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처맞으면 비키게 되어 있어! (5)
윤종은 자신들의 앞에 놓인 다섯 알의 혼원단을 보며 눈을 끔뻑였다.
"이게……."
윤종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장문인을 바라본다.
현종이 더없이 자애로운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먹거라."
"……이, 이걸요?"
윤종이 현종과 혼원단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저희가 말입니까?"
현종이 더없이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옆에 있던 현영이 툭 말을 뱉었다.
"그럼 내가 먹으리?"
윤종이 더 놀란 눈으로 현영을 바라본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일단은 장로님들부터 드셔야……."
"에잉,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구나."
현영이 단호하게 윤종의 말을 끊는다.
"나이를 먹을 대로 먹어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우리가 이걸 먹어 뭣 하겠느냐? 우리가 이런 걸 먹으면 낭비밖에 되지 않는다."
모두가 당황한 기색을 어쩌지 못하고 눈만 굴리니, 그는 다시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 혼원단은 너희가 구해 온 것이니, 당연히 너희가 먹어야지. 그리고 설사 이 혼원단을 구해 온 이들이 너희가 아니라 우리라고 할지라도 이 혼원단을 먹는 건 너희가 되어야 한다."
"……장로님."
"거 시간 끌 것 없다. 이게 뭐 대단한 거라고. 너희가 다섯 알을 먹어도 열다섯 알이나 더 남아 있다! 연구에는 충분한 양이지. 아니, 오히려 과할 정도로 많다. 그러니 부담 가지지 말거라."
그때 현종이 슬쩍 현영의 말을 거들었다.
"운남에서 자목초를 구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 혼원단을 복용하고 가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니라."
현영이 살짝 고개를 돌려 현종을 째려보았지만, 현종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그 시선을 외면했다.
'누가 보면 처음부터 주려고 한 줄 알겠습니다?'
'가만히 좀 있어라, 가만히! 나도 체면이 있지 않으냐!'
눈빛으로 서로의 마음을 교환한 두 사람이 동시에 헛기침을 한다.
"그러니까. 이거 먹으면 된다는 거죠?"
그때 잠자코 있던 청명이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뻗어서 혼원단을 집어 든다.
"헉!"
"인마! 살살 좀! 그게 어떤 건데!"
"야야야야! 부서진다! 부서져!"
"확 마!"
순간 격하게 쏟아지는 반응에 청명은 움찔하고 말았다.
"아니, 영약 하나 잡았다고 사람을 이렇게 타박하나!"
"그게 어떤 영약인데!"
"너를 팔아도 못 사, 이놈아!"
청명의 눈가가 시큰해졌다.
'이놈의 거지 문파. 얼마나 못 먹고 자랐으면…….'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 나고 영약 났지! 영약 나고 사람 났나!
"끄응."
이게 다 문파에 영단이 부족해서 생기는 일이다.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혼원단의 재료를 구해 와야지.'
당대의 화산만을 위한 일이 아니다. 이건 후대의 화산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여하튼 간에!
"먹으면 되는 거죠?"
"……."
"왜 대답이 없으십니까? 장문인?"
"그……."
현종의 눈가에 눈물이 찔끔 배어났다.
청명들이 혼원단을 먹는 게 아까운 게 아니다. 연단법을 되살리는 데 실패해서 이 혼원단이 마지막 남은 스무 알이 된다고 해도 일단은 저놈들에게 먹이고 봐야 한다는 건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다만 뭐랄까…….
'또 구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영약이란 단순히 내력을 증진하는 데만 쓰는 게 아니다.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주화입마나 큰 내상 등에 요상단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이리 막 써 버리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좀 꿍쳐 놨다가 나중에 애들이 다치기라도 하면 그때 먹이는 것이…….
수십 년 동안 화산을 이끌어 온 그의 고된 삶이 도무지 불안함을 버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현영이 들으면 거지 근성만 쌓였다고 욕을 하겠지만 사실이 그런 걸 뭘 어쩌겠는가?
