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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55화 (155/1,567)

155화. 진짜 무정함이 뭔지 알려 주지. (5)

공동 안이 침묵으로 가득 찼다.

"……."

그 거력부 막회조차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그조차도 대라검을 쉽게 이긴다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아니, 그가 대라검과 승부를 겨뤘다면 목숨을 걸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애송이가 그 대라검을 벌레 잡듯이 죽여 버렸다.

순간적으로 현실감이 사라진다.

서로 죽고 죽이는 전장에서 현실감을 잃는다는 건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서 펼쳐진 일련의 사태를 그대로 믿으라는 것 역시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저……."

막회가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다시 꾹 다문다.

할 말이 없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바닥에 떨어진 대라검의 목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있다. 그 표정이 지금의 사태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심지어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감정까지 대변한다.

꾸우우욱.

도집을 움켜잡은 조명산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간다.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의 감각은 정확했다.

저놈은 절대 도사 같은 게 아니다.

차라리 살귀(殺鬼).

강하고 말고의 문제를 논하자는 게 아니다.

저놈은 분명 수도 없는 전투를 치렀고, 그 과정에서 피의 강을 만들고 시체의 산을 쌓은 놈임에 분명했다.

차라리 광포한 살기를 내보였다거나, 짐승 같은 야생성을 보였다면 다른 가정을 세우기라도 해 봤을 것이다.

그러나 눈앞의 광경을 본 이상 확신할 수밖에 없다.

저놈은 사람의 목을 베는 것을 마치 나뭇가지에서 나뭇잎을 따 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해 버린다. 그 말인즉슨 저놈은…….

'살인에 더없이 익숙하다.'

조명산이 마른침을 삼켰다.

'어쩌면 이곳이 내 무덤이 될 수도 있겠구나.'

어느새 자신의 등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는 것을 깨달은 조명산은 마침내 결심을 굳히고 몸을 일으켰다.

"합공합시다."

"……."

"뭐라……. 뭐라 했소?"

"합공하자고 했소."

그의 주위에 있던 이들이 청명에게서 눈을 떼고 조명산을 돌아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경악과 분노가 어려 있었다.

"지금 저 어린놈을 합공하자고 한 거요?"

"그 주둥아리 닥치는 게 좋을 거요. 강호에서 나이 같은 건 아무런 의미가 없소. 중요한 건 강함이지. 그리고 저자는 절대 강자요. 그것도……."

조명산이 입을 다물었다.

의미가 없겠지.

그가 아무리 설명해도 저자가 얼마나 살인에 익숙한 자인지를 이해시킬 도리가 없다. 이건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감각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감각이 외치는 소리를 이들에게 어찌 설명하라는 말인가?

"여하튼 합공하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죽소."

황당하기 짝이 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 황당한 소리가 거짓이 아니라는 것은 이곳의 모두가 알고 있다.

모두 강호에서 굴러먹을 대로 굴러먹은 이들이다. 눈앞에서 벌어진 싸움을 보고도 상대의 전력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저 대라검의 목을 베기까지 조금의 피해도 입지 않았다. 그러니, 실제로 대라검과 청명이라는 놈의 실력에는 보이는 것 그 이상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청명이 체력을 보전하지 않고 제대로 힘을 쓰려고 작정했다면 대라검은 일 검에 목이 달아났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남은 사람들은 그 정도의 상황 파악은 가능한 이들이었다.

"어찌 저런 야차(夜叉) 같은 놈이……."

산동쾌검 손명이 낮은 신음을 흘렸다.

정확하게 무엇이 대단한지 집어낼 능력은 없지만, 저 어린놈의 능력이 그들로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수준에 도달했다는 건 확실하다.

손명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합공합시다."

"……."

손명의 말에 다들 침묵을 지켰다.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살아야 지킬 수 있는 거요. 그리고 우리가 이곳에서 합공을 한 걸 누가 알겠소이까?"

