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아니!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2)
목함을 잡은 허공의 눈이 파르르 떨린다.
'이, 이게 혼원단의…….'
그도 무당의 장로다.
상황을 보고도 이 물건이 무엇인지 짐작 못 할 바보는 아니다. 마침내 혼원단을 손에 넣었다는 사실이 그의 가슴을 더없이 벅차게 만들었다.
그 순간 허산자가 뒤로 훌쩍 물러나 허공의 옆에 선다.
"이리로!"
"예!"
허산자가 목함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허공은 그 즉시 검을 뽑아 들고 허산자의 앞을 막아선다. 청명이 달려들더라도 문제가 없도록.
하지만 청명은 의외로 달려들 생각이 전혀 없는 듯 허탈한 얼굴로 그 둘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허산자는 살짝 떨리는 손으로 목함을 움켜잡고는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이 고생을 하고서야…….'
처음 예상했던 것에 비해 너무나 큰 고난을 겪었지만, 결국은 성공했다는 생각에 절로 몸에 힘이 들어간다.
물론 아직 무사히 빠져나가는 일이 남았지만, 이쯤만 해도 첫 목표를 팔 할은 달성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도 확인은 해야겠지.'
허산자가 목함의 뚜껑을 움켜잡았다.
혼원단. 그리고 혼원단의 제조법.
전자가 나오면 작은 성과. 후자가 나오면 큰 성과. 그리고 둘 다 나오면 최상이다.
살짝 마른침을 삼킨 허산자가 단숨에 뚜껑을 열어젖혔다.
이내 그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부릅떠졌다.
"이……."
허산자의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얼마나 격하게 떨리는지 그를 등지고 있던 허공마저도 뭔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챌 정도였다.
허공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사형?"
허산자의 얼굴은 수십 년을 그와 함께했던 그조차 해석할 수 없을 만큼 복잡 미묘했다.
"왜……."
허산자는 떨리는 손으로 목함 안을 더듬거리며 헤집었다. 그 손길이 점점 더 격해지더니…….
"왜!"
허산자의 입에서 노성이 터져 나왔다.
"왜 없는 거냐! 왜 아무것도 없어!"
급기야 그는 상자를 뒤집어 털었다. 하지만 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혹여나 상자 자체가 뭔가 비밀을 품고 있지는 않은가 싶어, 몇 번이고 살펴보고 털어 가며 확인했다. 그러나 역시 그의 손에 들린 것은 그저 평범한 상자일 뿐이었다.
철저한 농락.
그 외에 어떤 생각을 또 할 수 있으랴.
허산자의 두 눈에 핏발이 선다. 얼마나 대노했는지 눈의 혈관이 다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약서어어어어어어어언! 이…… 이 개 같은 놈이!"
허산자가 손에 든 목함을 바닥에 내팽개쳐 산산조각 내 버렸다.
심지어 그러고도 혹시나 싶어 그 잔해를 살펴보았지만, 숨겨진 양피지 같은 건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말 그대로 빈 상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허허……."
없다고?
이 고생을 하며 여기까지 왔는데 목함 안에는 아무것도 든 게 없고, 신병이라는 것들은 다 녹슬고 바스러졌다고?
그렇다면 대체 이 검총이라는 건 무엇 때문에 존재했단 말인가?
허산자가 밀려오는 허탈함과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던 바로 그때였다.
"야, 이……!"
청명이 답답해 미치겠다는 듯 가슴을 후려치기 시작한다.
"에라이! 나이를 거꾸로 처먹은 것들아!"
"……."
"여기까지 오면서 그렇게 당해 놓고 그걸 건드려?! 네놈들 눈은 옹이구멍이냐! 욕망이 어쩌고 욕심이 어쩌고 있는 대로 처씨불여 놓고는 지들이 욕망에 져서 이런 짓을 저질러?"
허공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놈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욕망? 욕심?
대체?
둘 다 영 못 알아듣는 눈치를 보이니 청명은 답답함에 가슴을 치다 못해 머리를 벅벅 긁어 젖혔다.
'어쩐지 불안하더라.'
검총을 돌파하는 내내 느낀 것.
그건 약선이 검총에 들어온 이들에게 호의는커녕 악의를 보이고 있단 점이다.
시험?
천만에.
'이따위로 하는 시험이 어디에 있어.'
천장을 무너뜨려 압사시키려 들고, 흡혈편복에게 피를 빨려 죽게 만들고, 심지어는 강시까지 숨겨 두었다.
실패해도 죽지 않아야 시험으로써의 의미가 있다.