앞으로 화산은 더 많은 일을 겪어 갈 테고, 아이들이 다치는 일도 늘어날 텐데, 이걸 잘 꿍쳐 두면 그럴 때마다 요긴하게 쓸 수 있을 텐…….
"먹어라!"
하지만 현영은 피도 눈물도 없었다.
"아끼면 똥 되는 거다. 신경 쓰지 말고 먹거라."
"그……."
"안 그렇습니까? 장, 문, 인?"
"……그럼. 그래야지. 그렇지. 먹어야지."
네가 장문인 해라! 네가!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미묘한 감정에는 전혀 관심 없는 청명이 슬쩍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재빨리 혼원단을 입에 넣으려고 할 때였다.
지금까지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백천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장문인과 현영을 향해 정중하게 절을 했다.
"제자 백천, 장문인과 장로님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은혜는 무슨."
현영이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는다. 여하튼 저놈은 참 예의가 바르다니까.
하지만 현영은 예의 바른 그보다, 예의라고는 화산에 들어오기 전에 팔아먹고 온 청명이 훨씬 더 좋았다.
봐라.
다른 놈들이 여전히 눈치를 보는 와중에도 청명은 혼원단을 보며 침을 질질 흘리고 있지 않는가?
'그래, 그래.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새끼.'
먹어야지. 먹고 쑥쑥 세져야 더 큰 걸 벌어 오지!
"사문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청명을 제외한 나머지도 재빨리 백천을 따라 절을 한다. 그 허례가 귀찮았던 현영이 현종에게 눈짓을 한다.
"……일어나거라."
"예, 장문인."
"너희가 보답하는 길은 어서 그 혼원단을 섭취하고 우리의 걱정을 풀어 주는 것이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백천이 살짝 긴장한 눈으로 혼원단을 집어 든다.
'이걸…….'
저 소림의 대환단 이상 가는 영단. 하나만 강호에 풀려도 혈겁을 부를 수 있다는 그 어마어마한 영단을 먹는 날이 올 줄이야.
'이것도 다 저놈 덕분인가.'
백천이 살짝 쓴웃음을 지었다.
청명이 화산에 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 이제 와선 잘 상상도 되지 않는다.
'생각하지 말자.'
지금은 잡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이 영약을 온전히 흡수하여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백천이 살짝 긴장한 얼굴로 가부좌를 튼 뒤 혼원단을 입가로 가져갔다.
사르르륵.
입 안으로 들어간 혼원단이 순식간에 녹더니, 절로 목을 타고 안으로 넘어간다. 마치 산속 깊은 계곡의 청정수를 한 모금 들이켠 것 같은 청량감이 몸 안 가득 퍼져 나간다.
하지만 그도 잠시.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던 청정수가 이내 물줄기가 되고, 곧 콸콸 흐르는 폭포가 되어 백천의 전신을 휘돌기 시작했다.
그 압도적인 중량감에 그는 몸을 떨었다.
'이것이 혼원단……!'
기운이 봇물 터지듯 밀려든다.
그 작은 영단을 하나 먹은 것만으로 어떻게 이리 많은 기운이 불어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다.
'집중해!'
백천이 일순 잡념을 날려 버렸다. 그리고 몸 안에 불어나는 혼원단의 기운을 인도하여 대주천을 시작했다.
콰아아아아아아!
흡사 몸속에 홍수가 터진 것 같다. 밀려드는 혼원단의 기운이 그의 몸 안에 박혀 있던 불순물들을 과격하게 씻어 내고는 기맥을 확장시킨다.
인도를 시작한 것은 백천이었으나, 혼원단의 기운은 이내 그의 통제를 벗어나 길을 제멋대로 누비기 시작했다.
하지만 백천은 위기감보다는 형용할 수 없는 고양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전신이 기운으로 꽉 들어찬 것 같은 느낌.
어쩌면 두 번 다시 느껴 볼 수 없을 그 어마어마한 감각에 정신이 날아가 버릴 것만 같다.
기운이 대맥을 넓히고 작은 세혈 하나하나를 개통하기 시작한다. 막혀 있던 기혈들이 뚫리고 깨끗하게 청소되어 새것처럼 거듭났다.
