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그래도 나는 함께 걸어간다. (3)
청명이 홀린 듯 남영을 걸었다.
그의 발길이 향한 곳은 이미 무너져 버린 검총.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걸어 적공산 어귀에 도착한 그는 멍한 얼굴로 외길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약선. 탈검무흔. 약선. 탈검무흔. 혼원단. 제자……."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끊임없이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생각하자.
생각해 보자.
생각은 전공이 아니지만, 지금 이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이는 청명밖에는 없다. 청명의 머릿속이 수많은 단서로 뒤죽박죽 뒤섞여 갔다.
'나는 무얼 얻으려 했지?'
혼원단. 그리고 혼원단의 연단법.
'내가 들었던 곳은?'
검총. 탈검무흔의 무덤.
시작부터 잘못되어 있었다.
약선은 탈검무흔이지만, 탈검무흔은 약선이 아니다. 그 미묘한 차이를 생각하지 못한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약선이 자신과 탈검무흔을 동일시했다면 그 사실을 숨기려 들지 않았을 것이고, 탈검무흔의 무덤을 검총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결국 약선이 자신의 자취를 남기려 했다면 그건 결코 검총에는 있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결과적으로 검총 안에서 그들이 발견한 것은 다 썩어 버린 신병들뿐이지 않았던가?
그럼.
탈검무흔이 아닌 약선의 자취는 어디에 있는가?
'외길로 이어진다.'
과거 적공산에는 이 외에도 여러 산길이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천재지변으로 오직 이 길만 남았다고 했지.
마치 적공산을 오르는 이들은 반드시 검총이 있는 곳을 지나게 만들려는 것처럼 말이다.
반쯤 넋이 나간 것처럼 산을 오른 청명의 눈에 더없이 넓고 깊게 파인 구덩이가 들어왔다. 그는 구덩이 바로 앞에 서서 멍한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검총.'
여기가 검총이다.
이 산을 오르는 이는 누구나 도착할 수밖에 없는 곳.
"도(道). 비도(非道). 길. 길이 아닌 곳."
길이 아닌 곳을 걷는 자는 이곳에 도달할 수 없고, 오로지 정도를 걷는 자만이 이곳에 도착한다.
"……뭔가 깨달은 거냐?"
은근히 물어 오는 백천의 말에 청명이 고개를 획 돌렸다.
그 불타는 듯한 눈빛에 백천이 흠칫한다.
"사숙."
"으응?"
"검총을 발견한 이들은 어떻게 했지?"
"뭔 소리야?"
"검총을 발견한 이들이 뭘 했냐고!"
"그야……."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일단은 대답을 해 줘야 한다. 지금 청명의 물음은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니까.
"안으로 들어갔지."
"어떻게?"
"아니,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당연히 문을 열고 안으로……."
백천이 입을 다문다.
문을 열고 들어간다.
"입문(入門)."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일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그 입문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서로 검을 겨눈 형상의 문."
"그래. 무학에 입문한다."
청명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그 뒤에는 뭐가 있었지?"
"길고 점점 좁아지는 길. 중간중간 함정이 있는."
조걸이 손뼉을 쳤다.
"알았다! 그게 수련이구나!"
"그래. 수련이지. 수련이란 점차 좁아지는 길을 걷는 것과 같으니까. 모두가 드넓은 길에서 시작하지만, 결국은 그 좁아지는 길을 감당하지 못하고 하나둘 뒤처지기 시작하지. 그걸 이겨 낸 이들만이 다음으로 나아간다."
"중간 중간 커다란 장애를 겪으면서 말이지."
청명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이젠 명백하다.
"다시 말하자면……."
백천이 상황을 정리했다.
"검총은 사람이 무학에 입문하여 무를 닦아 나가는 과정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말이군."
"아마도 그럴 거야."
그제야 백천은 검총 안의 그 기괴한 형태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간 중간 길이 갈렸잖아."
"무학을 익히는 것 역시 마찬가지지. 입문이야 동일하더라도 다들 자신의 성향에 따라 다른 길을 택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마지막에는 어떻게 됐지?"
"……길이 다시 하나로 합쳐진다."
