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처맞으면 비키게 되어 있어! (3)
화산에 봄이 찾아왔다.
응? 봄은 이미 한참 전에 오지 않았느냐고?
아니, 아니.
지금 찾아온 봄은 그런 '봄'과는 달랐다. 그러니까 이게 어떤 봄이냐고 하면…….
"후후후후후후후."
"……."
"후후후후후후후후."
현영이 더없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곳저곳을 따뜻한 눈으로 돌아보고 다녔다.
원래 온화한 사람이었다면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평소에는 뭐 하나 책잡을 것 없나 눈이 시뻘게져 돌아다니던 사람의 이러한 변화는 화산의 제자들에게 공포감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후후후후. 돈이 남는다는 말이지. 그럼 이 전각도 새것으로 바꾸고. 흐흐흐흐흐."
"……."
현영의 몸에서 따사롭고 온화한 기운이 내뿜어진다.
그가 지나가는 곳마다 매화가 피어나는 것만 같다. 저러다 갑자기 도를 깨닫고 등선해 버리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허허허허."
"하하하하하핫!"
"장문인! 날이 너무 좋지 않습니까?"
우르르르릉!
"허허. 그래. 금방이라도 소나기가 올 것같이 먹구름이 밀려오는구나. 아름다운 광경이다. 날이 매일 이렇기만 하면 좋겠구나."
몰아치는 바람을 맞으며 현종과 현상이 크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들 역시 현영처럼 온화하기 짝이 없는 기운을 뿜어내며 화산 이곳저곳을 거닐었다.
더 공포스러운 것은, 그들이 그러다 마주치는 제자들에게 하나같이 따뜻하기 짝이 없는 시선을 보낸다는 점이었다. 심지어는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게 보일 정도.
"……."
아무래도 화산의 윗대들이 단체로 상태가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심지어 운암마저 피식피식 웃고 다닌다고 하니, 다들 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걱정할 수밖에.
'단체로 왜 저러시지?'
'좋은 일이 있는 건 알겠는데, 대체 얼마나 좋은 일이 있으면 저러시는 거지?'
일의 전모를 알지 못하는 화산의 제자들은 왠지 모를 찝찝함에 계속 시달려야만 했다.
그리고 그중 화룡점정을 찍은 이가 바로 청명이었다.
청명은 마치 배부른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느긋하게 산내를 누볐다.
거기까지야 그렇다 치는데…….
"응? 훈련을 빼먹었어? 괜찮아,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사람이 어떻게 매일같이 열심히 하냐. 쉬어, 쉬어. 쉬는 날도 있어야지."
"……."
"응? 내가 없는 사이에 단장애에 설치해 둔 줄들이 끊어졌는데, 보수를 안 해 뒀다고? 허허허허. 그럼 보수를 하면 되지. 시간 날 때 느긋하게 하라고. 혹시 다친 사람은 없어?"
"히이이이이이익!"
청명은 마치 온화한 선인(仙人)이라도 된 것처럼 사방으로 자애로움을 흘려 댔다.
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이대제자와 삼대제자들은 결코 청명처럼 여유로울 수가 없었다.
"……저 새끼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글쎄. 도무지……."
되레 더 불안하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안 하던 짓을 한다던데. 어디서 병이라도 걸려 온 거 아냐?"
"쟤가 병에 걸린다고? 쟤가? 병도 사람은 가리는 법이다. 병보다 청명이 놈이 더 독할 텐데."
"확실히 공감이 가는 말이로군."
평소의 청명 같았으면 훈련을 빼먹는 순간, 대가리를 깨 버리겠다고 난리를 쳤을 것이고, 단장애의 훈련 시설이 보수가 안 되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말한 이의 목에 동아줄을 묶어서 단장애에서 던져 버렸을 것이다.
그런 청명이 다친 사람이 없는지 걱정한다고?
'머리가 이상해졌나?'
'저건 절대 함정이다. 오늘이라도 당장 보수를 해야 해. 아니면 내일은 내 대가리가 깨질지도 모른다!'
'차라리 때리라고, 인마!'
이 공포스러운 변화를 참지 못한 화산의 제자들은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을 만한 사람을 다그치기로 했다.
"사형! 백천 사형! 대체 밖에서 무슨 일을 저지르고 돌아오신 겁니까!"
백상을 필두로 한 이대제자들의 방문에 백천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일은 무슨 일."
