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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54화 (154/1,567)

154화. 진짜 무정함이 뭔지 알려 주지. (4)

장강묵도(長江墨刀) 조명산(趙明珊)의 손이 살짝 떨렸다.

'뭐지?'

그의 시선이 앞으로 나선 어린 도인에게 고정된다.

특별할 것은 없다.

특출한 기세가 느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저 어린 도장이 앞으로 나선 순간부터 조명산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게 제대로 된 감각인가?'

등골이 서늘하다.

그는 헤아릴 수도 없는 격전을 통해 장강묵도라는 별호를 얻어 냈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온실 속에서 실력을 키운 자가 아니라, 실전과 전투 속에서 성장한 자라는 뜻이다.

그렇기에 상대를 보면 알 수 있다.

이자가 그저 강하기만 한 애송이인지. 아니면 정말 싸움에 능숙한 자인지.

강하기만 한 애송이라면 겁날 게 없다. 그는 자신보다 강한 자를 수도 없이 쓰러뜨려 왔으니까.

사람을 죽이겠다는 각오가 없는 검 따위는 아무리 강해도 무섭지 않다.

한데…….

'대체 뭐냐? 저놈은?'

그의 감각이 경고한다.

위험하다고 말이다.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저 애송이가 위험하다고.

근육에 바짝 힘이 들어가고 도집에 올려놓은 손이 자신도 모르게 도를 움켜잡는다. 침이 바짝 마르고 목이 뻣뻣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장강묵도는 지금 자신이 받은 느낌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저자는 분명 젖살도 빠지지 않은 애송이임에 분명하다. 게다가 화산의 제자다. 화산의 제자들이 강호에서 활동을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그런데 그의 감각은 지금 눈앞에 있는 저자가 수많은 전투를 치른 백전의 노장이라 말하고 있었다. 전장에서 만난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야 할, 가장 위험한 적이라는 의미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장강묵도 조명산의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조명산은 알고 있다. 강호는 그 상식적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 일이 수도 없이 일어나는 곳이다. 어설픈 상식을 믿다가 목이 달아난 자들의 시체만 모아도 웬만한 호수를 메꾸고 남을 것이다.

이 험난한 강호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시시각각 변하는 상식이 아니라, 본인의 감각을 믿는 게 훨씬 나은 법.

"……저 아이를 경시하지 않는 게 좋겠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조명산이 힘겹게 꺼낸 말이었다. 하지만 당연히 그 말을 이해하는 이는 없었다.

대라검이 피식 웃으며 조명산을 돌아본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요, 조형? 농이라도 하겠다는 거요?"

"크크크크크. 장강묵도가 겁을 집어먹은 모양이지. 본래 명문의 제자만 보면 오금이 저리는 양반들이 있지 않은가?"

거력부 막회가 대놓고 크게 비웃음을 흘렸다.

장강묵도 조명산은 그런 반응들을 들으면서도 화를 내지 않았다. 어차피 그도 저들이 이해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확연한 감각을 느끼고 있는 조명산조차도 그 이유에 대해 납득하고 확신할 수가 없는데 저들이 무슨 수로 이해하겠는가?

"겁이 나면 물러서 계시오. 저 어린놈은 내가 처리할 테니까."

대라검이 비웃음을 흘리며 앞으로 한 발 나섰다.

하지만 조명산은 그런 대라검을 만류하지 않았다.

경고는 했다. 굳이 목소리를 드높여 사지로 걸어 들어가는 이를 만류할 의리는 없다. 어차피 이들과의 인연이라고 해 봐야 이곳에서 잠시 힘을 합치는 정도에 불과하니까.

대라검이 앞으로 나서더니 청명을 보며 낮게 일갈했다.

"무정함을 알려 준다고 했느냐?"

청명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런 청명을 본 대라검의 입가에 확연한 비웃음이 걸렸다.

"어린놈이라 그런지 겁이 없구나. 아니면…… 그 알량한 정의감이 가슴에 불을 당기기라도 한 모양이지?"

청명은 여전히 말없이 대라검을 바라볼 뿐이다.

