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처맞으면 비키게 되어 있어! (1)
"검총을 만든 게 약선이었단 게로구나."
백천으로부터 모든 설명을 들은 현종은 놀라움이 여실히 드러나는 얼굴로 앞에 놓인 상자를 바라보았다.
'혼원단이라니.'
의심의 여지도 없다.
향을 맡은 것만으로도 단전이 꿈틀거리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이 상자가 백천이 말한 곳에서 나왔다면 더더욱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누가 그런 곳에다가 가짜를 만들어 두겠는가?
약선이 아니면 그럴 사람이 없고, 청명이 아니라면 찾아낼 사람도 없다.
그나저나.
현종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무당의 허산자와 동수를 이루었다고?'
조금은 과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 허산자와 승부를 겨루어 패하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허허허허."
헛웃음이 나온다.
과연 현종은 무당의 장로와 싸워 동수를 이룰 수 있을까?
황당하기까지 한 강함이다.
하나, 현종이 진정으로 놀란 것은 청명의 강함 때문만이 아니었다.
청명의 무력이야 사실 이미 현종도 이해하기를 포기한 지 오래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가 진정으로 놀란 까닭은, 약선의 안배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약선의 무덤을 찾아낸 청명의 심계였다.
현종조차도 두어 번 설명을 듣고서야 어찌하여 그곳에 약선의 무덤이 있어야 하는지를 이해했다. 그런데 청명은 홀로 단서를 파악하고 약선의 무덤을 찾아냈다는 뜻이 아닌가?
'과거 은하상단 사건 때부터 이 아이가 무척이나 영민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그때, 슬쩍 혼원단이 든 상자를 바라본 현영이 입을 연다.
"그러니까 그럼……."
현영이 현종의 손에서 상자를 거의 빼앗듯 채어 갔다. 손이 허전해진 현종이 괜한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지만, 현영의 마음도 충분히 짐작하기에 그저 입을 꾹 다문다.
"그, 그럼 이, 이게 그 약선의 혼원……. 그러니까? 그 혼원단?"
"……네."
"약효로는 대환단도 한 수 접어 줘야 한다는 그 혼원단?"
"……네."
현영이 멍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본다.
입을 뻐끔대는 현영의 얼굴이 그 짧은 시간 사이에도 수차례 변했다.
"지, 진짜 재, 재신이라도 붙었나? 대체 뭐 어떻게 생겨 먹은 놈이 밖에만 가면 이런 걸 물어 오는 거지?"
물어 오다니!
내가 개도 아니고!
"허, 허어……. 너 또 어디 나갈 일 없느냐?"
"……."
"아니, 아니지! 아니야! 이런 공을 세운 놈인데 사흘 동안 입에 고기만 처넣어 주어도 모자랄 판에 또 밖으로 돌리려고 하다니! 가자! 가자, 이놈아! 내가 돼지를 잡아 주마! 아니, 내가 소라도 잡아 주마! 혼원단을 물어 오는 놈한테 뭘 못 잡아 주겠느냐!"
운암이 식은땀을 흘렸다.
"지, 진정하십시오, 장로님!"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느냐! 이런, 미친. 혼원단이라니! 세상에 뭐 어떻게 생겨 처먹은 놈이기에 남영에 보내 놨더니 혼원단을 가져와? 북해에 보내면 여의주라도 물어 오겠네! 장문인! 바깥에 또 할 일이 없습니까?"
당장이라도 청명을 꽁꽁 묶어서 북해로 보내 버리겠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 눈빛에 어린 새파란 살기를 느낀 청명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허어, 혼원단이라니."
현상 역시 도무지 믿지 못하겠다는 듯 연신 상자와 청명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찌 놀랍지 않겠는가?
혼원단과 검총은 그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화영문의 일을 해결하라고 보냈더니 이런 어마어마한 짓을 벌이고 돌아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현종이 무거운 목소리로 상황을 정리했다.
"너희가 고생이 많았구나."
"아닙니다. 장문인 화산의 제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하나!"
그 순간 현상이 조금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백천을 질책했다.
"아무 일이 없었으니 다행이긴 하나, 이번에는 너희가 너무 경솔했다."
백천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혼원단을 얻고, 혼원비결을 찾아내었으니, 더없는 공을 세웠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그 와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참변을 당했다면 너희는 지금처럼 웃고 있지 못했을 것이다."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상의 말이 맞다. 검총 안에서도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기지 않았던가? 그곳에서 무사히 빠져나온 것은 반쯤은 요행이었다.
"제자,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잔소리라고 생각하지 말거라. 나는 저런 영단 따위보다는 너희의 안전이 몇 배는 중요하다."
그러자 듣고 있던 현영이 콧김을 뿜었다.
"사형이 그렇게 말해 버리면 저랑 장문인이 뭐가 됩니까?"
현종이 눈을 크게 뜬다.
아니, 나는 왜?
가만히 있는 나는 왜 끌고 들어가나?