"아무리 봐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니, 이건 이상함을 넘어 수상하기까지 합니다!"
"청명이 놈이 다친 데는 없냐는 소리를 하고 다녔다고요! 그 마귀의 환생 같은 놈이!"
"……그건 확실히 놀랄 일이로군."
백천이 피식 웃어 버리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다들 기분이 좋으니 된 일 아니더냐."
"그렇지요. 그렇기는 합니다. 하지만 지켜보는 사람은 못내 불안하단 말입니다."
"불안해할 것 없다."
백천이 딱 잘라 말했다.
"이건 모두에게 좋은 일이고, 너희에게도 좋은 일이다. 다만 아직은 기밀을 요하여 너희에게 말해 줄 수가 없다."
"사형! 섭섭합니다. 저희를 못 믿으시는 겁니까?"
여기저기서 나오는 불만의 목소리에, 백천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러자 이대제자들이 움찔한다.
"뭐 불만이라도 있냐?"
"……."
백상의 얼굴이 푸들푸들 떨렸다.
'아니, 사람이 어쩌다가!'
'예전에 그 온화하던 백천 사형은 어디로 가고!'
'닮을 놈을 닮으란 말입니다! 닮을 놈을!'
백천이 고개를 삐딱하게 꺾는다.
"불만 있는 놈 또 있어?"
"……없습니다."
"쯧."
백천이 영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러고는 자신의 사형제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때가 되면 알려 줄 것이다. 궁금한 건 알겠지만 지금은 제 본분을 지키고 기다리면 된다. 알겠느냐?"
"예, 사형. 그런데……."
"음? 또 뭐?"
"무당 놈들은 어땠습니까?"
백상의 말에 백천이 살짝 입가를 뒤틀었다.
"사형이 무당의 진현을 꺾으셨다면서요!"
"무당의 진현이라면 천하에 이름 높은 검룡이 아닙니까! 그런 자를 사형이 꺾어 내다니요!"
백천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검룡은 강했지. 하지만 그 검룡이라는 이름에 그리 걸맞은 이는 아니었다. 너희 중에서도 검룡의 상대가 될 만한 이는 많을 것이다."
"에이, 사형이니까 그게 되는 거지. 저희가 언감생심."
"빈말이 아니다."
백천도 새삼스러운 얼굴로 사제들을 바라보았다.
'내가 말해 놓고도 괴이하군.'
어느새 화산이 이렇게나 강해졌다. 과거에는 종남 하나 어쩌지 못해서 벌벌 떨던 화산이 이제는 무당의 유망한 후기지수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게 다 그 망할 놈 덕분이기는 한데.'
"그럼 이제 사형이 그 검룡의 칭호를 가져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백천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 칭호만큼은 받고 싶지 않다."
"왜 그러십니까? 룡의 칭호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별호인데."
"……그 위에 화산신룡이 있지 않느냐."
"아……."
듣고 보니 그러네.
사숙과 사질이 한데 묶이는 건 그리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다. 아무리 저 사질 놈이 인간 같지 않은 놈이라고는 해도 말이다.
"여하튼 그런 허명 따위에 연연하지 말고, 수련에 박차를 가하거라.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 한다."
혼원단을 취했을 때에 완전히 제 것으로 만들려면 말이다.
백천은 굳이 그 뒷말을 붙이지 않았다. 아직 일이 무르익지 않았는데 괜히 설레발칠 필요도 없거니와, 제자들이 일제히 흥분하게 되면 말이 새어 나갈 위험도 있다.
물론 이 험한 화산 안에만 있는 제자들에게서 어디로 말이 새어 나가겠냐마는 지금은 돌다리도 두드리다 못해 쾅쾅 내리치고 건너야 할 때다.
"그런데, 사형."
"음?"
"그…… 청명이 놈이 무당의 장로와 맞붙어서 동수를 이뤘다는 말이 사실입니까?"
"……."
일순 백천의 눈썹이 파들파들 떨렸다.
"……나는 못 봤다."
"아, 그럼 역시……."
백천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사실 이건 자신의 입으로 말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대충 얼버무리는 쪽이 자존심이 더 상한다.
"동수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갔을 때, 둘이 한번 맞붙은 듯했고, 청명이 놈이 부상 없이 멀쩡했던 건 사실이다."
"……."
모두의 눈이 뒤흔들렸다.
"그럼 진짜……?"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래. 그건 말이 안 되지."
