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172화 (172/1,567)

172화. 처맞으면 비키게 되어 있어! (2)

혼원단에 대한 일은 아주 빠르게 진행되었다.

우선 혼원단에 필요한 재료를 사 모으는 일은 은하상단에 전적으로 맡기기로 했다. 은하상단이라면 정보를 다른 곳에 퍼뜨릴 일도 없고, 화산이 원하는 대로 은밀하게 일을 처리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화음에 있던 황종의가 급하게 화산으로 소환되었다.

"이, 이걸 전부 말입니까?"

내밀어진 종이에 써진 재료의 목록을 본 황종의의 얼굴에 경악이 어린다.

"이런 품목들을 대체 어디다 쓰시려고……?"

현영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리 놀랄 것 없소이다. 화산도 이제 슬슬 기틀이 잡혀 가니, 예전의 영단들을 다시 만들어 볼까 하는 것뿐이외다."

"영단이라 하시면?"

"자소단 외에 뭐가 또 있겠소?"

"아……."

현영의 입매가 살짝 비틀렸다.

은하상단을 완전한 외인이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화산의 식솔들과 같은 취급을 할 수도 없다.

'혼원단이라는 이름이 새어 나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일단은 최대한 그것을 감춰야겠지.'

평범한 이들이야 검총에 그저 신병을 얻으러 들어간 것이니 혼원단의 존재 자체를 모르지만, 개방과 무당에서 이 일을 알게 되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최대한 숨기는 게 맞다.

"그럼 이 물건들을 구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그렇소이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더 있소."

"부탁이라 하시면?"

현영이 살짝 침중해진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우리가 이런 물품들을 구한다는 말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으면 좋겠소이다."

"예? 어째서……?"

현영이 살짝 입에 침을 발랐다.

"강호는 무정한 곳이 아니외까. 지금 화산은 수많은 문파들의 이목을 끌고 있소이다. 이미 종남과 한번 거사를 치렀고, 이번에는 무당과도 가벼운 문제가 있지 않았소이까?"

"그렇습니다."

황종의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맞는 말이다. 화종지회에서 종남에게 개망신을 주며 드높아진 화산의 명성은 이번 남영행에서 다시 한번 그 가치를 강호에 증명했다.

화산의 제자들이 무당의 제자들을 상대로 완벽하게 승리했다는 사실은 물론이거니와…….

"저……. 한 가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말씀하시오."

"혹여 화산의 문하 분들이 검총에 들어 활약을 했다는 소문이 사실인지 궁금하여……."

"사실이외다."

"아……!"

황종의의 고개가 격하게 끄덕여졌다.

'그렇다면 확실히 이해가 가는구나.'

화산이 남영에서 한 활약에 대한 소문은 벌써 화음까지 퍼지기 시작했다.

검총이 무너지는 위기 상황에서 화산의 제자들이 중인들을 구해 내었다는 소문. 그리고 그 검총 안에서 천하에 이름 날린 이들을 여럿 꺾었다는 소문까지도.

특히나 그중에서도 어마어마하게 퍼지고 있는 이름이 바로 화산신룡 청명의 이름이었다.

화종지회에서의 활약으로 천하제일 후기지수라는 칭호를 얻어 내었던 청명은 지난 이 년간의 침묵으로 살짝 세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번 남영에서의 활약으로 그 명성은 다시 끝을 모르고 드높아지는 중이었다.

'무당의 장로와 동수를 이루었다는 말이야 과장된 소문이겠지만, 그런 말이 퍼질 정도로 신위를 보였다는 뜻이겠지.'

그렇다면 현영이 이 모든 일을 조심스럽게 추진하고 싶어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안 그래도 가공할 기세로 명성을 높여 가고 있는 화산이 자소단까지 다시 제작한다면 얼마나 더 강해지겠는가?

