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그래도 나는 함께 걸어간다. (1)
"이! 망둥이 같은 놈아!"
청명이 움찔하여 앞을 바라본다.
사형인 청문이 수염을 파르르 떨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 진짜. 맨날 나만 가지고 그러신다니까.'
청명의 입이 댓 발은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런 청명의 반응에도 청문의 노기는 전혀 풀릴 기미가 없었다.
"내 너에게 뭐라고 했더냐?"
"……글쎄요. 잔소리하신 게 워낙에 많아서 뭐부터 대답을 해야 할지."
"이놈이 그래도!"
청명이 움찔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에서 그의 사제들이 고소하다는 듯이 이쪽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획 돌린다.
'아니, 저 새끼들이?'
뒈질라고?
따아아악!
"악!"
청명이 머리를 움켜잡고는 원망 어린 시선으로 청문을 돌아보았다.
"또! 또!"
"끄으으으응!"
청명이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청명이 누구던가?
이 화산의 절대기재이자 미래 화산의 천하제일인으로 불리는 이다.
물론 그를 시기하는 자들은 그를 화산의 망종(亡種)이니, 화산의 재앙이니 하는 말로 폄훼하려 들지만, 그거야 능력 없는 자들의 질투에 불과하지 않은가?
사형제들은 물론이고 사숙들까지도 그를 건드리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직 이 사람.
청문 사형만큼은 그를 조금도 꺼려하지 않는다.
"내가 사제들을 때리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아니, 제가 그러려고 한 게 아니라……."
청명이 입을 쭉 내밀었다.
"그 새끼들이 먼저 시비를 걸었다니까요."
"그놈들이 미쳤다고 너한테 시비를 걸어? 너도 상식이 있으면 생각을 좀 하고 말하거라!"
"……."
어?
뭔가 억울한데 반박이 안 되네?
"이놈아!"
청문이 얼굴에 노기를 담았다.
"사제들뿐이 아니다! 사질들까지도 너만 보면 무서워서 슬슬 피하지 않느냐?"
"아니, 그 의리 없는 것들이, 어디 가서 맞고 오면 제일 먼저 나한테 뛰어와서 미주알고주알 일러 대면서! 이럴 때는 또 무섭다느니 어쨌다느니!"
"시끄럽다!"
"……끄응."
청명이 삐죽 입을 내밀었다.
그가 틀린 말을 하지는 않았다.
사제들이 저지른 일을 청명이 대신 수습한 게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그런데 그때는 고맙다느니, 사형밖에 없다느니 해 놓고 이제 와 조금 얻어맞았다고 사형에게 쪼르르 가서 일러바치다니.
'세상에 믿을 놈 없네. 진짜.'
언젠가는 반드시 복수를 해야겠다고 청명이 결심하는 찰나, 청문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따라오너라."
"예?"
"따라오래도!"
"……."
청문은 그를 이끌고 낙안봉을 올랐다. 그리고 오르는 내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낙안봉에 오른 청문은 청명을 불러 자신의 옆에 세웠다. 그들의 발아래로 드높은 화산의 정경이 펼쳐졌다.
'밀려고 그러시나?'
그래도 안 죽을 텐데.
청명은 실없는 생각을 하며 매번 보던 풍경을 심드렁하게 바라보았다. 그때 청문이 마침내 입을 뗐다.
"청명아."
"예, 사형."
"너는 화산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예? 그게 뭔 뜬금없는 말씀이세요. 도 닦는 것도 아니고."
아, 도 닦는 것 맞지. 우리 도사지?
"그럼 말을 바꾸자꾸나. 너는 문파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그야……."
청명이 고개를 삐딱하게 꺾었다.
"화산을 예로 들자면 인간 세상에 적응 못해서 나는 도나 닦겠다고 세상을 나선 도사들이 인적 드문 곳을 찾다가 여기까지 흘러들어 온 거죠. 그런 부적응자들이 하나둘 모이다 보니 전각도 짓고, 이거 저거 만들다 보니 우리도 이름 하나 짓자 하고 생겨난 게 화산 아닌가요?"
"……."
청문이 파르르 떨리는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아니에요?"
"무, 물론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지."
맞나 보네.
아픈 데를 찔리셨나?
"하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청문이 고개를 내저었다.
"청명아."
"예, 사형."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없다."
"……."
