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그래도 나는 함께 걸어간다. (2)
"고생 많았다, 화산신룡."
"……하루 쉬어 간다 해 놓고 대체 며칠을 붙어 있는 거예요?"
"여기 밥도 맛있고, 잠자리도 편하고, 술도…….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몸이 영 회복이 안 돼서……."
청명이 영 못 미덥다는 눈으로 홍대광을 바라보았다.
'개방에 어쩌다 이런 위인이.'
과거의 개방도들은 협의 하나에 목숨을 건 이들이었다. 전력을 상실한 것으로 따지면 대산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게 화산이지만, 죽어 간 문도의 수로 따지면 감히 개방을 따를 이들이 없다.
그 협의 넘치는 개방을 생각하다가 이런 느물거리는 인간을 보니까…….
'아니, 개방은 원래 느물거렸었나?'
잘 모르겠다. 전쟁터에서는 사람이 변하는 법이니까.
"여하튼 화산신룡. 이제 화산으로 돌아가는 거냐?"
"그래야죠."
"그래?"
홍대광의 눈빛이 진지하게 변했다. 그가 청명을 향해 깊게 포권 한다.
"개방의 낙양 분타주이자 칠결개(七結?)인 이 홍대광. 이번 검총 사태에서 화산이 개방에 준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개방은 결코 은혜를 잊지 않는 문파외다. 언젠가는 이 은혜를 갚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청명도 이번만은 장난기를 빼고 홍대광과 마주 포권 했다.
"별말씀을."
이윽고 손을 내린 두 사람이 어색한 얼굴로 서로 마주보았다.
뭐랄까.
약간은 전우애 같은 게 생긴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이제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네?"
홍대광이 속삭이듯 말했다.
"좋든 싫든 이번 일로 강호에 너의 명성이 울리게 될 거다. 네가 활약하는 모습을 모두가 지켜봤으니까. 화종지회로부터 이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조금은 색이 바랬던 너의 명성이 다시 퍼져 나가겠지."
"흐음."
"강호에서 명성을 얻는다는 건 꼭 좋은 일은 아니다. 너를 시기하는 자들이 늘어나고 너를 쓰러뜨려 명성을 얻으려 하는 자들이 늘어난다는 이야기니까."
"뭐 뻔한 이야기를."
청명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런 건 이미 지긋지긋할 정도로 겪어 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오는 놈들은 하나같이 엉덩이에 바람구멍이 뚫려서 돌아갔었지.
그렇게 오는 놈들 하나하나 패다 보니 나중에는 매화검존이라는 거창한 별호가 생기지 않았던가?
"사람이 충고를 해 주는데!"
홍대광이 발끈하자 청명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여하튼 지금 그는 매화검존 청명이 아니라 화산신룡 청명이니까.
"알아서 잘하리라 믿는다. 그리고 앞으로는 화산으로 정기적으로 사람을 보내마."
청명이 살짝 눈을 빛냈다.
'호오?'
사람을 보낸다는 건 개방 분타만의 뜻은 아닐 것이다. 앞으로 개방이 화산과의 교류를 이어 가겠다는 뜻이다.
"줄 게 없는데요?"
"그건 우리가 판단할 일이지."
홍대광이 씨익 웃었다.
"한번 철수했던 개방 화음 분타도 다시 설치할 생각이다. 그러니 혹여 개방의 정보가 필요하다면 그쪽으로 문의하면 된다."
"화음 분타에서 우리 정보도 빼 가고 말이죠?"
"하하. 다 그렇게 돕고 사는 거지."
청명이 피식 웃었다.
나쁜 제안은 아니다. 오히려 바라던 일이다. 지금 화산에 가장 부족한 것 중 하나가 정보이니까.
사실 지금 화산의 정보력은 일개 중소 문파보다 못한 수준이다. 산골짝에 처박혀서 돈 걱정만 하고 살았으니 바깥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알기나 하겠는가?
청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거기에 추가로."
"응?"
"화음 분타에 오는 놈들은 똑똑한 애들로 꾸려 보내 줘요. 알고 싶은 정보가 많으니까."
"흐음."
"그리고 남영에도 거지 두엇 놔두고 화영문에 지원도 좀 해 주세요. 겸사겸사 연락책도 조금 해 주시고."
"그렇게 하지."
결정은 시원시원하고 빨랐다.
'어쨌든 소득이 없지는 않았네.'
목표로 하던 걸 손에 넣은 건 아니지만, 이것만 해도 보통 소득은 아니다. 여하튼 화산이 구파일방에서 쫓겨나며 관계가 완전히 끊어졌던 개방과 다시금 교류하고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아마 현종이 알면 감격에 눈물을 줄줄 흘리지 않을까?
"여하튼 고마웠다, 화산신룡."
"네, 잘 지내세요. 다시 볼 일은 없겠지만."
"아마 다시 보게 될 거다."
홍대광이 그 말을 남기고 손을 흔들었다.
"잠깐."
청명이 뒤돌아가려는 홍대광의 허리춤을 움켜잡는다.
"응?"