"하나 알아 두어라, 어린놈아. 강호에서 정의감 따위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협의라는 것은 힘을 가진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힘없는 협의는 그저 떼쓰기에 불과하지. 너는 오늘 그걸 알게 될 것이다. 물론 그 대가는 네 목숨이겠지만."

청명이 가만히 대라검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아직 남았나?"

"……뭐?"

"다 지껄였으면 덤비라고 했을 텐데?"

대라검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어린놈이 입에 걸레를 물었구나."

청명의 눈이 가라앉았다. 그는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다는 듯 대라검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한 손에 잡은 매화검을 자연스레 늘어뜨리고, 말없이 무심하게 다가오는 그 모습이 이상하게도 대라검을 압박한다.

"……이놈이!"

대라검이 막 호통을 치려는 순간 청명이 싸늘하게 일갈했다.

"어차피 죽이려고 한 것 아니었어?"

대라검이 말문이 막혔다.

"그럼 죽이면 그만이지."

"……."

맞는 말이다.

청명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간에 대라검은 그를 죽일 것이다. 애초에 그들이 이곳에서 자리를 잡고 있었던 이유는 이곳에 진입하는 이들을 모조리 죽이기 위해서였으니까.

그러니 청명의 말대로 그냥 죽이면 그만이다.

건방지든, 강호를 모르든, 아니면 겁에 질려 있든.

그런 건 하등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조금 전까지 나는 분명 그리 행동하지 않았던가?'

지금 바닥에서 싸늘히 식어 가는 이들도 죽어 가면서 온갖 저주를 그들에게 퍼부었었다. 그렇다고 해서 대라검이 그들을 살려 주었던가? 그저 그들의 반응을 비웃으며 깔끔하게 목숨 줄을 끊어 놓았다.

그런데 지금은 왜 굳이 청명과 말을 섞으려 들었단 말인가?

대라검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지금 자신의 꼴이 겁에 질린 하룻강아지 같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늑대는 사냥 전에 짖지 않는다. 그저 달려들어 사냥감을 물어뜯고 그 숨통을 끊어 놓을 뿐이다. 오직 겁에 질린 개만이 싸움을 피하기 위해 목청을 높여 짖는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가 왜 겁에 질린다는 말인가?

저 개방 분타와 화산 따위에게?

천만에!

그가 이곳에서 죽인 이들만 해도 개방 분타나 화산의 어린 제자 따위는 맨손으로 찢어 죽이고도 남을 실력자들이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저런 어설픈 것들을 두려워한다는 말인가?

꾸우욱.

대라검이 잡은 검에 힘을 주었다.

전신의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진다.

'오냐. 그 주둥아리에 칼이 박혀도 그따위로 지껄일 수 있는지 보자.'

대라검이 청명에 대한 분노를 피워 올렸다.

하지만 그는 그 순간까지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가 냉정한 상태였다면, 자신이 청명에게 분노하는 상황 자체가 기이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겁 없는 어린놈이 목숨을 재촉하는 건 비웃어야 할 일이지 화를 낼 일이 아니니까.

하지만 대라검은 마지막까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고, 그것이 그의 명줄을 재촉했다.

저벅. 저벅. 저벅.

무심하게 다가오는 청명을 노려보던 대라검이 크게 일갈하며 달려들었다.

보통의 것보다 네 치는 더 긴 그의 대검이 대기를 가르며 청명의 머리를 향해 떨어진다.

카앙!

하지만 그의 검은 청명의 머리에 닿지 못했다.

검이 미처 도달하기도 전에, 청명의 검이 빛살처럼 그의 대검을 튕겨 낸 것이다.

'막아?'

이 애송이가 그의 검을 막았다고?

분노와 당황이 대라검의 심장을 파고든다. 하지만 대라검 역시 강호에서 잔뼈가 굵은 이. 당황은 잠시뿐이었다. 금세 튕겨나간 검을 재차 휘둘러 청명의 옆구리를 노려 간다.

쇄애애액!

새파란 검기가 실린 검이 청명의 옆구리를 노리며 무서운 속도로 파고들었다.

카앙!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청명의 몸에 닿지 못했다. 자신의 대검이 튕겨 나오는 것을 보며 대라검은 두 눈을 부릅떴다.

