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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61화 (161/1,567)

161화. 아니!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1)

"빨리! 더 빨리!"

"사, 사숙! 더는 속도를 못 냅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저기 안 보이느냐?"

백천의 목소리에 분노와 다급함이 담겼다. 미칠 듯한 속도로 절벽을 오르고는 있지만, 처음의 차이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 이대로라면 무당의 제자들이 절벽을 먼저 오르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청명은 무당의 제자들을 혼자 상대해야 한다. 아무리 청명이 인간 같지 않은 놈이라지만, 저 많은 무당의 제자들을 홀로 상대할 수는 없다.

그건 청명이 아니라 청명 할아버지가 와도 불가능한 일이다.

'아니, 청명 할아버지가 와서는 안 되지만, 할아버지가 된 청명이 오면 가능하려나?'

여하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네 사제 죽는 꼴 보기 싫으면 젖 먹던 힘까지 짜내라! 먼저 간다!"

"헐?"

백천이 지금까지보다 더 빠른 속도로 절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를 유이설이 바짝 뒤쫓는다.

"빌어먹을!"

아무리 같은 수련을 했다고는 저들은 이대제자, 그리고 조걸과 윤종은 삼대제자다. 아직은 두 배분 사이에는 따라잡을 수 없는 격차가 있었다.

"걸아! 힘내라! 더 빨리 가야 한다!"

"주, 죽을 것 같습니다!"

"우는소리 하지 말고!"

윤종이 이를 악물었다.

백천에게 뒤지는 게 자존심 상하는 건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에게 백천은 우상 같은 사람이다. 윤종이 지금 화가 치민 이유는 청명이 위험에 처할지도 모르는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어떻게든……. 어?"

그때 윤종의 눈에 기이한 것이 들어왔다.

위로 올라가던 무당의 무리 중 일부가 몸을 돌리더니 화산의 제자들 쪽으로 기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쟤들 뭐 하냐?"

"우리 막으러 오는 것 같은데요?"

"……거참 기이하네. 그렇지?"

"그러게 말이에요."

참 이상하지.

"아무 짝에도 쓸모없을 것 같던, 절벽에서 싸우는 훈련이 이런 데서 도움이 될 줄이야."

윤종이 검을 뽑았다. 그와 동시에 조걸도 검을 뽑아 들었다.

평지에서 저만한 무당제자를 상대한다?

에이.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일단 눈에 보이는 이들 중 그보다 어려 보이는 이가 없다. 최소 진자 배고, 무자 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절벽 위.

그리고 이쪽은 절벽 위에서 그 청명의 검을 받아야 했던 이들이다.

"무덤을 파시네, 무덤을!"

윤종이 기세 좋게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무당 제자들을 향해 빨빨빨 기어갔다.

그 모습을 뒤에서 보던 조걸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진짜 볼썽사납네."

* * *

"잔재주를!"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신병들을 보며 허산자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하지만 잔재주라 해서 쉽게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신병이 왜 신병인가? 검기를 가르고, 내력으로 강화한 몸을 잘라 버릴 수 있기 때문에 신병인 것이다.

저 검을 일일이 피해 낼 수 없으면…….

"음?"

그 순간 허산자의 눈이 살짝 커졌다.

'신병이……?'

날아드는 검에 예리한 기운이 조금도 없다. 녹이 슬고 이가 빠져 흉물스럽기 짝이 없는 고철 덩어리만이 보일 뿐이다.

"뭐냐?"

카앙! 카아아앙! 카앙!

허산자가 검을 들어 날아드는 신병을 쳐냈다. 예기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검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간다. 그중에서는 허산자가 가볍게 후려친 힘을 감당하지 못하여 반 토막이 나 버린 것들도 있었다.

"이게 무……."

파아아앗!

"헉!"

그 썩어 버린 검들 사이에서 가공할 예기를 가진 검이 날아든다.

허산자가 기겁을 하여 몸을 뒤집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이런 것이 날아왔다면 침착하게 대처했겠으나, 당황한 와중에 진짜 신병이 날아드니 제아무리 그라도 놀랄 수밖에.

그리고.

으라차아아아아아!

청명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달려들어 허산자의 옆구리를 후려쳐 온다.

"큭!"

카아아아앙!

허공에서 검을 들어 막아 내기는 했지만, 몸이 튕겨 나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절벽 밖으로 튕겨 나간 허산자가 입술을 질끈 깨문다.

"끝까지 잔재주를 부리는구나!"

허산자가 몸을 뒤집어 검을 앞으로 던졌다. 그리고는 몸을 가볍게 만들어 검이 날아가는 힘을 주축으로 다시 절벽 위로 올라섰다.

청명이 그 광경을 보며 혀를 찼다.

'힘 빼게 생겼네.'

저대로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주었다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그리 쉽게 끝날 이가 아니다.

한편 절벽 위에 선 허산자는 눈을 찌푸리고 바닥에 널브러진 검들을 바라보았다.

