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아니!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5)
"안 죽었네."
"세상에, 저 안에서 살아 돌아오다니!"
"……잠깐. 그럼 신병은 어떻게 된 거지?"
누군가가 신병이라는 말을 꺼내자 분위기가 일변했다.
처음에는 분명 저 어마어마한 붕괴에서 저토록 많은 이들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그저 신기해했었다.
그러나, 어쩌면 저들이 신병을 가지고 생환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다시 욕심이 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떻게 하지?"
"어쩌긴! 뺏어야지! 다들 그러려고 이곳에 남아 있었던 것 아닌가?"
"하지만 무당과 개방이 있는데. 다른 이들도 만만히 볼 수 없는 이들이고."
"저 몰골을 보게! 저들이 지금 힘이나 쓸 수 있을 것 같은가?"
탐욕은 이성을 마비시킨다.
특히나 얻을 수 있는 것이 크면 클수록 이성과 도덕은 먼 곳으로 가 버리기 마련이다.
이들이 그러했다.
애초에 이곳에 좋은 마음을 먹고 온 이들은 없다. 더는 검총에 진입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이유는 하나뿐 아닌가?
죽여 뺏는다.
애초에 이런 일은 다 그런 법이다.
보물을 처음 손에 넣은 자가 마지막까지 보물의 주인이라는 법은 없다. 세상에 나온 보물은 다시 피의 쟁탈전을 거치기 마련이다.
모두의 눈에 탐욕이 어렸다.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 눈빛을 교환한 이들이 말없이 커다란 구덩이의 주변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안에서 나온 이들이 만만치 않으니 우선은 저들을 제압할 때까지는 같이하자는 무언의 묵계가 이루어졌다.
생환자들을 에워싸고 내려다보던 이들 중 한 사내가 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생환을 축하드리오. 허산자라고 하셨던가?"
허산자의 눈이 꿈틀했다.
"귀하는 누구시오?"
"그건 굳이 제 입으로 말씀드릴 필요가 없겠지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상황을 지켜보던 홍대광이 피식 웃고는 말한다.
"섬전창(閃電槍) 단사홍(段思弘)입니다. 절강에서 활동한다고 들었는데, 저자도 이곳에 왔군요."
슬쩍 홍대광에게 시선을 준 허산자가 고개를 들어 다시 단사홍을 바라보았다.
"단 대협이셨구려."
단사홍이 미간을 좁혔다.
굳이 무당에 이름을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리된 이상 얼굴에 철판을 깔고 갈 수밖에.
"하하하. 홍 분타주께서 제 이름을 알고 계시다니. 이거 영광입니다. 그보다 하나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오."
"신병은 어찌 되었습니까?"
허산자가 가만히 아래를 가리켰다.
"보고도 모르겠소?"
"그럼 신병 하나도 챙기지 못하고 간신히 나왔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럴 상황이 아니었소."
허산자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저 안에 신병이라 불릴 만한 것은 없었소. 이백 년이 지나는 동안 녹이 슬고 삭아서 문드러진 것들만 남아 있더군. 가지고 올라왔다고 해도 여러분이 생각하던 신병은 아니었을 것이오."
"허어."
단사홍이 안타깝다는 듯 미간을 찌푸려 보였다.
"그렇다면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도장. 강호는 워낙에 흉흉하니, 도장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그럼 어찌하겠다는 것이오?"
"간단합니다."
단사홍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저희가 도장들의 몸을 수색할 수 있게 해 주시면 됩니다. 정말 떳떳하다면 얼마든지 받아들이실 수 있지 않습니까?"
"저 작자가!"
"해보자는 건가?"
대답은 허산자가 아니라 주변에서 나왔다.
몸을 수색한다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무인과 무인의 관계에서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상대에게 몸을 완전히 내맡긴다는 건 목숨을 맡기는 것과 같다.
경계를 풀고 몸을 수색하게 만든다는 건 상대가 언제든지 암수로 사혈을 공격할 수 있도록 허용한단 말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단사홍은 무인의 묵계를 깨고 강짜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지 못하겠다면?"
"하하하. 도장. 상황이 그리 녹록치 않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오. 지친 그대들이 우리 모두를 감당할 수 있겠소?"
단사홍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죽고 싶지 않다면 안에서 얻은 모든 것을 내놓으시오. 그러면 목숨은 살려 주겠소. 만일 순순히 내놓지 않는다면 당신들은 모두 차라리 저 안에서 죽는 게 다행이었다고……."
"아니, 저 새끼가 뒈지려고!"
"……생각하게……. 응?"
단사홍이 눈을 크게 떴다.
바닥에 철푸덕 주저앉아 있던 웬 어린놈이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그를 향해 벽을 타오르기 시작한다.
'뭐지?'
순간적으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단사홍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 어린놈은 대체 뭘 믿고 무인들이 가득 들어서 있는 이곳까지 단신으로 뛰어오는 걸까?
그리고 더 이상한 게 있었다.
저 아이가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하고 있지만, 아래에서 올라온 이들 중 누구도 저 아이를 말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허산자마저도 뭔가 안타깝다는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 하자는 짓거린가?'