"만류귀종이지. 서로 다른 길을 걷는다고 해도 마지막에는 결국 더없이 큰 뜻에 따라 하나를 좇을 수밖에 없어."
백천이 신음하듯 말했다.
"……무학의 완성이구나."
"그렇지."
청명들이 조명산과 삼살귀 등과 싸웠던 거대한 공동.
여러 개로 갈라졌던 길은 그곳에서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마치 서로 다른 뜻을 가진 무인들도 결국에는 단 하나의 목적을 향해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 뒤에 뭐가 있었지?"
"……길고 어두운 동굴. 그리고 강시."
윤종이 신음하듯 말했다.
"심마(心魔)로군."
"그래. 무학을 완성하기 전 반드시 찾아오는 어둠. 심마다."
"그럼 그 절벽은? 심마를 겪고 나서 위로 오르는……."
대답은 청명이 아니라 백천의 입에서 나왔다.
"등선지로(登仙之路)."
백천은 이제야 그 모든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그 절벽의 맨 끝에서 내려오던 눈부신 빛은 무학의 완성을 의미하는 거로군. 도가에서는 우화등선(羽化登仙), 불가에서는 해탈(解脫)."
하지만 아직 풀리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럼? 그 다 삭아 버린 신병들과 비어 있던 목함은 어떻게 된 거야? 등선이면 뭔가를 이뤄야 하잖아."
청명이 이를 드러냈다.
"없다는 거야."
"응?"
"등선이고 탈각이고. 사람과 싸우고, 사람을 죽이며 도달한 곳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거지. 애초에 무학을 익힌다는 것 자체에 어떤 의미도 없다는 거야. 검총은 약선이 사람을 시험하기 위해 만든 곳이 아니라 그가 가진 무학에 대한 생각을 형상화해 낸 곳이지."
유이설의 말이 단서였다.
약선은 의원.
그런 이들이 사람을 다치게 하고 죽이는 무인들을 곱게 볼 리가 없었다. 아니, 어쩌면 철천지원수처럼 보였겠지. 그가 사람을 사랑하고 아낄수록 그 증오는 더욱 심해졌을 것이다.
"그렇기에 탈검무흔이 되어 당대의 강자들에게 그들이 가진 무학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리려 했겠지. 그 무학의 상징인 애병을 뺏으며 말이야. 약선은 혼원단을 만들어 낼 만큼 연단에 조예가 깊었으니까 초식이 부족해도 막대한 내력으로 당대의 강자들을 꺾을 수 있었던 거고."
"……그런데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렇지. 무인들의 무학에 대한 집착은 상상을 초월하니까. 약선은 말하고 싶었던 거야. 너희의 무학은 그저 사람을 죽이는 해악일 뿐이다. 도니 불법이니 하고 아무리 포장해 봤자, 결국 그 끝에는 아무것도 없다."
백천이 소름이 돋는다는 듯 어깨를 움켜잡았다.
무시무시한 집념이고 무시무시한 광기다. 그 하나를 전하기 위해서 검총이라는 말도 안 되는 곳을 만들어 낼 수 있다니. 약선은 대체 얼마나 집요한 인간이었다는 말인가?
"그럼 애초에 그 안에 뭐가 있을 리가 없었다는 건가?"
"그렇지."
"……헛고생만 했군."
이제야 검총의 실체를 깨달은 이들이 저마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여긴 왜 온 거야? 그걸 확인하려고?"
"아니."
청명이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말했잖아. 검총은 약선의 무덤이 아니라고. 이곳은 그냥 탈검무흔의 무덤일 뿐이야. 약선은 스스로를 탈검무흔이라 생각하지 않았어. 그건 가짜지. 약선이 만들어 낸 연단과 의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그저 가짜 신분."
"……."
"보통 자신이 목표로 삼던 것이 무너진 이들은 어떻게 하지?"
"……목표를 다시 찾으려 하겠지."
위를 바라본다.
모두가 무너지는 천정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청명마저도 동굴이 붕괴하는 순간 하늘에서 쏟아지던 빛을 찾아 대었다. 그곳에 아직 광명이 있다는 듯 말이다.