손끝의 미세한 곳까지 모두가 생생히 잡힐 것만 같다. 온몸의 감각이 새로이 돋아난다.
'이게 영단의 힘!'
왜 무인들이 영단 하나를 손에 넣기 위해서 목숨을 거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수련을 하고 아무리 애를 써도 인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 있는 법.
지금 혼원단의 기운은 그 인력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치우고 있었다.
그러나.
'이 이상은 무리다.'
아직 몸 안에는 혼원단의 기운이 넘쳐나고 있었지만, 지금 백천의 힘으로는 그것들을 모두 흡수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없었다.
기본적으로 영단의 기운은 몸 안에 가둬 두고 시간을 들여 녹여 내는 법. 백천은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고 기운을 천천히 갈무리했다.
과욕은 언제나 패망의 지름길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전신을 휘돌던 혼원단의 기운이 백천의 인도에 따라 단전 안으로 밀려들어 가기 시작했다.
혼원단의 기운이 모조리 단전 한구석에 안착한 것을 확인한 백천은 천천히 대주천을 마무리하고 눈을 떴다.
"음!"
그리고 몸을 부르르 떤다.
전에 없이 온몸에 힘이 넘치는 기분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무엇이라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넘쳐나는 활력이 어마어마한 고양감을 만들어 낸다.
"장문인! 저는……."
백천이 감격에 떨며 막 한마디를 하려는 순간이었다.
"장문……."
응?
백천이 고개를 갸웃하며 현종을 바라보았다.
'으응?'
현종이 조금 이상하다.
평소처럼 근엄하게 입을 다물고 있거나 인자하게 웃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답지 않게 입을 헤 벌린 채, 풀린 눈으로 뭔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
그리고 시선도 조금 이상하다.
조금 위.
사람이 선 것보다 조금 위다. 대체 이 방 안에서 왜 저런 곳을 보고 있다는 말인가?
현종뿐 아니라 현영 역시 같은 곳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백천이 멍한 얼굴로 그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 이런 미친! 이게 뭐야?"
그답지 않게 화들짝 놀라 뒤로 후다닥 물러나고 말았다.
그 시선의 끝에는 당연하게도 청명이 있었다. 하지만 저건 그냥 '있었다'라는 말로는 표현하기 어렵다.
왜냐고?
시선이 위로 가 있으니까.
'왜 사람이 공중에 떠 있어?'
백천의 얼굴에 당황이 어렸다.
가부좌를 튼 청명은 말 그대로 허공에 떠올라 있다. 현종도 현영도 이 기괴한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경지에 이른 고수가 운기를 하면 허공에 떠오른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지만…….'
단 한 번도 눈으로 확인한 적 없는 일이기에 그저 호사가들이 지어낸 말이거니 했었다. 그런데 설마 이런 광경을 두 눈으로 보게 될 줄이야.
물론 청명의 경지가 높아서 벌어진 일만은 아닐 것이다. 혼원단의 어마어마한 기운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벌어진 일로 보는 게 맞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지금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대경할 노릇이라는 건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헐? 저게 뭐야?"
"……세상에."
하나하나 눈을 뜬 그의 사매와 사질들도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놀랄 일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고오오오오오!
갑자기 청명의 몸에서 오색의 광채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오, 오기조원(五氣朝元)?"
"아, 아니. 좀 다른 것 같습니다……?"
현종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들이 아는 어떤 지식과도 맞아 떨어지지 않는 현상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하나.
'뭔가 엄청난 게 벌어지고 있는 것 같은데?'
고오오오오오오!
그 순간 주변의 공기가 청명을 향해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다.
두두두두두두두!
그와 동시에 그들이 있는 전각이 통째로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히, 히익?"
"무, 무너진다?"
"나가라! 당장 여기서 나가!"
현영의 고함과 동시에 모두가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백천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아니, 저 미친놈은 운공 하나도 곱게 끝나는 일이 없냐! 돌아 버리겠네, 진짜!"
모두의 심정을 대변하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