단사홍이 살짝 고민하는 그 순간이었다.
땅이 꺼져 생긴 절벽을 오르던 이가 빛살처럼 위로 솟구치더니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단사홍의 바로 앞에 내려섰다.
'어엇?'
놀란 단사홍은 자신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아직 애티를 벗지 못한 얼굴. 전신은 흙먼지로 뒤덮여 꼬질꼬질 했지만, 그럼에도 헌앙함이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다만 그 배어 나오던 훈훈함은 이내 온갖 짜증과 심술이 가득가득 들어찬 표정에 완벽하게 중화되어 버렸다.
"누구……."
"뭐? 죽고 싶지 않다면 뭐가 어쩌고 저째?"
"하……. 하하. 소협. 소협이 끼어들 상황이 아니라는 걸……."
퍼어어어어억!
순간적으로 단사홍의 의식이 사라졌다. 세상이 검게 암전한다.
짧게 끊겼던 그의 의식이 돌아왔을 때, 그가 본 것은 푸르디푸른 하늘이었다.
'하늘?'
내가 왜 하늘을 보고 있지?
그리고 그 순간.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결코 다쳐서는 안 되는 부위에서 어마어마한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에 눈이 절로 눈물을 짜내고 콧물이 마구 흘러나온다.
"악! 아아아악! 어어어어어어!"
단사홍은 바닥으로 추락하며 끊임없이 경련했다. 그리고 그제야 깨달았다.
저 어린……. 아니, 저 미친놈이 그의 사타구니를 걷어차 허공으로 날려 버렸다는 사실을.
쿵!
일직선으로 솟아올랐던 몸이 그 자리에 그대로 떨어졌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올라가기 전에는 꼿꼿이 서 있던 단사홍이 지금은 바닥에 쓰러져 파들파들 경련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아, 그래? 신병을 가지고 싶으셔?"
아니!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아! 의원! 의원에게 데려가 줘! 아무래도 터진…….
덥썩.
청명이 바닥에 쓰러진 단사홍의 멱살을 잡고는 끌어 올렸다.
"신병이 가지고 싶으면 가져야지! 저 밑에 있으니까 가서 잘 찾아봐."
"어?"
그리고 두말없이 단사홍을 냅다 던졌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악!"
단사홍의 몸뚱이가 허공을 가르며 붕 날아 정확하게 청명과 그 무리가 빠져나왔던 구멍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구멍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뭔가 처절한 비명이 울려퍼졌지만, 그 소리는 아주 빠르게 멀어졌고 이내 들리지 않게 되었다.
꿀꺽.
그 광경을 본 모든 이들이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킨다.
청명의 시퍼런 눈을 부라리며 흉흉하게 물었다.
"또 신병이 어디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사람?"
그리고 그와 동시에.
챙! 챙! 챙!
아래에 있던 생환자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기세에서 완전히 눌려 버린 이들이 감히 맞설 생각을 하지 못하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때 허산자가 입을 열었다.
"무당의 이름으로 맹세하겠소."
"……."
"우리는 아무것도 가지고 나오지 못했소. 그리고 저 아래에는 여러분이 생각하던 신병은 존재하지 않았소. 몇몇 신병으로 보이는 것들이 있긴 했지만, 저 붕괴에 견딜 수 있었을 거라 생각되지는 않소. 아마 크게 상했거나 부러졌겠지. 그래도 신병을 얻고 싶은 이들이 있다면 저곳을 파 보시오. 몇 년이 걸릴지는 모르지만 잔해쯤은 찾아낼 수 있을 것이오."
그 싸늘한 목소리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무당의 장로가 무당의 이름으로 맹세를 한다는 건 결코 가볍게 여길 만한 일이 아니다.
"그, 그 말을 믿어도 되겠소?"
"귀하는 지금 무당의 이름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오?"
다들 입을 다물었다.
조금 전이었다면 모를까 이미 한풀 기세가 꺾인 이들이 저 말에 저항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지금 우리를 보면 알듯이, 쇠붙이를 숨겨 나올 곳 따위는 없소이다. 아니면? 우리가 지금 도포라도 벗어 젖혀야 믿으시겠소?"
이성을 되찾은 이들은 결국 그 말에 수긍하고 말았다.
신병.
장검이나 장창. 여하튼 병기의 형태를 띤 것을 지칭하는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저들에게 신병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신병이 있었다면 가장 먼저 손에 넣었을 무당도 그저 그들의 송문고검을 들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또 확인할 놈 누구냐고! 나 바쁜 사람이니까! 빨리 나와!"
저놈이 너무 흉악하다.
저 어린놈이 섬전창 단사홍을 어찌 처리하는지 눈으로 보았는데 무슨 배짱으로 나서겠는가?
"……돌아가자."
"에이, 종쳤네!"
모두가 슬금슬금 물러나기 시작했다.