한 치의 실수만 있어도 죽음밖에는 남지 않는 곳에서 무슨 시험을 한다는 말인가?
청명이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그렇다면 저 목함.
저 목함에는 아무런 장치가 없을 것인가?
그럴 리가 없지.
"그걸 건드리면 무슨 사달이 날 줄 알고 그걸 건드려! 이 호랑말코 같은 것들아! 아오, 내가 속이 터져서!"
턱!
청명이 폭풍 같은 쌍욕을 퍼붓는 와중에 무당과 화산의 제자들이 속속들이 도착했다. 난전을 벌일 각오를 단단히 다지며 절벽을 탔던 그들은 위로 오르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기묘한 대치에 그저 숨을 죽일 뿐이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냐?"
결국은 참지 못한 허공이 묻고 말았다.
그러자 청명이 기다렸다는 듯이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좀 해라! 거기 아무것도 없잖아!"
"그렇지."
"그럼 이제 뭐가 남았겠냐!"
그 순간이었다.
드르륵.
모두의 고개가 획 돌아간다.
바위.
목함이 놓여 있던 바위가 흔들리고 있었다.
"……설마."
허공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진다.
분노로 이성을 반쯤 잃었던 허산자도 이 생각지 못한 상황에 퍼뜩 정신을 차린 듯 당황한 얼굴로 바위를 바라보았다.
흔들림이 점점 커진다.
"무, 무슨!"
"아니, 갑자기 저게 왜……?"
마침 부득부득 절벽 위로 올라온 백천은 허산자가 내팽개친 목함의 잔해와 흔들리는 바위를 보고 곧장 상황을 파악했다.
그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온다.
"……이것마저 함정이라는 건가?"
"끄으으응."
청명이 두 손으로 얼굴을 박박 문질렀다.
'그래, 이럴 때가 아니지!'
혼원단이고 나발이고 살아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청명은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저기!'
빛이 쏟아지는 위쪽.
저곳이 광명…….
"어?"
하지만 그 순간 청명은 보고 말았다.
바위에서 시작된 떨림이 절벽을 타고 오르더니 천장에 가 있던 균열에 닿은 것이다.
그와 동시에 검총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듯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히이이이익!"
"뭐, 뭐야! 왜 이러는 거야?"
"설마?!"
하지만 아무도 그 뒷말을 꺼내지 못했다. 이어질 상황이 너무 명백하지만, 괜한 입방정을 떨었다가 정말로 '그 사태'가 벌어질까 봐 그저 에둘러 놀라움만 표현할 뿐이었다.
청명의 고개가 천천히 위로 올라간다.
어느새 청명의 등 뒤에 나란히 선 화산의 제자들도 일제히 빛이 쏟아지는 위쪽과 동굴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결국 청명이 입을 열었다.
"사숙."
"응?"
"아무래도 저거 무너질 것 같지?"
"내 눈이 틀린 게 아니라면 그럴 것 같은데."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될까?"
"죽겠지."
"그치?"
청명이 빙그레 웃었다.
그러다 돌연 발작처럼 외쳤다.
"아니!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약선! 이 미친놈아!"
약선은 개뿔이!
어느 정신 나간 놈이 이런 미친놈에게 선(仙)이라는 온화하고 지고한 별호를 붙인 걸까? 약마(藥魔)라든가, 어? 약쟁이로……. 응? 약쟁이? 아, 이건 아니고.
우르르르르르르르릉!
그 순간.
귀를 찣는 천붕지음이 울리더니 검총이 크게 뒤흔들렸다.
그리고…….
쩌적.
쩌저저저적.
모두가 똑똑히 들었다. 그리고 보았다.
천장에 길게 금이 가기 시작한다. 가로세로 할 것 없이 종횡을 가르는 균열이 커다란 거미줄처럼 새겨지기 시작했다.
청명이 울화통이 터진다는 듯이 고함을 내질렀다.
"내가 여기만 나가면 저 무당 새끼들 싸그리 패 죽여 버릴 거야! 에라, 이 말코 새끼들아! 눈깔이 뒤집혀도 정도가 있지! 세 살 먹은 애새끼도 그런 병신 짓은 안 하겠다!"
허산자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까마득한 어린놈에게 이런 막말을 듣는다는 게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이겠는가? 하지만 도통 반박할 말이 없다.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고 뻔한 함정에 손을 댄 건 분명 무당이었으니까. 덕분에 이곳의 모두가 죽게 생겼다.