화산을 좋게 생각하는 문파든, 화산을 싫어하는 문파든 신경이 곤두서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장로님. 상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의지만, 고객의 뜻을 헤아리는 것 역시 그에 못지않게 중하다고 배웠습니다."

"허허허. 내 이래서 황 소단주를 신뢰하는 것 아니겠소?"

"그런데……."

"음?"

황종의가 살짝 걱정된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이 물품들을 모두 구하려면 필요한 재물이 한두 푼이 아닐진대……."

화산의 재정 상태를 빤하게 알고 있는 황종의다 보니 이 부분에 대한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현영의 반응은 그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아, 돈은……. 으헤헤!"

화들짝 놀란 황종의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안색을 멀쩡하게 수습한 현영이 슬쩍 고개를 돌리며 그 시선을 피했다.

잘못 들었나……?

황종의가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물었다.

"어, 그러니까 돈은……?"

"크흠! 돈. 그렇지 돈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오. 지금 바로 지불……. 크흡! 내가 돈을 지불할…… 테니까!"

황종의의 얼굴이 멍해졌다.

선불?

이 어마어마한 품목을 사는 돈을 선불로 지불하겠다고?

"아, 아니 그 많은 재물이 대체 어디서?"

"허허. 화산의 재력은 소단주께서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크흐흐흡. 훠얼……씬 뛰어나외다."

현영이 자꾸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억눌렀다.

'문파에 재신이 있는데, 돈이 무어가 문제 되겠는가! 낄낄낄낄!'

최대한 체면을 지키려고는 하는데, 도무지 치밀어 오르는 기쁨을 막을 수가 없다. 자꾸만 입꼬리가 씰룩거리고 경망스런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자, 여기."

현영이 옆에 놓인 함 하나를 슬그머니 황종의에게 내밀었다. 황종의가 상자를 얼결에 받으며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무엇입니까?"

"열어 보시오."

황종의가 조심스레 함을 열어 보았다. 이윽고 그 안에서 말 그대로 휘황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 이거?!"

황종의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이건 야명주가 아닙니까?"

"그렇소이다."

잠깐 말을 잃고 벙긋대던 황종의의 입이 이내 쩌억 벌어졌다.

"아니. 야명주가 어떻게 이리 많이……."

그 하나하나가 같은 크기의 보석보다 더 비싸게 취급되는 것이 야명주다. 그런데 그런 진귀한 물건이 이렇게나 많다니.

수많은 재물을 보아 온 황종의지만, 야명주를 이리 대량으로 보는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심지어 하나하나가 모두 최상급이 아닌가?'

그의 반응을 살피며 현영이 슬쩍 웃었다.

"소단주라면 그 물건의 가치를 알 것이라 생각하외다. 적당히 값을 매겨 주시오. 그거면 충분하겠소?"

황종의의 몸이 움찔했다.

상인으로서의 본능과 상인으로서의 도리가 그의 안에서 충돌하고 있었다.

'소탐대실을 해서는 안 된다!'

황종의가 살짝 입술을 깨물고는 재빨리 계산을 마쳤다.

"과합니다. 장로님. 일단 자세히 감정을 해 보아야겠지만, 이 절반으로도 말씀하신 품목을 모두 사고 남습니다."

"그렇소이까?"

현영이 미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 야명주의 가치는 이미 그도 알고 있다. 그저 황종의가 어떤 대답을 하는지 듣고 싶었을 뿐이다.

'아직은 믿어도 되겠군.'

황종의의 계산은 현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현영의 예상보다 좀 더 후하게 쳐준 편이다.

"그럼 이 야명주를 모두 처분하여 값을 치르고, 남은 것은 화산으로 돌려주십시오."

"제, 제게 이런 큰일을 맡기신다는 말씀이십니까?"

"하하하. 화산과 은하상단은 형제 같은 곳이 아니오. 은하상단을 믿지 못한다면 어딜 믿겠소?"

현영과 황종의가 슬쩍 시선을 교환했다.