상황이 꼬였다는 걸 알았으니 최대한 이곳에서 빨리 벗어나 허산자들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게 만드는 게 이득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곳에서 저들 모두를 죽여 없앨 수 있다면 모를까. 그러지 못할 거라면 무당과 척을 지는 상황만은 피해야 하니까.
우르르 몰려왔던 중인들이 썰물처럼 적공산을 빠져나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청명이 살짝 이를 간다.
'여하튼 강호 놈들이란.'
저들에게 뭔가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건 이미 뼈저리게 실감한 지 오래다. 강호인들이 최소한의 양심이라는 게 있었다면 화산이 그 꼴이 되지는 않았을 테니까.
바닥에 침을 탁 뱉은 청명이 다시 아래로 뛰어내렸다.
탁.
화산의 사형제들 사이에 선 청명이 고개를 들어 허산자를 바라본다.
안에서 많은 일들을 겪기는 했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눈에 원한 같은 것은 없었다.
청명은 무당에 원한을 가질 필요가 없고, 허산자는 어쨌건 청명 덕에 목숨을 구했다. 그러니 원한이 있다 한들 따져 물을 수 없는 것이다.
"소도장."
"네."
"감사하오."
허산자가 깊숙이 포권 한다.
"덕분에 살았소."
"됐어요. 뭐 대단한 일 했다고요."
청명이 아래쪽을 힐끔 바라보고는 한숨을 푹 내쉰다.
'고생만 죽도록 하고, 결국 아무것도 못 얻었네.'
허산자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씁쓸한 얼굴로 말한다.
"우리는 그만 무당으로 돌아가겠소. 결국 이 모든 것이 욕심이었던 게지. 가진 것을 모두 소화하지도 못하면서 귀물(貴物)에 욕심을 내었으니 어쩌면 이 모든 게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소."
도인다운 말이었다.
"내 제안은 생각해 보았소?"
"그럴 일은 없어요. 나는 화산의 제자니까."
그것만은 결코 변할 수 없다.
청명을 가만히 바라보던 허산자가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지. 그래야겠지. 어쩌면 소도장은 내 생각보다 더 큰 사람인지도 모르겠군."
"그냥 말코일 뿐이에요."
"허허. 말코. 말코라. 그것 참."
허산자가 못 당하겠다는 듯 고개를 슬쩍 내젓고는 조금 더 차가워진 어투로 일갈한다.
"무당은 화산을 기억할 것이오."
"……."
"결코 우리가 적이 되지 않기를 바라겠소."
말 자체는 온건했지만, 그건 분명한 경고였다. 하지만 청명은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이제는 말싸움을 하는 것도 지친다.
"그럼."
무당은 그리 떠나갔다.
그러자 홀로 검총에 들었던 이들과 여타 문파들도 아쉬움을 뒤로하고 검총을 떠나갔다.
오히려 그들은 미련을 정리하는 게 쉬웠을 것이다. 검총 안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똑똑히 보았으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산신룡. 우리는 힘들어서 오늘 낙양까지는 못 가겠다. 화영문에서 하루 재워 줘라."
"……아무리 거지라지만 너무 뻔뻔한 거 아냐?"
"부탁 좀 하자. 진짜 뒈질 것 같아서 그런다."
청명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급박한 상황에서도 남을 챙기던 이들이 개방이다. 바닥부터 이곳까지 파 올라오는데도 무당과 청명 다음으로 기여를 했으니 힘들기는 할 것이다.
"저기 문주님 있으니까 거기다 물어보세요."
청명의 턱짓에, 근처에 있던 위립산이 다가오며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누가 개방의 영웅들을 마다하겠소. 가십시다. 내 좋은 음식과 술을 낼 것이오. 생환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말이오."
"오! 감사합니다, 문주님!"
홍대광과 개방도들이 모두 기뻐하며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청명이 낮은 한숨을 내쉬고는 사형제들을 돌아보았다.
백천이 허탈한 얼굴로 청명의 곁에 다가왔다.
"결국은 아무것도 없었군."
"그 망할 영감탱이에게 모두 당한 거지."
화산도 무당도, 그리고 개방과 다른 문파들까지.
약선이라는 이백 년 전의 기재에게 모조리 놀아난 것이다.
"끄으으응."
청명이 머리를 벅벅 긁어 대었다.
'열받아 돌아 버리겠네!'
눈앞에 그 늙은이가 있다면 사흘 밤낮 동안 패 버리고 싶은 기분이다. 하지만 약선은 이미 죽었고 그가 화풀이를 할 곳은 없다.
잠시 동안 낑낑대며 기분을 가라앉힌 청명이 이내 허탈하게 말했다.
"……가자."
"음."
"미련 가져 봐야 의미가 없지. 열받는데 술이나 한잔하고 곯아떨어져야겠어."
"도인이라는 놈이 술이라니!"
"안 마셔?"
"……마시지."
"가자고."
터덜터덜 걷는 청명의 뒤를, 화산의 제자들이 한숨을 푹 내쉬며 따랐다.
더없이 좋은 경험을 했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일이다.
이렇게.
검총에 들었던 화산은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고 검총의 일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심지어 청명마저도.
이 순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