"……이건."

"그래 봐야 검이니까."

"……."

다시 봐도 역시 잔뜩 녹이 슬어 붉게 물들어서 형편없는 모양새다.

'하긴, 생각해 보면 이게 맞겠지.'

신검이라 해 봐야 어차피 철로 만든 물건. 이런 습기 가득한 지하에 이백 년이나 방치된다면 녹이 슬고 삭아 버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개중에는 아직까지 예기를 간직한 검들도 간간이 보였다. 다시 말하자면 저 검들은 이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진정한 신병들이라는 소리다.

'그래, 어차피 헛된 것.'

허산자의 귀에 약선의 비웃음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검총에 들어온 이들의 목적은 신병이기를 손에 넣는 것이다. 탈검무흔의 정체가 약선이라는 것을 아는 이들은 무당과 개방, 그리고 소림을 비롯한 몇몇 문파밖에는 없으니까.

그마저도 약선의 제자가 실수로 흘리는 바람에 세상에 알려졌다.

거꾸로 말하면 약선은 검총을 만들 때, 훗날 찾아오는 이들이 오직 신병만을 노릴 것이라 생각했을 거란 소리다.

이 검들이 썩어 갈 것을 과연 약선이 몰랐을까?

그럴 리가 없다.

그가 정말 이 검들을 후세에 전하려 했다면 이런 환경이 아니라 조금 더 소중하게 보관했을 것이다. 습기 가득한 동굴에 꽂아 두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후인들을 농락이라도 해 보겠다는 생각이었소? 그대 역시 그리 훌륭한 인간은 아니었구려."

허산자의 시선이 목함으로 향했다.

신병들이 어찌되었건 상관없다. 그의 목적은 처음부터 저것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건 아마 청명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청명 역시 바닥에 떨어진 신병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있다.

"아무래도 목적이 같은 모양이구나."

"저 검들 가져가겠다면 그냥 보내 드릴게요."

"농이 심하구나."

"에이. 거 욕심이 없으시네."

아니, 욕심이 많은 건가?

청명이 검을 앞으로 겨눴다. 아무래도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한 건 청명 쪽이다. 허산자를 빨리 쓰러뜨리지 못하면 무당의 다른 장로들까지 이곳으로 올라올 것이다.

'그럼 답이 없지.'

한 주먹이 열 주먹 못 당한다는 건 세상의 진리다. 심지어 그 천마 놈도 이 진리를 피해 가지 못했다. 청명은 그 진리가 옳은지 그른지 몸소 실험해 볼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갑니다!"

"성격이 급하구나!"

"거참, 말 많으시네! 무량수불이다!"

청명의 검이 부드럽게 허공을 유영했다.

"흠?"

그 순간 허산자의 기세가 바뀐다. 청명의 검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청명의 검 끝에서 붉은 꽃송이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허산자는 저도 모르게 경악에 가득찬 탄성을 토했다.

"매화검법? 정말 매화검법을 복원했구나!"

'참나, 아닌 척하더니 관심 더럽게 많았네.'

화산이 매화검법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물론 지금 청명이 펼치는 것은 매화검법이 아니라 칠매검이지만, 허산자의 눈에는 그리 보이겠지.

붉은 꽃잎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피어날 리가 없는 곳.

매화가 자라날 수 없는 동굴 속에 붉은 매화가 피어난다. 그리고 그 매화는 일제히 개화하여 허산자를 향해 날아들었다.

허산자가 검을 아래로 내린다.

하단세.

가장 안정된 자세이자 무당의 검이 시작하는 곳.

그 검이 묵직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원(圓).

허산자의 검이 이내 자신의 앞에 커다란 원을 그려 냈다.

원은 곧 근원(根源). 그리고 모든 것이 시작되는 원점(原點).

태초에 단 하나의 세상이 있었으나 그 세상은 음(陰)과 양(陽)으로 나뉘며 만물을 창조해 냈다.

결국, 세상의 시작은 음양. 그 음양이 곧 태극(太極)이라.

"하아아아앗!"

허산자의 검이 그려 낸 원이 반으로 나뉘더니 이내 검고 하얀 두 가지 기운으로 나뉘어 휘돌기 시작했다.

태극혜검(太極慧劍).

무당의 최고위 무학이자, 무당을 무당으로 불리게 만드는 천하의 절기.

그 태극혜검이 마침내 허산자의 손을 통해 구현된 것이다.

이미 무진이 청명에게 태극혜검을 사용한 적이 있긴 하지만, 무진이 보여 준 것은 그저 껍데기를 흉내 낸 어설픈 검초일 뿐이었다. 즉, 혜검이라 불릴 자격이 없는 것이었다.

하나 지금 허산자의 검 끝이 그리는 태극은 분명 그 도(道)에 맞닿아 있었다.

날리던 청명의 꽃잎들이 휘도는 태극에 휘말려 들어간다.