뒤로는 서로 딴생각을 할지 모르나, 표면적인 시선에는 서로에 대한 신뢰가 가득했다.

"그럼 수수료는……?"

"양심적으로."

"……."

"양심! 양심적으로!"

거 날강도가 따로 없네.

"……그럼 그리하겠습니다. 자세한 감정을 마치는 대로 연통을 넣어 드리지요. 그리고 처분이 끝나는 대로 재물을 화산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럼 금전으로? 아니면 전표로?"

"금전이 좋겠소이다."

"예, 장로님!"

황종의가 재빨리 상자를 들어 옆구리에 꼈다.

"그럼 저는 한시라도 빨리 이 물건을 감정하고 판로를 알아보겠습니다."

"허어. 차라도 한잔하고 가시지 않고서요."

"재물을 보고 차가 넘어간다면 상인이 아니지요! 하루속히 좋은 소식을 들려드리겠습니다."

"내가 부탁한 것을 잊지 마시오."

"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물론 이 야명주의 출처도 세인들이 알 일은 없을 겁니다."

척하면 착이라고, 현영의 의도를 재빠르게 이해하는 황종의였다.

"그럼 살펴 가시오."

"강녕하십시오."

황종의가 후다닥 밖으로 나가자 현영이 살짝 입을 가렸다.

그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푸흣!"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터져 나온다.

"흐하하하하하핫!"

어깨춤이 절로 나온다.

"크하하하핫! 내가 그 복덩이 놈 덕분에 꿈에도 그리던 일을 직접 해 보는구나!"

화산을 찾아온 상인에게 거금을 넘겨주고 원하는 물품들을 사 오라 시키는 건 현영이 평생 동안 그리고 또 그리던 꿈이었다.

그런데 심지어 그 꿈이 상상 이상의 규모로 거대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크으, 이 예쁜 놈! 생각 같아서는 정말 용이라도 잡아다 구워 먹여야 하는데."

용은 구할 수 없으니 소 정도로 만족해야겠지.

흐뭇한 미소가 현영의 입가에 번졌다.

이윽고, 기쁨으로 넘실거리던 현영의 눈빛이 조금 진중해졌다.

'이걸로 화산은 다시 한번 그 날개를 펼칠 것이다.'

지금 화산에 가장 부족한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내공이었다.

무학이야 칠매검을 되찾으면서 어느 정도 급한 갈증을 풀었지만, 내공은 세월과 함께 쌓여 나가는 것. 재능과 훈련만으로는 벌어진 내력의 격차를 따라잡을 수가 없다.

이대제자와 삼대제자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 화산의 입장에서는 타 문파의 노고수들이 가진 어마어마한 내력이 가장 골치 아픈 문제였던 것이다.

하지만 혼원단을 제조해 제자들에게 먹일 수 있다면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그 문제를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화산은 다시 한번 도약이 가능해진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현영이 장문인의 처소로 향했다. 조금 전 있었던 일을 보고하려는 참이다.

"장문인 계십니까!"

대답도 듣지 않고 문을 열고 들어선 현영은 돌연 움찔하고는 멈춰 섰다.

"으, 으응? 왔느냐?"

"……."

"……."

현종이 손에 든 수건을 슬그머니 내렸다. 그의 앞에는, 얼마나 공들여 닦아 댔는지 반질반질하다 못해 광까지 나는 혼원단 상자가 놓여 있었다.

"……그리 좋으십니까?"

"크흐흠."

현영이 자신도 모르게 씨익 웃고 만다.

늘 제자들 앞에서 체통을 지키느라 좋아도 좋은 티를 내지 못하고 슬퍼도 슬픈 티를 내지 못하던 현종이다. 그런데 얼마나 좋으면 저 상자를 저리 닦아 대고 있겠는가?

"좀 안전한 데 숨겨 두십시오! 그러다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어떻게 합니까?"

"내 품이 화산에서 제일 안전한 곳이 아닌가?"