입으로는 말이 안 된다 하지만, 다들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괴물이면 정말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물론 상식적으로야 말이 안 되지만…….
백상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한다.
"그게 말이 안 되는데……. 아니. 잠깐만……. 생각해 보면 사형이 검룡을 쉽게 꺾었는데……."
거기 쉽게는 왜 추가됐냐?
"그런데 청명은 대사형을 가지고 노니까 가능할 것 같기도 하……."
으득.
백상이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것은 선명한 이 가는 소리를 들은 뒤였다.
그는 뒤늦게 살짝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돌린다. 이 가는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당연히 백천이 있었다.
이를 으득으득 갈아붙이며 백천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가지고 놀아?"
"……."
"흐음, 그렇군. 그렇게 생각했단 말이지?"
"사, 사형? 일단 좀 진정하십……."
"진정이라. 참 좋은 말이지.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다른 걸 해 보고 싶군. 그 가지고 논다는 게 어떤 건지 너희들도 한번 겪어 보는 게 좋겠어!"
다음 순간.
백천이 벼락같이 검을 뽑고 사제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사제들이 기겁을 하여 사방으로 달아났다.
"아니! 왜 하는 짓이 하필 그놈이랑 닮아 가냐고!"
"닮을 걸 좀 닮으시지!"
"으아아아! 사형! 검! 검! 진짜 베입니다!"
멀리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유이설이 고개를 내젓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렇게 화산 전체에 훈훈함(?)이 퍼지고 있을 때.
예상하지 못한 이가 화산을 방문했다.
"청명아!"
"응?"
"장문인이 지금 바로 오라신다!"
"나?"
"그래. 너랑 조걸이도."
윤종의 말에 청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장문인이 이리 급하게 찾을 이유가 있던가?
"가자."
이유는 가 보면 알 일. 청명은 두말없이 앞선 윤종을 따랐다.
셋은 빠른 걸음으로 장문인의 처소에 당도했다. 윤종이 입을 열었다.
"장문인. 윤종입니다. 청명과 조걸을 데리고 왔습니다."
"어서 들거라."
"예!"
윤종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뒤따라 장문인의 처소에 들어선 청명은 빠르게 안에 있는 이들을 확인했다.
특별할 것 없이, 평소의 그 사람들이다.
현종, 현상, 현영, 운암, 그리고 백천에 유이설까지.
그 외에 다른 사람이 하나 있다면…….
"오?"
청명을 마주한 은하상단의 상단주 황문약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소도장. 그동안 강녕하시었소?"
"와! 오랜만에 뵙네요! 별일 없으셨어요?"
"하하. 별일이랄 게 있겠소? 소도장의 도움으로 아주 편하게 지내고 있소."
"정말 그래 보이시네요. 좀 회춘하신 것 같은데?"
황문약이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모습은 과거보다 훨씬 더 젊어 보였다. 병상에서 일어나 건강을 되찾으며 혈색이 도는 것은 물론이고, 귀밑머리마저 거뭇거뭇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실로 회춘이라는 말이 과하지 않을 정도이다.
"일단 앉거라."
"예."
셋 다 질문 대신 일단 자리에 앉았다. 그제야 현종이 입을 열었다.
"말씀하신 대로 청명을 불러들였습니다. 어떤 말씀을 하시려는 게요? 은하상단주?"
현종의 말에 황문약이 침음성을 흘렸다.
"제가 이리 장문인을 직접 찾아뵌 것은 화산에서 저희 은하상단에 의뢰한 일 때문입니다."
"……혹여 문제가 있소?"
"문제라기보다는……."
황문약이 살짝 망설이는 듯한 얼굴을 보이더니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장문인."
그리고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인다.
"죄송합니다만, 지금 은하상단의 능력으로는 화산의 의뢰를 수행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응?"
청명이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뭔 소리야?
"……아, 아니 은하상단의 능력으로 안 된다고요?"
황문약이 고개를 들고는 쓴웃음을 짓는다.
"변명을 좀 하자면, 지금 화산의 의뢰는 은하상단뿐 아니라 천하의 어떤 상단도 해낼 수 없습니다. 어느 상단에 의뢰해도 마찬가지라는 뜻이지요."
어? 안 돼?
……그럼 내 혼원단은?
어라?
이러면 안 되는데?
"끄으으……."
청명의 눈에 이글이글 불타는 불꽃이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