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처맞으면 비키게 되어 있어! (4)
"아니! 세상에 안 되는 게 어디 있어요! 안 되면 되게 해야지!"
청명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황문약은 무척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이들이 이런 말을 했다면 불쾌한 기색을 보였을지 모르지만, 무려 청명이다. 황문약은 그에게 받은 것이 너무 많았다.
"소도장, 일단 진정하시게."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
"눌러라."
현종이 나직하게 명하자 백천과 윤종이 얼른 청명을 잡아 눌렀다.
"끄으으응."
청명이 앓는 소리를 낸다.
현종이 슬쩍 황문약을 보고는 넌지시 묻는다.
"혹, 빙정 때문에 그러는 것이오?"
그런 그의 목소리에 우려가 섞여 있었다.
북해의 가장 깊은 험지에서 나는 빙정은 혼원단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물품 중 가장 귀하고 구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심지어 북해빙궁의 관리하에 있기 때문에 돈이 있다 하여 쉬이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황문약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빙정을 구하기가 더없이 난해한 건 사실이지만, 은하상단의 능력이라면 그 정도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하면?"
"구하지 못하는 품목은 빙정이 아닙니다. 바로 이 자목초(紫木草)라는 것이지요."
"흐음?"
현종이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자목초 역시 구해 달라고 하기는 했지만, 딱히 대단할 것 없어 보이는 물건이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 귀한 물품입니까? 굉장히 고가라든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자목초 역시 특정한 곳에서만 나는 희귀한 품목이기는 하나, 그 효능이 대단할 게 없어 딱히 약초라고 할 수도 없는 물건입니다."
"한데 왜?"
황문약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장문인께서는 당연히 새외오궁(塞外五宮)에 대해 알고 계시겠지요."
"물론이오."
새외오궁.
중원의 변방에 있는 다섯 개의 세력.
그 하나하나가 중원의 구파일방에 필적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해서 특별히 묶어 부르는 세력이다.
남해태양궁(南海太陽宮). 북해빙궁(北海氷宮). 포달랍궁(布達拉宮). 남만야수궁(南蠻野獸宮). 마라혈궁(魔羅血宮).
이 다섯 문파를 통틀어 새외오궁이라 부른다.
"문제는 그 새외오궁 중 남만야수궁입니다."
현종이 눈을 끔벅였다.
대체 그 남만야수궁이 뭘 어쨌다는 말인가?
그 의문을 이해한다는 듯이 황문약이 곧장 설명을 시작했다.
"이 자목초라는 것은 운남의 깊은 골짜기에서 나는 자생초입니다. 과거에는 구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유통하는 상인이 없기에 직접 운남으로 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지요. 그런데 지금은 자목초 자생지로 가는 길이 아예 막혀 있습니다."
"……길이 막히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앞서 말씀드린 남만야수궁이 길을 막고 있습니다. 정확히는 자목초의 자생지로 가는 길은 물론이고, 자신들의 세력권에 중원인들이 통행하지 못하게 막고 있습니다."
"아니, 일개 문파가 길을 막는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이오?"
황문약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남만은 우리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곳입니다. 그곳의 무파들과 무력집단은 한 지역을 점거하고 마치 왕처럼 군림하고 있습니다. 나라의 힘이 그들을 통제하지 못합니다."
현종이 미간을 찌푸렸다.
영 말이 되지 않는 소리는 아니다. 애초에 저 새외오궁 중 포달랍궁이나 북해빙궁등은 각 지역에서 거의 왕실처럼 군림하고 있지 않은가?
남만야수궁 역시 그와 같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왜 길을 막는다는 말입니까?"
"과거 마교 혈사 이후로 남만야수궁과 중원의 관계가 급속도로 악화되었습니다. 마교가 처음 새외를 휩쓸기 시작할 때 중원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중원은 그들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습니다. 새외의 일 따위에 전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였지요."
"쯧."
잠자코 듣던 청명이 살짝 혀를 찼다.
'그랬다가 나중에 개 피 봤지.'
그 마교가 아래쪽을 싸그리 정리하고 북진할 때는 도와줄 이들이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덕분에 마교의 발호(跋扈)가 정리된 이후로 남만야수궁은 중원인들과의 교류를 완전히 차단했습니다. 그로도 모자라 이젠 접근 자체를 불허하고 있고요."
황문약이 한숨을 내쉬었다.
"덕분에 상단들의 피해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운남의 차는 중원에서도 가장 유명합니다. 이 차가 사천과 섬서 상인들의 가장 큰 수입원 중 하나였는데, 운남과의 교역로가 막혔으니 막대한 손실을 입을 수밖에요."