"이, 일단 사제는 좀 진정하게나."
현종의 말에 현영이 뭔가 더 할 말이 남았다는 듯 입술을 달싹거린다. 하지만 결국에는 장문인의 권위를 존중한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현종이 슬며시 그가 든 혼원단 상자를 잡아당겼다. 현영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현종이 살짝 눈을 부라리자 그제야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상자를 넘긴다.
"크흠."
현종이 낮게 헛기침을 하고는 슬그머니 상자를 뒤쪽으로 빼놓는다. 한창 돈독이 오른 저놈이 다짜고짜 이걸 팔아먹을지도 모른다.
"백천아."
"예, 장문인."
"너희들이 이 귀물을 손에 넣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이 더 있느냐?"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화영문에도?"
"예, 장문인.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현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구나."
보물은 피를 부른다.
혼원단을 손에 넣었다는 것이 알려지면 수많은 이들이 화산을 노리려 들 것이다. 심지어는 화산이 혼원단을 제조해 내기 전에 습격하여 혼원비결을 손에 넣으려는 이들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약선의 존재를 아는 이들이 많지 않다는 점이구나.'
그곳에 모인 대부분은 오로지 신병에만 관심을 가진 이들이었다. 약선의 존재를 알고 있던 이들은 딱 둘.
'무당과 개방.'
구파일방에 속해 있는 두 문파가 혼원단의 존재를 알았다고 해서 다짜고짜 화산을 습격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은근히 방해를 해 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화산이 몰락할 당시 믿었던 구파 어느 곳에서도 도움을 받지 못했단 걸 아는 현종이다 보니 그들에 대한 믿음은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아직은 우리가 혼원단을 손에 넣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정보가 새어 나가는 것만 조심한다면 문제는 없을 것이다.'
화산이 험준한 산속에 있다는 것이 이럴 때는 썩 도움이 되었다. 객이 쉴 새 없이 왕래하는 무당이나 소림이라면 혼원단의 제조를 숨기는 게 예사가 아니었을 테니까.
현종이 상자를 열고는 혼원비결을 꺼내 들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혼원단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다.
"선인이 도우셨구나."
청명이 그 말에 웃고 말았다.
현종을 비웃은 것이 아니다. 이번은 정말 '선인(先人)'이 도운 것이나 다름없다. 청명이 과거 청문과의 일을 꿈으로 다시 보지 않았더라면 절대 약선의 무덤을 찾아낼 수 없었을 테니까.
"크흠, 그러나!"
응?
청명의 의아한 시선을 받으며, 현종은 슬그머니 혼원단이 든 상자를 앞쪽에 내려놓는다.
"네 말을 들어 보면 약선은 누군가 자신의 전인이 되어 혼원단을 이어 주기를 바란 것 같은데, 이걸 우리가 사용하는 것이 과연 도리에 맞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
청명이 날름 혼원단 상자를 챙겨 들었다.
"그럼 제가 얼른 가서 팔아먹고 올게요."
"에헤이! 에헤이!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화들짝 놀란 현종이 재빨리 말을 바꿨다.
"그런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화산이 혼원단을 부활시켜 정도 문파로서의 소임을 다한다면 약선도 선계에서 기뻐하시겠지!"
쌍욕 치고 있을 것 같은데?
정말 선계라는 것이 있고, 선인들이 그곳에 모여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다면 아마 지금쯤 약선은 화산을 향해 쌍욕을 쉴 새 없이 내뱉고 있을 것이다.
뭐, 물론 그러다가 청명의 사형제들에게 몰매 맞고 조용해졌겠지만.
장문사형. 쪽팔리게 지지 마쇼!
현종이 생각을 정리하겠다는 듯 가만히 눈을 감았다. 청명도 이번에는 재촉하지 않았다. 갑자기 혼원단과 혼원비결이 뚝 떨어진 셈이니, 장문인으로서는 그 혼란스러움을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이다.
"우선은 확인부터 해 봐야겠지."
마침내 현종이 운암을 향해 묵직하게 말했다.
"의약당주를 데리고 오거라."
* * *
사라락.
책장이 넘어간다.
의약당주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혼원비결을 확인했다. 화산에 있는 이들 중에서는 의약당주 운각(雲覺)이 연단에 가장 조예가 깊다. 그러니 그가 확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으으으음."
운각의 입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올 때마다 지켜보는 이들의 속이 타들어 갔다.
"거, 책 하나 읽는데 더럽게 오래 걸리네!"
참다못한 현영이 역정을 내자 현상이 눈을 부라려 그를 나무란다. 현영이 못마땅한 얼굴로 구시렁대며 목소리를 낮췄다.
물론 읽는 운각도 미칠 노릇이었다.
갑자기 불려 와 책자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당황스러운데, 비결을 확인하는 내내 현자 배, 운자 배, 백자 배에 심지어 청자 배까지 이글거리는 눈으로 이쪽만 주시하고 있지 않은가.
