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그래도 나는 함께 걸어간다. (4)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찾았다! 찾았다고!"
"혼원단이다! 이런, 미친! 혼원단이 여기에 있었어!"
백천이 뒤로 넘어가는 청명에게로 부리나케 달려들었다. 그러더니 청명이 아닌 혼원단이 든 상자를 재빨리 움켜쥐었다.
첨벙!
청명이 물 쪽으로 쓰러졌지만, 누구도 청명 따위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반쯤 돌아간 눈으로 오로지 혼원단이 든 상자만을 확인할 뿐이었다.
"혼원비결이면, 이게 혼원단의 연단법이 틀림없겠죠? 그렇죠, 사숙?"
"그렇겠지! 설마 다른 것이겠느냐! 으하하하하하하! 결국에는 이걸 찾아내는구나!"
"으아아아아아! 장문인! 저희가 해냈습니다! 으하하하하핫!"
"쉿!"
그때 유이설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더니 작게 말했다.
"사형. 아직 누가 있을지도 몰라요, 주변에. 보물은 화를 부르니까. 우리가 찾아낸 거, 누가 들으면 안 돼요."
"아, 그렇지."
백천이 재빨리 입을 닫고는 혼원단의 상자도 닫아 버렸다.
주변에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는 법이다.
"이제 이거 어떻게 합니까?"
"그, 그러게?"
"화산으로 가져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야지? 그래야겠지?"
천하의 백천조차도 지금 이 순간만은 당황을 감출 수가 없었다. 갑자기 저놈이 성큼성큼 산을 오르더니 상상도 못한 곳에서 혼원단이 든 상자를 쑥 뽑아 버렸다.
당황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상황이 아닌가?
"청명아. 이놈아. 진짜 잘했……. 응? 청명아?"
그제야 물에 반쯤 잠긴 채 거품을 물고 쓰러진 청명을 발견한 백천이 화들짝 놀라 달려간다.
"야, 이놈아! 왜 이러고 있느냐?"
"끄으으으."
겨우 정신을 차린 청명이 몸을 파르르 떨며 백천을 노려보았다.
"사질이 쓰러지는데! 사질은 냅두고! 영약만 홀랑 챙겨 가?"
"……네가 쓰러지는 게 상상이 가야 말이지."
"내가 말을 말아야지."
청명이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옷이 완전히 젖어 버렸지만, 그런 건 아무 상관없다.
"이리 내!"
청명이 백천에게서 혼원단이 든 상자를 빼앗듯이 받아 든다. 그러더니 심호흡을 하고 조심스레 상자를 열었다.
다시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향이 퍼져 나간다.
'이건 무조건 진품이다.'
보통 영단에서는 이런 향이 나지 않는다. 과거 화산의 최상급 영약이었던 자소단에서도 이토록 맑은 향은 나지 않았다. 이건 가짜를 만들려야 만들 수가 없는 물건이다.
"후우. 후우. 후우."
청명이 격하게 심호흡을 계속하며 혼원비결을 꺼내고는 상자를 다시 닫는다. 상자는 품 안에 대충 쑤셔 박은 뒤 혼원비결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연자(連子)에게."
"오오!"
"오오오오!"
화산의 제자들이 다들 감동 가득한 목소리로 청명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나의 안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고, 이곳에 도달한 이라면 나의 진전을 이을 자격이 있다. 혼원의 연단과 의술은 세상의 수많은 이들을 구원하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 연자라면 나의 뜻을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오오오오오!"
"지, 진짜 혼원단과 혼원비결이구나!"
청명이 책을 덮었다.
그 외에도 몇 가지 전하는 내용이 있었고, 그 뒤로는 혼원단의 제조법과 약선이 평생을 걸쳐 이룩한 연단과 의술에 대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약선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이렇게까지 공을 들인 안배가 설마 그가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성향을 가진 인간의 손에 들어갈 것이란 건.
"낄낄낄낄낄."
웃음이 난다.
절로 웃음이 난다.
"이히히히히히히히힛!"