"하지만 덧없음을 알아낸 이는 바닥을 본다. 그 바닥에…… 가장 낮고 무인들이라면 거들떠도 보지 않을 바닥에 삶이 있다. 생존이 있다.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청명이 쉴 새 없이 중얼거렸다.
그의 말은 사형제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생각이 말의 형상을 하고 흘러나오는 것에 불과했다.
"그럼 깨달은 이들은?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돌아간다?"
"아니야."
청명이 천천히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아간다. 처음부터 목표를 잘못 잡은 이도. 무학이라는 길을 걸어 사람을 상하게 한 이도. 살아 있다면 나아갈 수 있는 법이지."
그가 향하는 곳은 구덩이를 넘어서 이어지는 산길이었다.
아무도 저곳으로 가지 않았다.
이곳에 수많은 이들이 모여들었지만, 검총을 발견한 이들은 아무도 이어지는 길로 발을 옮기려 하지 않았고, 누구도 그걸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의 목표는 바로 여기에 있으니까.
"단서는 수도 없이 많았어. 산 한가운데 있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땅. 욕망에 휩싸여 귀물을 찾는 이들에게 그곳은 마치 황금으로 만들어진 땅처럼 보이겠지만…… 그건 그저 죽은 땅일 뿐이야."
"아……."
죽은 땅이라는 말을 듣자 모든 것이 명백해지는 느낌이다.
돌이켜 보면 이렇게나 많은 단서가 있었고, 더없이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고 있었다. 혼원단과 신병이라는 욕망의 덩어리가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화산의 제자들조차 이곳에 오자마자 검총으로 뛰어들었고, 검총이 무너진 뒤에는 미련 없이 돌아서지 않았던가.
오로지 검총만을 의미로 뒀던 이들에겐 더 나아갈 길 같은 건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했다.
청명이 다시 홀린 듯이 나아간다.
죽어 버린 땅에서 이제는 커다란 구덩이가 된 곳. 즉 모든 것이 무너져 허무로 돌아가 버린 곳을 지나쳐…….
그래도 이어지는 길을 향해서.
무성하게 자라난 수풀을 헤치며 걷는다.
'당신이 말하고 싶은 건 이거였군.'
무학에 대한 허무가 끝이 아니다.
걸어라.
그래도 걸어라.
모든 생을 걸어 달성하려고 했던 목표를 잃었어도, 그것에 절망하지 않고, 자신의 발밑에 뭐가 있는지를 알아낸 이라면…… 아직 늦지 않았으니 그 두 발로 나아가라.
무학이 아닌, 삶을 위해서.
청명의 발걸음이 진중해졌다.
청명은 약선의 사상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가 일생의 모든 것을 퍼부어 만들어 낸 이 가공할 안배에는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윽고.
그들이 도착한 것은 또 다른 너른 공터였다.
하지만 이곳은 처음 그들이 보았던 곳과는 달리 모든 것이 조화롭다.
바위틈으로 물이 흐르고, 주변은 풀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다. 나무는 자연스레 자라나 있고, 그 사이에서 자유로이 뛰어 놀던 동물들이 청명을 발견하고는 놀라 바삐 달아난다.
아무것도 아닌 그저 자연스러운 곳.
하지만 그렇기에 청명은 이곳이 약선이 진정으로 택한 땅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처음 그들이 도착했던 죽어 버린 땅과 완벽하게 대비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약선의 뜻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이곳에 도착해도 아무 생각도 하지 않겠지."
"그렇겠지. 여긴 그냥…… 정말 그냥 산이니까."
청명의 시선은 처음부터 한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공터 한쪽의, 물이 흘러나오는 바위틈.
저곳이 아마 이 적공산의 수원(水原)일 것이다.
"물은 미약하지."
청명이 낮게 중얼거린다.
"가늘고 얕게 흐른 물은 이내 다른 물들과 합쳐져 개천을 이루고, 강을 이루어 이윽고 바다로 흘러들어 간다. 그러면서 수많은 생명들을 살아가게 만든다."
그것은 결국 도(道).
그리고 인(仁)이다.