공자님이 돌아오셔도 이런 상황에서는 집중하여 책을 읽지 못할 것이다.
하나, 이런 상황을 해결해 주어야 할 장문인 현종조차도 철판을 뚫어 버릴 것 같은 눈빛으로 그를 보고 있으니 뭘 어쩌겠는가.
"자, 장문인."
"그래? 어떠냐?"
"이, 이건 확실히 혼원단의 비결이 맞는 것 같습니다. 연단의 이치가 맞아떨어집니다. 군데군데 저는 상상도 하지 못할 고차원적인 비술이 들어가 있긴 하지만……."
"하지만?"
운각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말했다.
"굳이 이해하지 않아도 이곳에 나와 있는 연단법을 충실히 따르기만 하면 혼원단을 제조할 수 있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오!"
현종이 더없이 기껍다는 눈으로 운각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는 건?
"만들 수 있다는 것이더냐?"
운각이 당연히 그렇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무립니다."
"……."
끝내 현영의 이마에 핏대가 선다.
"아니, 이놈이 지금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지, 진정하십시오, 사숙! 아니, 장로님."
운각이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
"제 능력으로 혼원단을 만드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이 혼원비결만 있다면 연단을 웬만큼 아는 이라면 누구라도 혼원단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뭐가 문제냐? 능력이 있는데 못 만들어 낼 게 뭐가 있어!"
"아, 아니 그게……."
운각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혼원단을 만들기 위한 재료들이 말도 안 되게 비쌉니다."
어?
돈?
짜증이 확 올라있던 현영의 표정이 재빨리 평온을 되찾는다.
다른 건 몰라도 돈 이야기라면 진지해질 수밖에 없는 현영이었다.
"혼원단을 대량으로 만들어 내려면 화산을 통째로 내다 팔아야 할 지경입니다. 화음에 있는 사업체들을 모조리 정리해도 불가능할 겁니다."
현영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뭔 놈의 영단이 그리 비싸단 말이냐!"
"여, 영단은 당연히 비쌉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돈이 흘러넘치는 소림도 대환단은 몇 알 못 만들지 않습니까?"
"……."
"이 정도 재료라면 최상급의 영단치고는 굉장히 저렴하게 만들어 낼 수 있는 겁니다. 약선씩이나 되니까 이런 재료로 혼원단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거지, 다른 이들이라면 열 배를 들여도 어렵습니다."
현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니까. 결국은 돈이 없어서 못 만든다는 거냐?"
"그렇습니다."
"대체 얼마나 비싸기에 그러는 것이냐? 화산도 이제는 돈이 부족한 문파는 아니다."
"그러니까……."
운각과 함께 대충 재료의 값을 매겨 본 현영의 눈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어, 얼마? 어……."
금방이라도 거품을 물고 쓰러질 것 같던 현영이 현종을 향해 삿대질을 해 대기 시작한다.
"장문인! 그, 그 망할 비결인지 나발인지 당장 가져다 버리십시오! 그 망할 것 때문에 화산이 망할 겁니다! 약선인지 나발인지 그 늙은이는 노망이 났던 게 틀림없습니다! 이건 보물이 아니라 독입니다, 독!"
현종이 망연한 얼굴로 현영을 바라본다.
"그렇게나 어렵더냐?"
"어려운 정도가 아닙니다! 지금 화산의 소출로는 한 알도 만들기 어렵습니다. 저걸 만들려면 화음의 모든 재산을 처분해야 하는데, 그건 화산을 좀먹는 일입니다! 싸움 잘하는 거지를 어디다 씁니까!"
그거 개방이 들으면 좀 섭섭해하겠는데?
현영은 아예 게거품을 물 기세로 반대하고 나섰다.
"이건 절대 안 됩니다! 고수 하나 만들어 보려다가 기껏 다시 세운 화산의 기둥뿌리가 뽑혀 나갈 겁니다! 재경각주로서 절대 허가할 수 없습니다."
"끄으응."
현종이 앓는 소리를 내었다.
또 그놈의 돈 때문에 화산이 다시 한번 도약할 기회를…….
그때 가만 듣고 있던 청명이 태연하게 말했다.
"아, 그건 괜찮아요."
"응?"
청명이 현영을 돌아본다.
"돈이 문제라는 거죠?"
"그, 그렇지?"
청명이 씨익 웃었다.
"그럼 괜찮아요."
"……대체 무슨 소리를?"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청명은 자신의 앞섶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돌연 옷을 좌우로 쫙 벌린다. 그러자 그의 가슴팍에서 뭔가 둥글둥글한 것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바닥에 떨어진 것들을 확인한 현영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야, 야…… 야명주? 이, 이게 다?"
청명이 씨익 웃는다.
"우린 부자니까."
"……."
말없이 멍하니 청명을 바라보던 현영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진짜 재신(財神)이네?"
알면 알수록 알 수가 없는 놈이 청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