청명이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며 상자를 꺼내 혼원비결을 다시 넣었다. 그리고 품 안에 상자를 쑤셔 박고는 옷을 단단히 동여맸다.
챙겨 넣은 야명주들과 상자 때문에 가슴팍이 울룩불룩 튀어나와 우스꽝스러운 몰골이 되었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마음은 전에 없이 이리도 훈훈한데!
"허허허허허. 기분 같아서는 종남 장문인이랑 술도 한잔하겠네."
크으. 한잔 받으쇼. 인생이 다 그런 거지!
뭐? 매화검법? 아아, 괜찮아. 괜찮아. 니들 그거 어차피 제대로 쓰지도 못하잖아? 낄낄낄낄.
"청명아 이제 혼원……."
"으히히히힛!"
"아니. 혼원……."
"크하하하하핫!"
백천이 고개를 내저었다.
'맛이 갔네.'
하지만 저 기분만은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 백천도 조금 전부터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것을 도무지 주체할 수 없었으니까.
"세상에, 혼원단이라니."
이걸 얻기 위해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정말 이렇게 손에 넣을 수 있을 줄이야. 자꾸만 청명의 가슴팍에 보이는 상자의 윤곽을 확인하게 되는 백천이었다.
그때 청명이 개운한 얼굴로 말했다.
"하. 그래도 사람이 도리는 해야지."
"응?"
그는 몸을 빙글 돌리더니, 상자를 뽑아낸 수원지를 향해 천천히 절을 올렸다.
고인에게 예를 표하는 이배(二拜)를 마친 청명이 가만히 그 수원지를 바라본다.
"무덤도 아닌데 무슨 절이야?"
"아니."
청명이 고개를 내저었다.
"여기가 약선의 무덤이다."
"……응?"
약선의 시신은 다른 곳에 묻힌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무덤 따위는 없을지도 모르지. 혼원단과 혼원비결을 남긴 약선에게 더 이상의 삶은 의미가 없었을 테니까.
어쩌면 어떤 사람의 손길도 닿지 않는 깊은 산속에서 홀로 쓸쓸히 죽어 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곳에 시신은 없을지 몰라도, 그가 남긴 뜻이 있다. 그렇다면 이곳을 약선의 무덤이라 불러도 이상하진 않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진정 중요한 것은 자신의 육신 따위가 아니라 그 의지였을 테니까.
"이걸로 됐어."
청명이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약선의 기술은 잇는다. 하지만 그의 의지를 청명이 이어 줄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윤종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는 듯이 말했다.
"이걸 화산으로 가져가도 될까? 고인의 뜻은 그게 아니었던 것 같은데?"
화산은 무파.
하지만 약선은 무파의 손에 혼원단이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았다. 자신의 뜻을 잇는 누군가가 그저 인술을 펼쳐 주기를 바랐을 뿐이다.
하지만 청명은 그저 심드렁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상관없어."
"으응?"
"약선 역시 도박을 한 것에 불과하니까. 적당히 안배를 해 놨으니 알아서 제대로 된 인간이 찾아오겠지 하고 생각한 건 무책임한 짓일 뿐이야."
"그래도……."
"정말 약선이 자신의 뜻과 의지를 전하고 싶었다면, 이런 식으로 혼원단을 남길 게 아니라 자신의 뜻을 이어 줄 수 있는 제자를 들였어야지. 자신의 눈에 차지 않더라도, 자신의 뜻을 이어 줄……."
청명이 입을 다물었다.
- 언젠가는 너도 바라게 될 것이다. 너의 사제들이, 너의 사질들이, 그리고 너의 후예들이 너의 뜻을 잇고, 너의 것을 이어 주는 날을 말이다.
문파란 그런 것이다. 함께 잘 사는 게 전부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나의 의지를 이어 나가는 것이지.
청명이 가만히 눈을 감는다.
'그 말이 하고 싶으셨던 거군요, 사형.'
간밤의 꿈.
그 꿈에서 청문이 그에게 한 말이다.