"약속은 잊지 마세요."
"약속?"
"그 거지새끼 화산으로 보내 준다는 말."
"……."
홍대광의 눈이 살짝 떨렸다.
"어, 그럼. 그렇지. 안 잊고 있어."
"제가 어물쩍 넘어갈 거란 생각은 하지 마세요. 나는 죽어도 안 잊으니까."
"……."
그놈이 대체 이 녀석에게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약속은 지킨다니까! 나 홍대광이야!"
"약속 안 지키면 개방 화음 분타가 무사할 생각은 말아야 할 거예요."
"……알았다니까."
다른 놈들이 이런 협박을 하면 웃어넘길 홍대광이지만, 이미 청명의 성정(?)을 수도 없이 확인한지라 웃을 수가 없었다.
여하튼 그렇게 홍대광은 마지막까지 협박을 받으며 남영을 떠났다.
남영에서 해야 할 마지막 일을 마친 화산의 제자들이 봇짐을 둘러메고 화영문의 정문에 섰다.
화영문주 위립산을 위시한 위소행과 화영문의 문도들이 그들을 배웅하기 위해 나왔다.
"정말 감사하오."
"별말씀을."
백천이 위립산의 말을 받았다.
이미 백천과 위립산은 앞으로 화영문을 어떻게 운영해 나갈 것인지, 그리고 화산이 어떻게 지원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를 며칠에 걸쳐 마친 뒤였다.
닥쳐온 위기에 혹시나 하고 본산에 연통을 넣어 본 위립산으로서는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고 지원까지 약속하는 본산의 제자들이 고맙지 않을 수 없었다.
"화영문주님이 해 주셔야 할 일이 막중합니다. 본산에서도 많은 기대를 품고 있습니다."
"제가 그럴 위인이 되겠습니까? 하지만 이 한 몸 분골쇄신하여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위립산이 깊이 고개를 숙이자 화산의 제자들도 고개를 숙였다.
"청명 도장님."
위소행이 아쉬움이 역력한 얼굴로 청명을 바라본다.
"왜?"
"뭔가 아쉬워서……."
"아쉬울 것도 많다. 이제 자주 보게 될 텐데."
그것 참 반가우면서도 걱정스러운 말씀이시네요.
"저도 나중에 본산의 제자가 될 수 있을까요?"
"안 돼."
청명이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너는 화영문의 문주가 되어야지."
"……그렇겠죠."
"하지만 본산에 와서 수련을 하는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하지. 화산은 속가제자와 본산제자를 차별하지 않으니까. 여기 있는 조걸 사형도 언젠가는 화산에서 내려가 가문을 이을 작정이고."
"아, 조걸 도장님께서?"
위소행이 뭔가 답을 찾았다는 듯 조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조걸이 당황하여 손을 내저었다.
"아, 아직 확정된 건 아닙니다!"
"여하튼 그럴 수 있다는 거군요."
위소행의 눈에 결심이 어린다.
"그러니 지금은 일단 아버지를 도와드리도록 해. 한동안 하실 일이 많을 거야."
"그러겠습니다."
위소행이 막힌 것이 풀렸다는 듯 웃으며 물러섰다.
대충 상황이 정리되었다 싶자, 백천이 다시 한번 위립산을 향해 인사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먼 길 가는데 금전이라도 조금 보태 드려야 하는데."
"괜찮아요!"
청명이 배를 쭉 내밀었다. 그의 가슴팍에 뭔가가 울룩불룩 튀어나와 있다.
"우린 부자니까!"
"……."
어……. 그래.
"여하튼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화산의 제자들이 손을 흔들며 멀어지자 화영문의 사람들도 연신 손을 흔들었다.
"갔네요."
"그래. 갔구나."
뭔가 폭풍이 휩쓸고 간 느낌이었다.
살짝 허무함을 느낀 위립산이 화산의 제자들의 뒷모습을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화산은 달라지겠지.'
아니, 이미 달라졌다.
그리고 언젠가 저들의 이름이 화산의 이름과 함께 천하에 떨쳐질 것이다.
'나도 이러고 있을 수는 없지.'
"들어가자꾸나. 할 일이 많다. 본산에서 내준 숙제를 하려면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하겠구나!"
"예! 아버님!"
화영문의 제자들이 몸을 돌렸다.
그들의 어깨에는 이제껏 없었던 자신감과 자부심이 가득했다.
화영문의 현판에 써진 '화산속가(華山俗家)'라는 글귀가 오늘따라 더없이 반듯하게만 보였다.
* * *
거리는 다소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남영으로 몰려들었던 이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남영 주민들은 일련의 사태에 놀라 바깥출입을 자제하다 보니 안 그래도 사람이 많지 않던 도시가 적막하기까지 하다.
"결국은 허탕만 치고 돌아가는군요."
"허탕은 아니다."
윤종의 말에 백천이 고개를 내젓는다.
"우리는 화영문의 일을 처리했고, 개방과의 좋은 관계를 얻었다. 그 와중에 무당과 격전을 치러 화산의 명성까지 드높였다. 이 이상 많은 것을 얻을 수는 없지."