"다시 말하자면……."
백천이 상황을 정리했다.
"상인들이 이문을 포기해야 할 만큼 저들의 입장이 강경하다는 뜻이군요."
"그렇소이다."
현종의 얼굴이 더없이 딱딱하게 굳었다.
"장문인. 다른 물품은 모두 구해다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목초만큼은 저희의 힘으로도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드시오, 상단주. 그게 어찌 상단주의 잘못이겠소."
부드럽게 황문약을 위로하면서도 현종의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화산이 더 강해질 길을 발견했다 생각했건만, 생각지도 못한 암초에 걸리고 만 것이다.
"의약당주."
"예, 장문인."
의약당주 운각이 즉시 고개를 숙였다.
"어떤가. 자목초가 없다 하더라도 혼……. 자소단을 제조할 수 있겠는가?"
"장문인……."
운각이 몇 번 마른침을 삼키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연단이란 그저 재료들을 합쳐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재료를 완벽하게 배합하고 특별한 연단법을 거칠 때, 상승의 작용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단 하나의 재료라도 빠지거나 정확한 양이 들어가지 않으면 본래 나와야 할 효능의 십분지 일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으으음."
"완벽한 영단을 조제하지 못할 바에야는 차라리 재료들을 생으로 먹는 게 나을 것입니다. 자목초가 없이는 자소단을 만들 수 없습니다."
모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때였다.
"그러니까……."
마치 지옥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음산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물론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청명이었다.
"그 남만야수궁 놈들이 내 혼……. 아니! 내 자소단을 만드는 재료를 내어놓지 않고 있다는 거죠?"
"……."
청명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달아올랐다.
"아니! 이 새끼들이 뒈질라고!"
"눌러!"
"예!"
청명이 발작하려 하자 주위에 있던 이들이 부리나케 달려들어 청명을 잡아 눌렀다.
"놔! 이거 안 놔? 이 새끼들이 미쳐 가지고는! 뭐 대단한 것도 아니고 풀 쪼가리를 안 내어놓겠다고 난리를 쳐?"
"지, 진정해라. 그만한 놈들이 길을 막고 있다는데 무슨 방도가 있겠느냐!"
"막아? 길을 막아? 처맞으면 비키게 되어 있어! 대가리가 깨지고도 길 막는다고 설치는지 한번 보자!"
청명이 눈을 희번덕댄다.
"으라차아아아아!"
청명이 자신을 누르고 있는 이들을 날려 버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불타오르는 눈을 본 현종이 움찔했다.
"장문인!"
"……아, 왜."
또 뭐 하려고, 인마!
"운남으로 갑니다!"
"……."
"제가 그 새끼들 다 깨 버리고 자목초를 가지고 오겠습니다."
백천과 윤종이 기겁을 하며 청명을 움켜잡았다.
"인마! 남만야수궁이라고! 새외오궁이란 말이다!"
"그런 곳에 시비를 걸면 목이 열 개라도 모자란다!"
하지만 청명은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왜 내 목을 걱정해! 그 새끼들이 제 목을 걱정해야지!"
"……."
와, 이게 미묘하게 납득이 되네. 이게 납득이 돼.
그때, 가만히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조걸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상단주님."
"음?"
"운남에서 중원인의 출입을 금한다면, 다른 지역 사람들을 고용할 수는 없습니까? 서역인이라든가. 중원인이 아닌 사람들은 운남 안으로 들여보낼 수 있는 게 아닌지요?"
"오?"
황문약이 눈을 크게 떴다.
"와……. 똑똑하다. 우리 조걸이."
"저 사형이 한 번씩 잔머리가 잘 돌아간다니까."
"……."
니들이 너무 생각이 없는 게 아니냐고 반문하고 싶었던 조걸이지만, 일단은 입을 꾹 닫았다.
그때 황문약이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우리 역시 그런 시도를 해 본 적이 있네만…… 다 실패로 돌아갔네. 운남에서 교역을 하는 서역인들은 이 물품들을 중원으로 반출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지. 개중 물건을 파는 이들이 없는 건 아니나, 잘못 걸리면 목이 달아날 일이라 쉽사리 손을 대려 하지 않을 걸세."
"……그렇군요."
"더구나."
황문약이 한숨을 푹 내쉰다.