'이 못난 사제가 그리도 걱정이 되셨습니까.'
청명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청명아?"
"아, 아니. 아무것도."
슬쩍 사형제들이 보지 못하게 눈가를 훔친 청명이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미덥지 않아도 전한다. 능력은 부족할지 몰라도 내 뜻을 제대로 이어 줄 이들이 대를 이어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온전히 나의 뜻과 능력을 모두 이어 줄 전인이 생겨나기 마련이지. 그래……. 그렇게 이어지는 게 문파. 그래, 그게 문파야. 그게……."
청명이 고개를 돌려 바위를 바라보았다.
"약선은 자신의 뜻을 이어 줄 이들을 믿지 못했어. 온전히 자신의 능력과 뜻을 담을 수 있는 완벽한 천재를 원했겠지. 그렇기에 이런 짓을 한 거야. 하지만…… 그건 제대로 된 방법은 아니었겠지."
홀로 오롯한 자는 결국 다른 이들을 깔볼 수밖에 없다.
약선 같은 천재의 눈에는 세상 모든 이들이 모자라 보였을 테니까. 모자란 이들이 자신의 진전을 이을 수 있을 거라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오로지 자신과 같은 천재만이 자신의 능력을 이을 수 있으리라 믿었겠지.
한때 청명이 그러했듯이.
하지만.
'당신은 틀렸어.'
그리고 과거의 청명도 틀렸다. 아니, 틀렸다기보다는 미처 알지 못했다.
- 언젠가는 그 모자란 이들이 너에게 더없이 소중한 존재가 될 것이다.
청명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젠 압니다. 사형."
"응? 나?"
윤종이 자신을 가리키자 청명이 뚱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아직은 잘 모르는 것 같기도 하고…….
여하튼!
이건 청명 혼자서는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사형제들이 같이 고민하고 애써 주지 않았다면 청명 역시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화산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 미약한 이들이 청명의 등을 밀어 주고, 그를 받쳐 준다.
그래, 이게…….
청명이 살짝 어색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다들 고생했어."
"헐?"
"미쳤나?"
"애가 돌아 버렸나? 왜 안 하던 짓을 하지?"
"의원이 필요해요."
"……."
아니, 이 새끼들이?
청명이 눈을 부라리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탓해 무엇 하랴? 다 청명의 탓인 것을.
청명이 가만히 바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쩌면 이곳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약선의 의지를 생각했다.
'어쩌면 당신 역시 최선의 선택을 한 건지도 모르지. 당신이 옳았는지, 내가 옳았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일지도 몰라. 나 역시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하니까.'
하지만.
"그래도 나는 함께 걸어간다."
더는 홀로 걷지 않는다.
더는 홀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지금 그에게는 그의 뜻을 이어 줄 이들이 있고, 함께 뜻을 이뤄 줄 이들이 있다. 그래, 그게 문파. 그게 화산이다.
약선의 의지는 여기에서 끊길 것이다.
그가 세상에 남기려 한 것도 더는 의미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그의 의지는 그저 청명에게로 이어졌을 뿐이고, 청명은 그 의지를 잇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청명은 다르다.
그의 의지는 이어진다.
화산이 존재하는 한, 화산의 의지가 세상에 살아 있는 한. 그가 죽는다 해도, 수백 년이 흐른다고 해도 청명의 의지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화산이 존재하는 한, 사형제들의 의지 역시 나와 함께한다. 그렇죠, 사형?'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청명은 이미 그 대답을 들었다.
과거를 그리워할 필요는 없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 냈던 화산의 의지가 지금의 청명과 함께하니까.
화산의 이름과 함께하는 것만으로 그는 앞서 간 사형제들과 함께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지금은…….
청명이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사형제들을 바라본다.
그래. 이들과 함께 걸어갈 뿐이다.
"사숙."
"그래."
청명이 더없이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가야 할 때다.
이름만으로도 그리운 곳.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괜스레 따뜻해져 오는 곳.
"돌아가자. 화산으로."
모두가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길고 길었던 남영행이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