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그래도 나는 함께 걸어간다. (5)
"늦는구나."
현종의 미간이 절로 좁아졌다.
남영에서 온 연통대로라면 이미 당도를 하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검총이라니.'
현종이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고 말았다.
'욕심인 것을.'
화영문주의 말대로라면 아마도 남영으로 갔던 제자들도 검총에 들었다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나온 모양이었다.
검총이 얼마나 위험한 곳이었는지를 전해 들은 현종은 저도 모르게 그런 곳에 왜 들었느냐고 역정을 내고 말았다.
그러나 이내 그들이 왜 위험을 무릅쓰고 검총에 들었는지를 생각하니 그저 미안할 뿐이었다.
"장문인."
"으음?"
현상의 부름에 현종이 고개를 돌렸다.
"아이들을 단단히 나무라셔야 합니다."
"음."
현상의 얼굴은 살짝 굳어 있었다.
"저도 그 아이들이 못마땅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저희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문파입니다. 과거의 영광은 영광일 뿐, 지금은 그저 다시 시작하는 문파에 불과합니다."
"그렇지."
"그런 저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아이들입니다. 문파에 이득을 안겨 주는 것보다 자신들의 안전이 몇 배는 중요하다는 것을 아이들도 알아야 합니다."
현종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분은 내 단단히 일러두마."
곁에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운암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공에 대한 칭찬도 반드시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번에 그 아이들이 너무 많은 것을 해냈습니다."
"그렇지, 그렇지. 그 역시 맞는 말이지."
목소리의 크기가 다르다.
아이들을 나무라야 한다는 부분에서는 침울하던 현종이 아이들을 칭찬해야 한다는 부분에서는 절로 들떠 목청을 키우고 있었다. 현상이 그 광경을 보며 쓴웃음을 머금는다.
'하기야 그 아이들이 너무 대단한 일을 해내기는 했지.'
그 무당과 싸워 이겼다.
그리고 그 위험한 검총에 들어가고서도 무사히 살아 돌아왔다. 현상이 화산에 입문한 뒤로 단 한 번도 화산이 이런 큰일을 해낸 적이 없었다.
화종지회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 화종지회는 어쨌든 화산의 안에서 벌어진 일이다. 때문에 믿지 않는 이들도 많지 않았던가.
어쨋든 화산의 제자들이 화산을 나가 강호에 당당히 그 이름을 떨쳤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거의 몰락할 뻔했던 화영문을 다시 재건하여 화산 속가의 명맥을 이어 갈 수 있게 된 것도 굉장한 공이었다.
현상조차도 그 소식에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를 지경인데 장문인은 오죽하겠는가?
현종이 자꾸만 산문 쪽을 힐끔거린다.
항상 묵직하게 무릎 위에 얹혀 있던 그의 손이 오늘따라 갈피를 잡지 못하고 꼼지락대고 있다.
현상이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좋으시겠지.'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이번 일로 이득을 보았기 때문에 즐거운 게 아니다. 화산의 제자들이 강호에 나가 화산의 이름을 떨치는 모습이 더없이 기꺼운 것이다.
몇 년 전만 해도 본산마저 잃을 처지에 놓이지 않았던가.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복에 겨운 지경이다.
'청명이 정말 많은 것을 바꿨구나.'
이 모든 것을 청명 홀로 이뤄 낸 것은 아니다. 현상은 다른 이대제자와 삼대제자들의 노력 또한 무척이나 컸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노력을 하게끔 만든 이가 청명이다.
잔잔한 호수에 던진 돌이 파문을 일으키듯, 청명의 존재가 화산이라는 고여 있던 물에 커다란 격랑을 일으킨 것이다.
'비유하자면 호수에 던진 돌멩이라기보다는 연못에 떨어진 바위덩어리에 가깝겠지.'
연못의 형태를 완전히 바꿔 놓았으니 말이다.
"현영은 어디에 갔느냐?"
"……장문인께서 언제 애들이 도착해도 연회를 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라고 시키셨잖습니까."
"아, 그랬지 참."
"부디 고정하십시오. 그리고 현영도 장로가 아닙니까. 장로에게 자꾸 그런 사소한 일을 맡기시면 문파의 위신이 서지 않습니다."