"약선이 정녕 자신의 것을 전하려 했다면, 자부심과 우려를 극복해야 했겠지."
검총은 우려다.
그렇다면 약선의 자부심은?
"내가……."
청명이 마치 자신이 약선이 된 것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이룩한 것이 물처럼 세상에 퍼져 나가 수많은 이들을 살리는 시발점이 되리라."
광오하기 짝이 없는 생각.
하지만…….
이 안배를 한 자가 정말 약선이라면, 그는 광오할 자격이 있다.
청명이 천천히 걸어 물이 뿜어져 나오는 바위틈으로 다가갔다.
그의 생각이 맞다면.
약선이 먼 훗날의 후예들에게 전하려 한 것이 지금 청명에게 제대로 전해졌다면.
그가 전하려 한 것은…….
바로 이곳에 있다!
청명이 살짝 떨리는 손을 물이 뿜어져 나오는 바위틈 안으로 밀어 넣었다. 사람의 손 두어 개가 겨우 들어갈 만한 좁은 틈. 그 안으로 어깨까지 팔을 밀어 넣고 안쪽을 더듬기 시작한다.
그의 몸이 순식간에 물로 젖어 들었다.
이곳은 수원(水原).
생명의 근원이다.
있어야 한다면 이곳뿐이다. 아니! 여기에 있을 것이다!
'좌절해 보지 않은 이는 알 수 없다.'
무학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모르는 이는, 약선이 전하려 한 것을 깨달을 수 없다. 삶의 끝에서 누구보다 짙은 허무를 느꼈고, 그럼에도 다시 나아가는 청명이기에 약선이 말하려는 바를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여기에!
바로 여기에 있어야 한다!
그 순간이었다.
턱!
청명의 손끝에 뭔가가 잡혔다.
손끝의 감각이 말한다. 이건 바위가 아니다. 분명 이건…….
'금속?'
청명이 손을 안쪽으로 더 밀어 넣는다. 반듯하게 제련된 금속의 감각이 확연하게 느껴진다.
힘을 꽉 주어 손에 잡힌 금속 덩어리를 뽑아냈다.
콰르르르!
물이 세차게 뿜어져 나옴과 동시에 바위틈에서 네모난 철괴가 뽑혀 나온다!
청명은 숨도 쉬지 못하고 자신이 뽑아낸 철괴를 바라보았다.
'상자.'
그의 손이 떨리기 시작한다.
사형제들도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돌처럼 굳은 채로 청명이 뽑아낸 상자를 바라보았다.
금속으로 단단히 밀봉된 상자는 이백 년 동안 물속에 있었음이 분명함에도 그 형태를 온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만 보아도 범상치 않은 물건이 확실하다.
청명의 손끝이 천천히 상자로 향한다.
딸깍.
단숨에 잠금장치를 끄른 청명이 깊게 심호흡을 한다. 그리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천천히 열기 시작했다.
끼이이익.
아주 작은 마찰음과 함께 상자가 열린다.
눈이 상자를 확인하기도 전에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더없이 청아한 향이 청명의 코끝을 파고들었다.
"으……."
이윽고 완전히 열린 상자 안.
청명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 작은 상자 안에 이십여 개의 작은 단환과 고풍스러운 책자가 들어 있는 것을 말이다.
"끅."
심장이 아프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자꾸만 흐려지려고 하는 눈에 억지로 힘을 주어 책자의 제목을 확인했다.
혼원비결(混元?
訣).
"혼원……."
의식이 멀어진다.
"차…… 차…… 차…아아!"
"차?"
"찾았다아아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아아아!"
"미친! 찾았어! 찾아냈다고!"
청명이 하늘을 향해 더없이 세찬 고함을 터뜨렸다.
"으아아아아! 약선 이 새끼야! 내가 찾았다! 찾아냈다고오오오오오오오!"
청명이 거품을 물고 뒤로 천천히 넘어갔다.
사형!
장문사형!
빌어먹을! 빌어먹을! 제가 해냈습니다!
점점 흐려지는 시야에 흐뭇하게 웃는 청문의 얼굴이 떠오른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