그들이 어린 화산의 제자를 합공했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설사 살아남는다고 해도 비웃음거리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강호인에게 있어서 비웃음은 결코 참아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보는 눈이 없는 지하의 암실.

그들만 입을 닫는다면 누가 청명을 어떻게 죽였는지 알게 뭔가?

고민은 짧았고, 판단은 빨랐다.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이들은 말없이 앞으로 나섰고, 소극적인 이들도 굳이 몸을 빼진 않았다. 합공을 하든 무슨 수를 쓰든 청명을 죽여야 이곳에서 살아 나갈 수 있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일변한 기세로 자신을 노려보는 이들을 보며 청명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는다.

화가 났냐고?

그럴 리가.

저들은 청명이 시체들을 보고 분노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그는 딱히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저들의 말에 동의하는 편이다.

병기를 들고 검총에 들어왔다는 건 이곳에서 죽음을 각오했다는 것. 서로 죽고 죽이는 아비규환에 몸을 던져 놓고 사람을 죽이는 방식의 옳고 그름을 가르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홍대광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지만, 악에 받쳐 서로를 죽이다 못해 양패구상까지 가 버린 지옥 같은 전쟁을 경험한 청명으로서는 당연한 생각이었다.

이보다 끔찍한 광경은 수도 없이 봤다.

살을 뚫고 나올 것 같은 분노도, 심장을 터뜨릴 것 같은 격정도 전장에서는 무가치하다.

그가 대라검을 죽인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대라검이 그를 죽이려 했으니까.

이 몸으로 살아난 이후 청명은 단 한 번도 전장에 선 적이 없다. 어린아이 장난 같은 공격이나, 서로 점잔을 빼 가며 싸우는 비무 같은 걸 전장이라 할 수는 없으니까.

내 팔이 떨어져 나가더라도 상대를 반드시 죽이고 말겠다는 악의(惡意)가 가득 들어차 있어야 비로소 전장(戰場)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전장에 선 이는 손속에 사정을 둬서는 안 된다.

그저 그것뿐.

그게 청명이 기나긴 전쟁에서 깨달은 것이었다.

또옥.

붉은 선혈이 그의 매화검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무기를 빼어 들고 슬금슬금 다가오는 이들을, 청명은 차갑기 짝이 없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모두 아홉.

체력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아홉 모두를 죽인다.

"애송……. 빌어먹을, 애송이라 부르지도 못하겠군."

거력부 막회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선두에 섰다. 그리고 시퍼렇게 날이 서 있는 그의 도끼를 앞쪽으로 쭉 내밀었다.

"영광으로 알아라. 네가 이토록 강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절대 합공 같은 건 하지 않았을 것이다."

청명이 막회를 응시하며 낮게 입을 열었다.

"다 지껄였으면 덤벼."

"……."

막회가 이를 악물었다.

수치스럽다.

하지만 막회는 알고 있다. 수치스럽게라도 연명하는 삶이 자존심을 지키는 죽음보다는 천배, 아니 만 배는 낫다는 것을 말이다.

더구나 이곳은 어찌 죽는다 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 그런 곳에서 자존심 따위는 한 푼의 가치도 없었다.

"그 배짱 하나는 인정해 주지. 네가 여기서 죽는다 해도 화산의 이름은 세상에 남겨 주마."

그 와중에도 청명은 냉정하게 상대의 전력을 파악하고 있었다.

합공?

딱히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고리타분한 강호의 근본주의자들은 합공이라는 걸 수치스럽게 여긴다지만, 그건 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그럼 상대가 더 강한데 한 명씩 가서 죽어 주라는 건가?

이건 놀이가 아니다.

죽고 죽이는 데 방법 같은 건 없다. 독을 쓰든, 합공을 하든,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든 살아남기 위해서는 뭐든 허용된다.

하지만 그리 생각하지 않는 이도 있는 모양이었다.

"자신보다 어린 아이를, 한두 명도 아니고 아홉이서 합공을 하다니. 강호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얼굴이 두꺼워야 하는 모양이군요."