현종이 황당하다는 눈으로 현상을 바라보았다.
"운자 배에게 시키라는 것을 그놈들 못 믿는다고 제가 간다는 데, 내가 무슨 수로 말리라는 게냐?"
아, 그랬나?
"애들 맛난 것 먹여야 한다고 신이 나서 가는데, 그걸 누가 어찌 막겠느냐."
"……죄송합니다."
그건 몰랐지.
현영을 떠올린 현상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자금의 압박에 시달려 다 죽어 가던 예전의 현영을 생각하면 지금 모습이 훨씬 낫기는 하지만…….
'좀 과하지 않은가?'
요즘 화산을 보면 뭔가 중도가 없는 느낌이다. 장로든 제자든 말이다.
"음!"
돌연 현종이 살짝 눈을 크게 떴다.
"저기 오는 것 아닌가?"
"아……."
현상이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에게도 누군가가 빠르게 접근하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오는 모양입니다."
"허허허. 뭐가 그리 급하다고 저리 바지런히 달려오는지 모르겠군."
현종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산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제자들이 복귀한다고 하여 장문인이 일일이 마중을 나가는 것은 격에 맞지 않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현종은 딱히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는 이였다.
기쁨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던가?
현종이 산문 앞에 서자 지나던 제자들도 산문으로 살짝 모여들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무슨 일이 벌어질 거라는 것은 눈치챈 것이다.
현종은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이제는 화산에도 제자들이 모여 성과를 거두고 온 이들을 축하해 주는 날이 온 것이다.
빠르게 접근한 이들이 산문 코앞까지 당도한 것을 느낀 현종은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서 돌아오너라. 고생이 많았구……."
콰아아아아아아아앙!
"뭐, 뭐야!"
"습격인가!"
현종의 따뜻한 인사는 말 그대로 박살이 나 버린 산문에서 터진 폭음에 깔끔하게 묻혀 버렸다.
산산조각 나 버린 산문을 보며 현상의 눈가에 뿌연 습기가 차올랐다.
'새로 지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리고 그 박살이 나 버린 문으로 괴이한 몰골의 무리들이 밀려들어 온다.
"헉?"
현상은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삼키며 검을 움켜잡았다.
하지만 이내 현상은 박차고 들어온 이들이 화산의 제자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워낙 몰골이 꾀죄죄해서 순간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뭔 전쟁터에라도 다녀왔나?'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두 눈에 핏발이 선 채 달려 들어오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니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다.
하지만 당황한 그와 다르게 현종은 장문인다운 품격을 유지했다.
그가 살짝 양팔을 벌리고는 푸근한 미소를 짓는다.
"다들 고생이 많았구나. 어서 돌아오……."
"장문인!"
선두의 청명이 뭔가 울컥하는 듯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현종의 품 안으로 뛰어든다.
"허허허허."
현종이 더없이 기껍다는 듯 너털웃음을 지었다. 공을 세우고 온 제자가 마치 오랜만에 아비를 보듯이 정을 표현하는데 싫을 장문인이 어디…….
"으라차아아아!"
응?
너 뭐 하니?
하지만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현종에게 달려든 청명이 그를 냅다 들어 어깨에 얹더니 장문인의 처소 쪽으로 닥치고 달리기 시작한다.
"뭐, 뭐 하는……!"
현상이 놀라 막 제지하려는 찰나였다.
불쑥!
응?
그의 시야에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배, 백천아! 이게 뭐 하는, 어? 어엇!"
하지만 백천은 두말없이 현상을 들쳐 메더니 청명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어안이 벙벙하여 옆에 멍하니 서 있던 운검도 어느새 윤종의 어깨에 올라타는 신세가 됐다.
그렇게 세 사람이 미친 듯이 장문인의 처소 쪽으로 질주하기 시작하자 놀란 화산의 문도들이 뒤따라오려 했다.
하나.
챙! 챙!
검을 뽑아 든 조걸이 눈을 부라리며 사형제들을 위협한다.
"가까이 오지 마. 접근하는 것들은 썰어 버릴 테니까."
"……."
조걸이 위협을 하고 유이설이 뒤를 받치자 감히 접근하려는 이들이 없었다.
뭔가 말을 하려는 이들도 반쯤 돌아가 버린 조걸의 눈을 보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왜 저런대?'