뻔한 말이었지만, 청명은 이번만큼은 이죽거리지 않았다. 청문의 말에서 뭔가 범접할 수 없는 현기(玄機)가 묻어났기 때문이다.
"너는 재능을 타고났다. 화산 전체를 봐도……. 아니, 어쩌면 화산의 역사를 거슬러도 너만 한 재능을 타고난 이는 없을지도 모른다."
"헤헤. 갑자기 칭찬하시니 제가 좀 부끄럽네요."
청명이 몸을 배배 꼬자 청문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거 손 내리시죠, 사형.
여기서 밀어도 저는 안 죽습니다.
"하나 그뿐이다."
"……네?"
"네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달라질 게 무엇이더냐? 결국 너도 혼자서는 이룰 수 없는 것이 있고, 혼자서는 닿을 수 없는 곳이 있다."
"……."
"시조께서 화산을 만들지 않고, 홀로 고고히 지내셨다면 세상이 그분을 기억하겠느냐? 세상에 그분의 뜻이, 그분의 무학이 이어져 내려왔겠느냐?"
청명이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는데, 제가 꼭 그런 걸 목표로 삼을 필요는 없잖아요. 저는 그냥 이 한세상 잘 지내다 죽으면 그만이지, 뭘 남기고 싶지는 않은데요?"
"네게 아직 간절함이 없어서 그렇다."
"……간절함이요?"
청문이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는 너도 바라게 될 것이다. 너의 사제들이, 너의 사질들이, 그리고 너의 후예들이 너의 뜻을 잇고, 너의 것을 이어 줄 날을 말이다. 문파란 그런 것이다. 함께 잘 사는 게 전부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나의 의지를 이어 나가는 것이지."
"어렵습니다."
"그래. 어쩌면 네게는 아직 어려울지 모른다. 하나 어렵다 해서 마음대로 군다는 건 네게도 좋은 일이 아니다."
청명이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뭔 말인지 정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러니 네 사제들을 조금 더 돌보거라. 네가 보기에 그 아이들은 하나같이 모자라겠지. 그리고 나 역시 네가 보기엔 모자라기 짝이 없는 놈일 것이다. 하나, 언젠가는 그 모자란 이들이 너에게 더없이 소중한 존재가 될 것이다."
"아, 그건 아니에요."
청명이 정색하며 말했다.
"사제들은 멍청이지만, 저는 사형을 모자라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거든요."
"……."
청문이
'나 잘했죠?'
라는 얼굴을 하고 있는 청명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웃지 마라. 정든다, 이놈아!"
"정들면 좋은 거죠."
유들유들하게 씩 웃는 청명에게, 청문이 고개를 내젓고는 말한다.
"청명아."
"예."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뭔지 아느냐?"
"회초리요?"
"……후회다."
"……."
청문이 낮게 말했다.
"나는 네가 아이들에게 경원시되는 것은 그리 두렵지 않다. 하지만 언젠가 네가 그것 때문에 후회를 겪을까 봐 두렵구나. 네가 겪을 후회는 다른 이들이 겪을 후회보다 몇 배는 깊고 무거울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이해가 가지 않더라도 내 말을 새겨들어 두거라. 그게 언젠가 네가 겪을 짐을 조금은 덜어 줄 것이다."
"……그러니까 애들 패지 말라는 소리시죠."
"그래, 이놈아!"
"알겠어요. 알겠어. 거 잔소리 한번 엄청 길게 하시네!"
"에잉!"
청문이 몸을 획 돌리고 말았다.
차라리 소귀에 경을 읽지!
"어어? 같이 가요! 사형!"
뒤따라 달려오는 청명을 흘끗 돌아보며 청문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 아이는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태어났다.'
좋은 일이지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검을 잡은 순간부터 검 끝에서 매화를 그려 내는 아이에게 다른 사제들은 바보천치로 보일 수밖에 없으니까.
바보로만 가득 찬 세상을 홀로 살아가는 이가 겪을 고통이 오죽하겠는가?
그런 청명을 바르게 이끄는 것이 사형인 그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사형. 저 사형이 하는 말이 뭔지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응?"
"그러니까 제가 사형을 따라가듯이 문파도 비슷하게 저를 따라온다는 거죠?"
"허……."
청문이 웃고 말았다.
"다르지, 이놈아. 어찌 그게 같겠느냐?"
"아. 어렵네."