막혔다?

아니,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막혔다는 게 아니라, 대라검이 자신의 검을 막아 내는 청명의 검을 전혀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마치 검이 공간을 뚫고 나타나는 것 같다.

움직여서 막아 낸다가 아니라 그 자리에 나타났다에 가깝다.

'그럴 리가 없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는 대라검이다.

웬만한 명문의 일대제자라고 해도 대라검을 상대로는 긴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저 청명이라는 어린놈이 대라검보다 강하다고?

그런 일은 벌어질 수도 없고, 벌어져서도 안 된다.

"으아아아아아아!"

대라검의 입에서 노호성이 터졌다.

하지만 그런 그를 바라보는 청명의 눈은 낮게, 또 낮게 가라앉아 있을 뿐이었다.

대라검의 검이 광포하게 휘둘러진다. 상대를 반드시 찢어발기겠다는 각오가 담긴 검. 손속의 사정을 전혀 두지 않는 살검의 연속이었다.

카앙. 카앙. 카앙!

하지만 마구잡이에 가까운 그의 검격은 단 하나도 청명의 몸에 닿지 못했다.

순식간에 십 연격이 넘는 검을 날렸음에도 청명의 몸 반 치 앞에서 모조리 도로 튕겨 나온다.

대라검의 눈에 얼핏 절망이 어렸다.

"이노오오오옴!"

그의 검에 어린 검기가 새파란 광망을 토해 낸다.

검의 정밀함과 속도로는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아챈 대라검이 검의 형식을 쾌검(快劍)에서 패검(覇劍)으로 전환한다.

아무리 청명이 강하다고는 해도 별수 없이 아직 어리다. 그러니 내력 승부로 끌고 가면 상대가 될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런 대라검의 판단은 상식적으로 올바르다. 아무리 검의 재능을 타고났다고 해도 세월을 거스를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단 하나 문제가 있다면, 청명에게는 그 상식이라는 게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타아아아앗!"

단전에 있는 내력을 모조리 실은 검이 가공할 검기를 품고 청명의 머리를 향해 쇄도했다. 얼마나 내력을 밀었는지 검기가 부풀어 올라 검이 두 배는 더 크게 보였다.

금방이라도 두개골을 쪼갤 듯 위협적인 기세였다.

하나, 대라검은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금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파아아앗!

그의 육중한 대검이 내리쳐지는 순간, 청명의 검이 지금까지보다 두 배는 더 빠른 속도로 내질러진다.

서걱.

그리고 대라검은 보았다.

자신의 검이 하늘로 치솟는 모습을 말이다.

새파란 검기를 머금은 검이 하늘 높이 튕겨 올라간다. 그 검의 손잡이를 질끈 움켜쥐고 있는 자신의 손을 보는 순간 대라검의 뇌리에 '절망'이라는 두 글자가 아로새겨졌다.

고개를 내린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자신을 응시하는 청명의 무감정한 눈이었다.

분노도 없고, 적의도 없다.

사람이 어찌 사람을 저런 눈으로 볼 수 있는가?

이윽고 청명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대라검을 스쳐 지나갔다.

머릿속에 의문이 이는 순간.

'어라?'

세상이 느릿하게 기운다.

마치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세상이 한쪽 방향으로 빙글 돌아간다.

'이게 뭔…….'

땅이 하늘로 솟구치고, 하늘이 바닥으로 꺼졌다.

여전히 의문을 풀지 못한 대라검의 시야에 너무도 익숙하면서도 낯선 광경이 들어온다.

사람의 몸.

홀로 우뚝 선 사람의 육체는 대라검에게 너무도 익숙한 것이었지만, 또한 낯설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는 한 번도 자신의 몸을 이런 각도에서 본 적이 없었으니까.

더구나 목이 없는 자신의 몸을 살면서 언제 볼 수 있었겠는가?

'마, 말도 안…….'

그게 대라검이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한 생각이었다.

털썩.

목을 잃은 대라검의 몸이 바닥에 쓰러진다.

촤아아아아.

깨끗하게 베인 목에서 피분수가 뿜어져 나와 청명의 발치를 적셨다.

하지만 그는 죽은 대라검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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