'어디 하루 이틀입니까?'
'적당히 하자. 제발 적당히 좀!'
조걸과 유이설이 뒷걸음질로 먼저 간 일행을 따라가자 누군가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저 미친놈들이 하다 하다 장문인까지 납치하네."
그 누구도 '미친놈'이 '미친놈들'로 변해 버린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 * *
"이, 이, 이……. 이, 이……. 이? 이게 뭐라고?"
상자를 잡은 현종의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그의 옆으로는 그와 함께 납치(?)되어 온 현상과 운암이 앉아 있었고, 그의 앞으로는 상거지 꼴이 되어 버린 청명과 그 일행이 퍼질러져 있었다.
"끄으으으으……."
"죽을 것 같다……. 진짜 죽을 것 같아."
본디 장문인 앞에서는 의관을 정제하고 반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지만, 이들에게는 그럴 만한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유?
간단하다.
'세상 모든 놈들이 도둑놈으로 보였어.'
'빌어먹을, 바로 옆에 혼원단이 있다고 생각하니 잠도 안 오더라.'
'어깨 부딪혔다고 칼부림 날 뻔했네.'
혼원단이 어떤 보물인가?
강호에서는 한 알의 혼원단을 천금과도 바꾸지 않는다. 말 그대로 무가지보(無價之寶).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물이다.
더구나 그들이 얻은 것은 겨우 혼원단 따위가 아니었다.
혼원비결(混元祕訣)!
그 혼원단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비법까지 손에 넣지 않았던가?
혼원단이 아무리 대단하다고는 하나 혼원비결에는 비할 수 없다. 만일 화산이 혼원비결을 손에 넣었다는 말이 밖으로 나돌기라도 한다면, 지금 당장 완전 무장을 하고 화산으로 쳐들어올 이가 한둘이 아닐 것이다.
결국 화산의 제자들은 혼원비결을 얻었다는 사실을 감추면서 전전긍긍 길을 떠나야 했다.
문제는 그런 귀한 보물을 가지고 다니다 보니 멀리서 사람만 보여도 경기를 일으키게 되어 버렸다는 점이다. 그나마 혼원비결이 청명의 품 안에 들어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청명이 없었다면 칼부림이 몇 번 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신경이 극도로 곤두선 상황이 지속되니, 화산의 제자들은 차라리 어떻게든 빨리 화산에 당도하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이곳까지 쉼없이 전력으로 달려온 것이다.
"이, 이 물건이 뭐라고 했느냐?"
"혼원단이요."
"호, 혼원……. 혼원단? 혼원다아안? 이, 이게 그 혼원단이라는 말이더냐? 그 약선의 혼원단?"
"네. 그리고 혼원비결이라고, 연단법도 같이 들었어요."
"여, 연단? 연단법?"
현종의 눈이 점점 돌아갔다.
'지금 이 녀석들이 뭐라고 하는 거지?'
약선?
이백 년 전의 그 약선 말인가? 그 약선의 혼원단과 혼원단의 연단법을 구해 왔다고?
대체 어떻게?
"이, 이게 무슨……. 아니, 이게 대체 무슨……."
탈검무흔이 약선의 다른 정체이고, 검총이 어떤 곳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현종으로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 아니, 마른하늘에 금벼락을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난데없이 혼원단과 혼원비결이라니.
"일단 확인해 보세요."
현종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딸깍!
상자가 열리는 소리와 함께, 청아하기 짝이 없는 향이 순식간에 방 안을 가득 채운다.
"오오오오!"
"세, 세상에!"
현상과 운암에게서 평소 볼 수 없던 격한 반응이 튀어나왔다. 현종 역시 격정을 감추지 못하며 상자 안을 훑었다.
"이. 이게……. 이게 정말……."
장문인의 눈에 뿌연 물막이 차오르던 바로 그 때였다.
벌컥!
"히익!"
"으아아! 놀래라!"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온다.
"아니, 왔으면 얼른 밥부터 먹게 해야……."
현영.
그는 하던 말을 멈추고 현종의 손에 들린 상자와 청명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윽고 세상에서 가장 푸근한 미소를 짓는다.
"또 뭘 벌어 왔느냐?"
"……."
이 깜찍한 것 같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