저벅. 저벅.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와 청명의 옆자리를 채웠다.

청명이 시선을 힐끔 돌려 자신의 옆에 선 이를 바라본다.

백천.

그가 옅은 미소를 띠고 곁에 서 있었다.

아마도 청명을 돕기 위해 나선 모양이다.

그 사형제의 정이 넘치는 행동에 대한 청명의 반응은 아주 간명했다.

"뭐야. 방해돼. 비켜."

"……이건 도와줘도……."

백천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청명의 말을 무시하고 검을 뽑아 앞으로 겨눈다.

"방해가 돼도 참아라."

"……응?"

"나는 너의 사숙이고, 너의 동료다. 어느 사숙이 사질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데 그걸 구경만 한다는 말이냐."

아니, 나는 그게 편하다고.

너 방해된다고.

"맞는 말입니다. 사숙."

그리고 그 말에 감명을 받았는지 윤종이 재빨리 다가와 청명을 끼고 백천의 반대편에 섰다.

"사제가 목숨 걸고 싸우는데 사형이 돼서 구경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

"어, 그건 동감합니다."

조걸.

"같이 싸워요."

유이설.

청명이 자신의 좌우를 채운 화산의 제자들을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하튼 이래서 어린놈들은.'

이게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같이 싸우자고 달려드는 꼴을 보니 슬금슬금 짜증이 치민다.

"그러다 팔 잘리고 목 잘려 봐야 정신 차리지. 쟤들이 만만해 보여?"

"만만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

백천이 싸늘하게 일갈했다.

"하지만 상대가 강하다고 뒤에 숨어 있기만을 반복하다 보면 화산은 영원히 네가 싸우는 걸 구경만 하게 될 것이다. 지금은 방해가 될 수도 있지만, 이렇게 싸우다 보면 언젠가는 우리도 너를 받쳐 줄 수 있게 되겠지."

"……."

"나를 밀어 내고 싶으면 차라리 패서 쓰러뜨려라. 나는 죽으면 죽었지, 절대 구경은 못 한다."

청명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 인간이 맞는 말도 하네.'

백천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 청명 역시 알고 있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실전을 겪어야 한다. 위험한 실전일수록 그 성장의 폭은 커지는 법.

다시 말하자면 화산문하들의 성장을 위해서는 청명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도 그들에게 맡기는 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머리로는 아는데.'

뭐랄까.

자식을 키워 본 적이 없는 청명이지만, 부모의 마음이라는 걸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분명 험지에 던져 넣어야 성장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조금만 위험해 보이면 제가 먼저 나서게 된다.

슬쩍 주위의 동료들을 바라본 청명이 불퉁하게 입을 툭 내밀었다.

"죽을 것 같아도 안 도와준다."

"바라던 바다."

"네가 도와줄 거라는 생각은 애초에 안 했다! 한 번씩 너는 네 인성을 너무 과대평가해!"

"조걸 사형은 나중에 나 한번 따로 보자."

"……어?"

사형제들이 안타까운 눈으로 조걸을 바라보았다.

저건 꼭 한 번씩 기분에 취해서 선을 넘는다니까.

이윽고 청명이 앞을 바라보며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뭐랄까.

'이상한 기분이네.'

하나도 믿음직스럽지 않다. 짐만 늘어난 기분이다.

그런데…….

- 갑시다, 사형!

- 가자, 사제! 저놈들에게 화산의 힘을 보여 주자.

- 이번에는 제 몫도 좀 남겨 주십쇼, 청명 사형!

청명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상하지.

정말 이상하지.

하나도 믿음직스럽지 않은데 말이다…….

게다가 그때의 화산은 이제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청명이 입술을 질끈 깨물고 소리쳤다.

"가자! 저 새끼들 대가리를 깨 버려!"

"타아아아앗!"

"하아아압!"

사형제들이 고함을 지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늦지 않게 그들과 보조를 맞춰 뛰며 청명은 입술을 질끈 깨문다.

사형. 장문사형.

제 화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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