"특히나 이 자목초는 운남 깊은 곳, 남만야수궁의 영역 바로 옆에 있네. 이곳은 서역인들의 출입마저 금지된 곳이라 그런 방식으로는 손에 넣을 수 없어. 심지어 이곳에는 야수궁 소속이 아닌 운남인들의 출입마저 금지되어 있다네."
조걸이 이해했다는 듯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황문약의 눈에 이채가 어린다.
'상재가 있는 녀석이로군.'
그리고 이 자리에는 상재가 아니라 독기가 있는 녀석도 있었다.
"그럼 결론 났네요!"
청명이 이를 갈며 말했다.
"운남으로 달려가서 그 새끼들한테 자목초를 내놓으라고 해야죠!"
"……야수궁이라니까."
"그게 뭐! 나는 화산이야!"
"……."
배를 쭉 내미는 청명을 보며 현종의 마음에는 참 여러 가지 감정이 휘몰아쳤다.
저토록 문파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는 걸 보니 뿌듯하기도 하고, 너무 대책이 없어서 황당하기도 하고.
하지만 이미 결론은 나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목초는 반드시 얻어 내야 한다.'
혼원단이라는 희대의 영약의 제조법을 손에 넣고서도 재료가 없어서 손가락을 빤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건 화산의 총력을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일이었다.
결심을 굳힌 현종이 청명을 바라보았다.
"청명아."
"예, 장문인!"
"할 수 있겠느냐?"
현종의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했다.
"이는 더없이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내 너에게 묻고 싶구나. 다치지 않고 무사히 자목초를 구해 돌아올 수 있겠느냐?"
청명이 입꼬리를 씨익 말아 올렸다.
"장문인."
"그래."
"저 청명입니다."
"……."
현종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속에 신뢰가 가득 차 넘실거린다.
'그래. 저 아이는 청명이지.'
화산에서 청명을 믿지 못한다면 누굴 믿겠는가? 저 아이는 이 화산을 이끌어 가는 아이다. 당연히 믿고 신뢰…….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그놈들 대가리를 다 깨 버리고 자목초를 가지고 돌아오겠습니다! 아니, 말이 되는 짓거리를 해야지! 우리가 황금을 내놓으라고 했나, 아니면 왕 자리를 내놓으라고 했나! 기껏 풀떼기 조금 가져간다는데 그걸 막아? 뒈지려고 아주 그냥! 주둥아리에 풀 쑤셔 박고 불 붙여 버릴라!"
"……."
신뢰는 얼어 죽을…….
어쩌다가 도문에 저런 것이 나서는.
파들파들 떨리던 얼굴을 진정시킨 현종이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현영."
"예, 장문인."
"최대한 빠르게 아이들을 준비시키거라."
"장문인?"
현영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러나 현종은 단호하게 말했다.
"청명이를 운남으로 보낼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청명을 가만히 보며 말했다.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자목초 밭을 아예 통째로 옮겨 와 버릴 테니까!"
"……."
왠지 운남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현종이었다.
"크흐흐흠!"
그때,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현영이 살짝 현종에게 눈치를 준다. 그 눈짓을 알아챈 현종이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 그럼 나는 잠시."
현영과 현종은 얼른 방을 빠져나와 전각에서 최대한 멀찍이 떨어졌다. 현종이 먼저 입을 떼었다.
"무슨 일인가?"
현영이 살짝 인상을 쓰며 말했다.
"또 아이들만 위험한 곳에 보내실 생각이십니까?"
"통솔할 이가 하나쯤 있으면 좋다는 것은 알고 있네.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저 아이들은 저들끼리 두었을 때……."
"그런 것 말고요."
"……응?"
현영이 영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애들을 그렇게 위험한 곳에 보내는데, 대책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거 먹입시다."
"그거?"
"혼원단말입니다! 혼원단!"
"……."
현종이 움찔한다.
"아, 아니. 자목초를 얻어 온다는 보장이 없으니 이 혼원단은 아끼……."
"장문인, 언제 그렇게 도둑놈이 되셨습니까?"
"도, 도둑놈?"
"그게 화산 겁니까? 청명이 놈이 구해 왔으니 청명이 놈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같이 구해 온 녀석들의 것이지요! 그게 뭐라고 지금 아끼려 드십니까! 그러다 애들이 다쳐 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현영의 눈이 불을 뿜는다.
아이들이 다쳐 오기라도 한다면 현종의 머리통을 뽑아 버릴 기세다.
"애들 먹이십시오. 그 혼원단."
"……."
"지금!"
"……."
"당장!"
아, 알았다고.
먹이면 되잖아. 먹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