쉽지는 않다. 하지만 언젠가는 청명도 그의 뜻을 알게 될 것이다. 긴 시간이 걸리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세상은 진정한 화산의 검수를 만나게 되겠지.'
이 자유로운 아이가 진정 책임의 의미를 알고, 그 책임을 짊어지고도 자유로울 수 있다면.
세상은 화산의 바람이 세상을 휩쓰는 것을 지켜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네, 사형."
"백공 사숙이 최근에 너를 좀 피하는 것 같던데. 혹시 무슨 일이 있었느냐?"
"어……. 아, 니, 요. 아무……. 어, 아무 일도 없었는데요."
"……팼냐?"
"아, 아니 그게 팬 건 아니고. 그냥 그…… 어……."
선조시여.
이놈을 어떻게 합니까. 이놈을!
"너는 오늘부터 나흘 동안 금식이다."
"헐. 너무하시는 것 아닙니까?!"
"시끄럽다, 이놈아!"
청문이 청명의 머리를 꽉 움켜쥐고는 당겨 옆구리에 꼈다.
"이런 망둥이 같은 놈!"
"아악! 아픕니다! 아프다구요! 사형!"
청문과 청명이 투닥거리며 화산의 산길을 내려갔다.
그들의 등 뒤에 어느새 피어난 매화가 가만히 웃음 지었다.
* * *
청명이 몸을 일으켰다.
"……."
살짝 주변을 둘러본 청명이 낯선 공간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에 잠시 침묵했다.
아.
꿈이구나.
청명이 다시 눈을 감았다.
'옛날의 꿈 같은 건 꾼 적이 없었는데.'
청명이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손에 잡힐 듯 생생한 청문사형의 얼굴을 다시 떠올리니 이상한 감정이 치밀어 오른다.
하지만 청명은 알고 있다.
과거는 과거일 뿐.
그는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자다. 왜 청명에게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과거의 기억에 흔들려 현재를 잃을 만큼 청명은 바보가 아니다.
"뭔 말을 하고 싶었던 겁니까? 사형?"
왜 굳이 이 시점에.
청명이 머리를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과한 생각이다. 꿈은 꿈일 뿐이지. 아마도 검총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는 것이 청명을 심적으로 괴롭힌 모양이다. 그러니 이런 꿈을 꾸는 거겠지.
"빌어먹을! 어떻게든 혼원단을 손에 넣었어야 했는데!"
청명이 빠득빠득 이를 갈았다.
이미 며칠이 지났건만, 도무지 감정이 가라앉지를 않는다.
혼원단은 단순한 영약이 아니다.
혼원단의 연단법은 연단의 능력을 잃은 화산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니 이토록 아쉬움이 깊은 것이다.
"끄응. 없는 걸 만들어 낼 수도 없고."
한참을 괴로워하던 청명은 결국 체념하며 머릿속의 미련을 떨쳐 버렸다.
연단법이야 어떻게든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지난 일은 버리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할 때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은…….
청명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마당으로 이어지는 대청에는 이미 그의 사형제들이 짐을 싸고, 걸터앉아 있었다.
"일어났냐?"
"응."
"무슨 잠을 그리 오래 자느냐? 몸이 안 좋더냐?"
"그런 건 아니야."
청명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다행이고."
백천이 봇짐을 둘러메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화산으로 떠나는 날이다.
하지만 못내 미련을 버리지 못한 청명이 한숨을 내쉬고는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 이어질 인연은 결국 이어진다. 이어지지 않았다면 인연이 아닌 게지.
'아니. 거 말씀 참 속 편하게 하시네!'
내가 왜 그렇게 발악을 했는데! 그놈의 혼원단 나한테는 별 필요도 없는 거!
화산 한번 살려 보겠다고 제가 이러고 있는데 그걸 그렇게 말하면 됩니까? 예?
- 다 네 복이니라.
"끄으으으응."
청명이 머리를 벅벅 긁어 젖혔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아니, 아니지. 죄를 짓기는 많이 지었지."
이래서 사형이 사제들 패지 말라고 했구나.
그때 지은 죄가 이리 돌아오다니.
"에휴."
한숨을 쉬는 청명을 보며 백천이 피식 웃는다.
"뭔 미련이 그리 많으냐.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아라. 이제는 그만 돌아가야지. 화산으로."
"……그래야지."
청명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날 한번 더럽게 좋네.'
먼 길을 떠나기에는 딱 좋은 날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