"그렇긴 합니다, 사숙."
하지만 못내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혼원단 때문에 그 고생을 했는데, 결국 검총에서는 아무것도 얻어 나오지 못했으니까.
"약선……. 약선, 이 빌어처먹을 인간!"
청명도 그 부분은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지 자꾸 이를 갈아 댔다.
하지만 뭘 어쩌겠는가? 시간 끌고 죽친다고 혼원단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닌데. 돌아갈 수밖에.
백천이 슬그머니 발걸음을 재촉했다. 빨리 남영에서 나가야 이 미련이 끊어질 것 같아서다.
그때 지금까지 잠자코 있었던 유이설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응?"
"약선이라는 사람은 왜 탈검무흔이 되었을까?"
"응?"
유이설이 슬쩍 청명을 돌아본다.
"전에 네가 말했다. 시작하려면 거기부터. 탈검무흔부터."
가만 듣던 백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보탰다.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했었던 것 같은데. 청명아, 이유가 뭐냐?"
"내가 어떻게 알아. 그냥 그렇다는 거지."
"끄응."
백천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 질문에 대답한 것은 의외로 조걸이었다.
"정체를 숨겨야 하기 때문이었겠죠."
"응?"
"약선으로서는 절대 해선 안 될 일이었으니까요. 온 문파를 돌아다니면서 절대고수들을 쓰러뜨리고 검을 뺏었을 거잖아요. 그걸 약선의 이름으로 하면 난리가 났겠죠. 약선을 잡아 죽이려는 사람들도 있었을 거고."
"그건 당연한 일이지만……."
백천이 미간을 좁혔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다.
그 하나만으로는 뭔가 설명이 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아니. 거기가 아니지."
이번에는 윤종이었다.
"정체를 숨기면서 검을 빼앗고 다녔잖아."
"그렇죠."
"왜 그랬냐고. 기껏 뺏어서 저렇게 검총 안에 처박아 박살낸 걸 보면 애초에 탐을 낸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조걸이 미간을 좁혔다.
생각해 보면 정말 이상한 일이다.
약선은 신병을 탐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천하제일인이라는 명성을 탐한 것도 아니다.
돌이켜 보면 약선이 탈검무흔의 이름으로 행한 것들은 모두 헛짓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그런 짓을 했다는 말인가?
검총은 또 왜 만들었고.
그때 유이설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냥 싫었던 거?"
"……응?"
"꼭 이유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몰라. 그냥 싫어했을 수도 있으니까."
싫어했다?
약선이 무인을?
백천이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 사매, 좀 더 자세히 말해 봐."
"약선은 기본적으로 의원이죠."
"그렇긴 하지."
연단가라는 쪽이 더 맞겠지만, 기본적으로 약선은 의행을 하던 의원이었다. 혼원단 때문에 강호에서 더 유명할 뿐, 그는 평생을 다치고 병든 이들을 치료하며 살았으니까.
"그런 사람이니까. 싫어했을 것 같아요. 쓸데없이 검을 휘둘러 사람을 죽이는 무인들을. 치료해도 죽여 버리니까."
"그런 단순한 감정으로 이런 일을 벌였다고. 그럼 검총은 뭔데?"
유이설이 애매한 표정으로 말한다.
"경고하려 한 것이 아닐까요? 강호인들에게. 약선의 제자들이 아니었다면, 그가 탈검무흔이라는 건 아무도 몰랐을 테니까."
"아니, 잠시만요."
윤종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면 약선에게 제자들이 있었는데 왜 혼원단의 연단법이 실전된 거죠? 제자들에게 전해지지 않았나요?"
"듣기로는 약선은 제자들에게는 혼원단의 연단법을 알려주지 않았다는군. 자격이 없다나 뭐라나?"
"거참 들을수록 이상한 사람이네."
"결국 그 모든 것은 약선의 변덕이라는 건가?"
그때였다.
뭔가 생각에 잠긴 듯 느릿하게 걷던 청명이 걸음을 멈춘다.
"응?"
모두가 고개를 돌려 청명을 바라보았다.
"청명아, 왜?"
하지만 청명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먼 하늘을 보며 뭔가를 중얼거렸다.
"약선. 혼원단. 문파. 탈검무흔. 연단. 제자. 시험. 시험……. 문파……."
홀린 듯한 중얼거림이 연신 이어진다.
"이어진다. 남긴다. 시험한다……. 강호인. 그럼……."
이내 청명의 몸이 부르르 떨린다.
그러더니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홀린 듯 몸을 돌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가던 방향과 반대로 걷기 시작했다.
"어, 어디 가냐?"
윤종이 청명을 잡으려는 순간 백천이 얼른 막고 끌어당겼다.
"쉿!"
"어……."
"따라가자. 조용히 하고."
"아, 알겠습니다."
이윽고 모두가 뭔가를 중얼거리며 걷는 청명의 뒤를 조심스레 따르기 시작했다.
'뭘 알아낸 거냐! 이 괴물 같은 놈아.'
백천의 눈에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이 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