한 것 같은데.
"장문인."
"으응?"
"일단 감사드립니다."
청명이 직각으로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그 공손한 반응에 현종의 불안감은 점점 커져만 갔다.
고개를 든 청명이 씨익 웃으면서 입을 연다.
"운남이라는 위험한! 더없이 '위험한' 곳으로 가는 저희 제자들에게 이 혼원단은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그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곳!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곳! 남만야수궁이라는 무시무시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 지배하는 그 땅에!"
아니, 네가 대가리 다 깬다면서…….
"크으, 장문인. 저는 괜찮습니다! 이 청명은 화산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던질 수 있습니다."
"어……."
"하, 지, 만!"
청명이 고개를 획 돌렸다.
"사숙과 사형들이 그 위험한 땅에 갔다가 부상을 당해 죽기라도 하면 저는 죽어서도 눈을 감을 수 없을 겁니다!"
"어…… 어?"
이야기가 왜 그렇게 돼?
"아, 아니, 그……."
"그 위험한 상황에 혼원단 딱 한 알……. 아니! 세 알! 아니! 다섯 알만 있으면!"
"왜 점점 늘어나느냐……."
이 날강도 같은 놈아!
"딱 다섯 알만 있으면 목숨을 부지하고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은데! 딱 다섯 알만 있으면! 하아……. 하지만 안 되겠죠? 그 혼원단은 화산의 미래를 위한 것이니까요……."
"그, 그렇……."
청명이 고개를 획 돌려 백천을 바라보았다.
"사숙! 장문인께서 사숙은 화산의 미래가 아니라십니다!"
"나는 왜 끌어들이냐, 이 미친놈아!"
"말이 그렇잖아요! 말이! 아이고, 이놈의 문파! 제자들이 목숨 걸고 사지에 걸어 들어가는데 그놈의 영약 쪼가리가 아깝다고오오오오! 사람 나고 영약 났지! 영약 나고 사람 났나!"
"……."
그때였다.
턱.
누군가가 현종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돌아보니 현영이 체념한 얼굴로 빙그레 웃고 있었다.
"……그냥 주십쇼."
"……."
"속 터져 죽는 것보다는 낫잖습니까."
"끄으으응."
현종이 머리를 움켜잡았다.
"준다, 줘! 이 날강도 같은 놈아!"
가면 갈수록 청명을 대하는 말이 거칠어지는 현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