"무, 무당! 무당은 뭐 하는 거요! 무슨 상황인지 모르지만 해결을 해야 할 것 아니오!"
"무, 무너진다! 무너진다고! 우린 다 죽었어!"
"어떻게 좀 해 보라고!"
추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절벽 위로 이제야 막 기어 올라온 이들은 지금까지 자신이 해 댄 짓들은 모두 잊어버렸는지, 무당을 탓하고 욕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무당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거란 사실은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지운 듯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당이 이들을 욕해 댄 건 아니었다.
어쨌든 무당은 어떻게든 이 사태를 해결하려 했다.
하나.
콰르르르르르르르릉!
애석하게도, 그들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커다란 천둥소리를 연상케 하는 굉음과 함께 금이 갔던 천장이 끝내 그대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백천이 기겁을 했다.
이곳은 동그란 원통형의 공간. 그리고 모두가 이 위로 기어 올라왔다. 다시 말하자면 이곳에는 달아날 곳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탈검무흔! 이 미친 놈!"
애초에 이곳에 무인들을 잔뜩 모아 죄다 몰살시켜 버릴 작정이었던 게 분명하다. 대체 사람이 얼마나 악의에 차 있어야 이런 미친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청명아!"
"걱정하지 마! 나 청명이야!"
청명이 검을 움켜잡고는 무너져 내리는 천장을 응시한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는데, 천장이 무너지는 정도로 내가……."
어?
돌연 청명의 고개가 삐딱하게 꺾인다.
"사숙."
"으응?"
"솟아날 구멍이 없는데?"
"……."
백천의 볼이 푸들푸들 떨린다.
"없으면 어떡해, 이 새끼야!"
"아니, 없는 걸 뭐 어떡하라고! 저거 보라고!"
작은 동산만 한 바윗덩어리들이 떨어져 내린다. 애초에 이건 검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화산의 삼대제자 청명은 방법을 찾아낼 수가 없다. 매화검존 청명이 직접 온다면 모를까.
"내가 뭔 천마도 아니고! 저걸 뭐 어쩌라고?"
"그래도 어떻게든 해 봐야 할 거 아냐!"
"사숙, 그거 알아?"
"뭐?"
"어차피 사람은 모두 살다 가는 거지. 집착을 버려."
"……야, 이 또라이 새끼야……."
허탈하기 짝이 없는 백천의 목소리가 모두의 심정을 대변해 주는 것 같다. 그들의 면면에 절망이 깃들기 시작했다.
"베어 내라!"
그때, 우레와 같은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무당의 제자들은 전력을 다해 저것들을 베어 내라! 지금 당장!"
"예!"
허산자의 고함 소리를 신호로, 무당의 제자들이 기묘한 형태로 늘어서기 시작했다.
'태극검진인가?'
본능적으로 가장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익숙한 형태를 찾는 모양이었다.
하나.
'말이 되는 짓거리를 해야지!'
저걸 검으로 베어 낼 수 있다면 세상에 못 할 게 뭐가 있겠는가? 혼자서 무림 정복이 아니라 중원 정복도 하겠다.
'생각해라.'
청명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늘이 무너졌다고 하늘로 솟아나려는 건 멍청한 짓이다. 이곳은 검총. 이곳의 모든 것은 약선의 의도대로 돌아간다.
그럼 약선은 정말 이곳에 든 이들 모두를 죽이려 했던 것인가?
'아니야. 방법이 있을 거야, 반드시!'
생각해라. 생각. 생각…….
"으아아아아아! 빌어먹을 내가 언제 머리를 굴려 본 적이 있어야지!"
그건 내 역할이 아니라고!
"아니, 이 미친놈이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곳……."
청명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뒤흔들렸다.
말도 안 되는 곳.
기형적이기 짝이 없는 곳.
입구를 통해 한없이 깊은 지하로 떨어지고, 점점 좁아지는 길을 지나 수많은 고난을 겪는다. 그 길은 결국 하나로 합일되고 이곳으로 이어진다.
기어오르고 또 기어올라 마침내…….
청명의 눈이 번쩍 뜨였다.
'광명!'
아마 그것은 목표. 아니! 성취! 아니……. 여하튼!
"저긴 없어!"
저건 아니다! 약선이라면 분명 저기가 아닐 것이다. 그렇게 호락호락할 리가 없다.
그렇다면?
청명의 고개가 아래로 획 꺾였다.
그가 바라본 곳은 바닥이었다.
"뛰어내려어어어어어어어어!"
청명의 고함 소리가 동굴을 무너뜨릴 듯 강렬하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