부드럽고 강하다.

상반되는 두 가지의 성질이 녹아 난다. 부드럽게 꽃잎을 빨아들이고 강맹하게 분쇄한다.

"그 나이에 매화를 피워 내다니!"

회유할 수 없다면 반드시 쓰러뜨려야 한다. 허산자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아직 놀라기는 이르죠!"

청명의 검이 다시 한번 휘둘러진다.

상극(相剋).

과거에도 느꼈지만, 화산이 무당을 이기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히 무학이 약해서가 아니다. 무당의 부드러움은 화산의 날카로움과는 상극이다.

쾌속하고 빠른 검은 언제나 부드러운 후발제인에 그 약점을 드러내는 법이니까.

하나, 그뿐.

상극이면 어떤가?

불은 물을 부으면 꺼지지만, 큰 불은 물을 맞으면 더 크게 타오르는 법. 모든 성질은 더 강한 힘으로 극복할 수 있다.

'와라!'

단전에 웅크린 진기가 청명의 의지에 호응한다. 티 없이 맑은 기운이 단전을 빠져나와 육체를 휘돌고 이윽고는 검 끝에 머무른다.

피어난다.

피어나고 또 피어난다.

작은 숲을 이루었던 매화가, 작은 동산을 뒤덮을 만큼 피어나고 또 피어난다.

이내 눈에 보이는 모든 곳이 매화로 뒤덮인 것 같은 모습으로 화했다.

칠매검이 아니다.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

과거 종남이 훔치려 했으나 진의(眞意)만은 가질 수 없었던 검초.

매화분분(梅花紛紛)!

휘날리고 또 휘날린다. 봄바람에 눈처럼 휘날리는 매화 잎처럼.

허산자는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매화의 바다에 일순 넋을 놓았다.

'어찌…… 이런 검초가?'

모든 것의 시작은 태극이라.

곧 태극을 검에 담는다는 것은 세상을 검에 담는 것과 같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이 검이 그에게 말한다.

근원만이 모든 것이던가?

시작이 모든 것이던가?

그렇지 않다.

세상은 스스로 그러한 것(自然).

태극이 도(道)를 담는다면 새벽녘 잎 끝에 맺히는 이슬에도 도는 담겨 있는 것.

그 모든 것이 도이고. 그 모든 것이 자연이다.

매화 잎은 그저 휘날릴 뿐이지만, 그 안에는 세상의 이치가 담겨 있다.

"하아아아앗!"

"으랴아아아앗!"

꽃잎들과 태극이 충돌하며 거대한 폭풍이 휘몰아쳤다.

아직 절벽 위에 도착한 이가 더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누구라도 이곳에 있었다면 튕겨 나간 매화과 태극의 파편에 끔찍한 꼴이 되어 버렸을 테니까.

"끄으윽!"

뒤쪽으로 튕겨 나간 허산자가 가슴께를 움켜쥔다.

'내 검을 뚫어 냈다고?'

그의 가슴께가 피로 물들어 있다. 그뿐 아니라 전신 곳곳이 날카롭게 베여 피를 뿜어낸다.

'놈은?'

허산자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건너편에 드러누워 있는 청명의 모습이 보인다.

"끄으으으응."

청명이 힘겹게 몸을 일으킨다. 아무래도 저놈도 멀쩡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호각?'

아니, 어쩌면 이쪽이 조금 밀린 걸지도 모른다.

가슴속에 경의가 인다.

이 순간 허산자는 저 어린아이에게 참을 수 없는 경의를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위기감도 커졌다.

"거 영감탱이 더럽게 세네."

청명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는 바닥으로 침을 탁 뱉었다. 침이라기보다는 피에 가깝다.

"이제 다음으로 끝이다."

"바라던 바예요."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하고는 조용히 심호흡을 했다.

하지만 둘 모두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이곳은 비무장도 아니고, 둘만의 결투가 벌어지는 곳도 아니다. 그리고 지금 둘은 승부를 겨루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사형!"

심호흡을 하던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간다.

허공(虛空).

마침내 허산자의 사제. 허공진인이 절벽을 타올라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순간 허산자의 눈이 흔들렸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깨달은 그가 목이 찢어져라 고함을 질렀다.

"사제! 저 목함! 목함을 잡아아아아아아!"

허공의 고개가 격하게 돌아간다.

그의 눈에 중앙의 바위 위에 놓인 목함이 선명히 들어왔다.

"예!"

허공이 지체 없이 중앙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 순간 청명이 비명을 질렀다.

"안 돼에에에에에에!"

청명은 그 즉시 허공에게 몸을 날리려 했다. 그러나 그 앞을 허산자가 빠르게 막아선다.

"여기까지다, 이놈!"

"아니, 그게 아니라……!"

허공이 목함을 움켜잡는 모습이, 청명의 눈에 똑똑히 틀어박힌다.

"아……."

……망했다.

아오, 이 병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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