"……청명이 놈 품이 아니라요?"

현종이 입을 다물었다.

가만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고.

"여하튼 소단주와는 말이 잘 되었습니다. 물품은 생각보다 빨리 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 그래? 허허허허허. 거참 모든 일이 지금처럼 술술 풀리기만 하면 좋겠구나. 허허허허허허허."

서로를 마주보며 웃는 현종과 현영의 눈가에 눈물이 찔끔 배어났다.

불과 몇 년 전까지는 상상도 못 했던 광경이다. 그때는 이렇게 마주 앉을 때마다 서로에게 듣기 싫은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처럼 이리 시선을 마주하고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단 몇 년 만에 그들의 처지가 이리 바뀌어 버린 것이다.

"참 기이한 녀석입니다."

"도기(道器)지."

현영의 얼굴이 샐쭉해졌다.

"그런 도기가 어디에 있습니까?"

"허허허. 겉만 보지 말게나. 진중하게 선인의 길만을 따른다고 해서 도가 찾아오는 건 아닐세. 때로는 제 타고난 성정을 그저 지키는 것만으로도 도가 찾아오는 법이지."

"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시고! 이번에는 청명이 놈에게 뭘 주실 겁니까?"

"으……. 으응?"

"상이요! 상! 저만한 일을 해냈는데 상 하나 안 주고 넘어간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소도 여물을 줘야 일을 하는 법입니다! 제대로 거하게 상을 줘야 청명이 놈이 또 나가서 공을 벌어 올 것 아닙니까!"

"……."

"저번에 흐지부지 유야무야 넘어간 것, 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절대 그냥은 못 넘어갑니다!"

현종이 조금 떨떠름해진 눈으로 현영을 바라보았다.

"불만이 있는 건 아니라 그저 궁금해서 묻는 것이네만, 자네는 대체 누구 편인가? 나인가? 그 아이인가?"

"뭘 그런 걸 물어보십니까. 당연한 것을! 기분이 나쁩니다, 장문사형!"

현영의 격한 반응에, 현종이 살짝 누그러진 얼굴로 반성했다.

"……미안하네. 내 농이 지나쳤네. 우리가 함께한 세월이 있는……."

"당연히 청명! 그 아이지요! 막말로 장문인이 제게 해 준 게 뭐가 있습니까!"

"……."

아? 그쪽이야?

"내가 장문인 사탕발림에 재경각 맡았다가 이렇게 장가도 못 가고 폭삭 늙어 버렸는데! 장문인이 어찌 편을 논하십니까! 내가 장가도 못 가는 바람에 딸 하나 못 낳아서 저 청명이 놈을 사위로도 못 들이는데!"

"아, 아니. 나이를 생각해야지. 자네 딸이면 이미……."

"그럼 손녀라도 있겠지!"

현영이 숫제 버럭 하며 삿대질을 해 댔다.

"여하튼 내 이번에는 절대 그냥은 못 넘어가니까! 어떤 상을 내리실 건지 확실하게 하십시오! 그 혼원단도 원래는 청명이 거 아닙니까! 왜 장문인이 그걸 자기 것인 양 그렇게 품고 있습니까! 일단 그놈한테 한 알 먹이고! 그 다음에……!"

벌컥!

어느새 소리를 듣고 박차고 들어온 현상이 현영을 냉큼 밖으로 끌어냈다.

"뭐! 왜 또! 놔 봐! 장문인! 제 말을 잘 생각하십시오! 장문인! 그거 그냥 낼름 삼키면 내가 대가리를……. 읍! 읍읍! 으으으으읍!"

쿵!

문이 거칠게 닫히는 바람에 불어온 바람이 현종의 머리카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허……. 허허."

현종이 멍하니 웃음을 터뜨렸다.

"좋은 일이지. 아암, 좋은 일이야."

그런데 이상하게 요즘 들어 내 권위가 좀 많이 사라진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