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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53화 (153/1,567)

153화. 진짜 무정함이 뭔지 알려 주지. (3)

청명이 입맛을 다시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 가자고!"

"끄으응. 저거 다 챙겨야 하는데."

"뭐 그렇게 욕심이 많냐, 이놈아! 돈도 많은 놈이!"

"돈은 아무리 있어도 부족해! 화산에 걸신들린 놈들이 어디 한 둘인 줄 알아? 그놈들 입히고 먹이는 데만 해도 천금이 든다! 천금이! 내가 차라리 거지를 키우고 소를 키우지!"

청명이 습기 찬 눈으로 동혈 위쪽에 박혀 있는 야명주들을 바라보았다.

"끄으으응. 저게 돈이 얼만데."

그리고 그 눈은 이내 홍대광에게로 옮겨 갔다.

홍대광은 악에 찬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청명의 시선을 슬며시 피하고 말았다.

천장이 통째로 무너지는 경험만 하지 않았어도 보이는 족족 야명주를 챙겼을 청명이지만, 한번 그런 경험을 하고 나니 도무지 저기에 손을 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림의 떡을 보는 심정으로 야명주를 지나쳐야 하는 청명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거지이이이이……."

"……."

"이 원한은 잊지 않겠다."

"아니……. 내가 뭘 했다고."

하긴 했지. 크게 저질렀지.

"나가! 빨리 나가!"

백천과 윤종은 유혈사태가 일어나기 전에 얼른 청명을 질질 끌고 동혈 밖으로 나갔다. 남은 이들도 한숨을 내쉬며 그들을 따라 밖으로 나섰다.

"와?"

그리고 이내 모두가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하에 이만한 공간을 만든다고?'

눈앞에 펼쳐진 곳은 말 그대로 커다란 광장이었다. 그렇게밖에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공간.

그리고.

쿠르르르릉.

"음?"

홍대광이 고개를 획 돌렸다. 방금 그들이 지나쳐 온 곳의 위쪽에서 커다란 석벽이 내려왔다.

쿵!

사방으로 흙먼지가 날린다. 석벽으로 지금까지 온 길이 완전히 차단된 것을 확인한 홍대광이 자신도 모르게 눈을 찌푸렸다.

'좋지 않은데.'

물론 저 길로 되돌아간다고 해도 검총에서 나갈 수 있는 건 아니다. 돌아가는 길은 이미 무너졌으니까.

그럼에도 퇴로가 끊긴다는 것은 언제나 찝찝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 홍대광이 더 신경 쓰고 있는 것은 퇴로가 아니라 앞쪽에 보이는 풍경이었다.

광장의 한가운데에서 그들을 향해 살기를 풀풀 날리는 무리가 있으니까.

'누구지?'

복색은 형형색색.

통일되지 않았다.

홍대광은 그 정보만으로 저들이 이곳에서 만나 뜻을 같이하기로 한 이들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여기까지는 큰 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새로운 것들이 왔군."

"이제는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저것들만 처리하고 이동하는 게 좋겠군. 이러다가 그놈들이 양패구상을 하는 게 아니라 신병을 손에 넣어 버릴지도 모르니까."

"맞는 말이지."

홍대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피 냄새.'

저들이 있는 쪽에서 피비린내가 물씬 풍긴다. 홍대광은 그제야 그들의 발밑에 시체가 널려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안력을 돋워 상대를 좀 더 자세히 바라본 홍대광이 낮게 으르렁대듯 말했다.

"거력부(巨力斧) 막회(莫懷)."

"크흐흐흐. 이 어르신의 이름을 아는 놈이 있구나.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상대의 거대한 덩치와 그 덩치만큼 거대한 도끼를 본 홍대광이 눈을 찌푸렸다.

"삼살귀에 대라검. 산동쾌검 손명. 으……. 장강묵도(長江墨刀) 조명산(趙明珊)! 당신까지 이 미친 짓에 합류한 거요?"

검은 무복을 입은 이가 슬쩍 고개를 든다. 아마도 그가 장강묵도 조명산인 모양이다.

"이제보니 홍 걸개시군."

"그렇소! 나요! 적어도 당신과 대라검은 정도를 아는 이라고 생각했건만! 죄도 없는 군웅들을 참살하다니! 이게 무슨 잔악한 짓이란 말이오?"

"죄가 없어?"

조명산이 빙그레 웃었다.

"홍 걸개께서 큰 착각을 하고 계시군. 강호의 격언을 잊지 마시오. 보물은 가진 것만으로도 죄가 되오. 그리고 보물을 노리는 것 역시 죄지."

"이……."

홍대광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적어도 당신은 협의(俠義)가 뭔지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건만!"

"물론이오. 걸개."

조명산이 가만히 홍대광을 보며 말했다.

"이곳에서 신병을 얻는다면 나는 더 강해지겠지. 그럼 나는 그 강함을 바탕으로 더 많은 협의를 펼칠 것이오."

"당신 아래 죽어 있는 이들에게 그리 말해 보시지!"

"얼마든지 할 수 있소. 왜냐면 이들은 내가 지켜야 할 가여운 이들이 아니기 때문이지."

"……미친놈."

조명산은 살짝 어깨를 으쓱했다.

"걸개라면 나를 이해해 줄 줄 알았는데."

"미친놈을 이해하는 재주 같은 건 없소! 만일 당신을 이해하면 나도 미쳤다는 뜻이겠지."

화산의 제자들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홍대광을 바라보았다.

여지껏 반쯤 얼빠진 사람으로만 보였건만, 지금 보여 주는 홍대광의 모습은 개방의 협사 그 자체였다.

홍대광이 이를 갈며 말했다.

"보물에 눈이 멀었구려! 아무리 욕심이 나더라도 할 짓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짓이 있는 법!"

"클클클클. 저 거지새끼가 잘도 지껄이는구나."

거력부 막회가 걸걸한 목소리로 이죽거렸다.

"네놈은 그럼 여기서 대화라도 할 셈이었느냐? 이곳에 뛰어든 순간부터 상대를 죽여서라도 반드시 신병을 차지하겠다는 생각이었을 터! 그런 주제에 잘난 듯이 떠들어 대다니!"

"나는 적어도 제압할 수 있는 상대를 당신들처럼 죽여 없앨 생각은 하지 않소! 그것도 이리 일부러 사람을 기다려서 죽이지는 않는다는 말이오! 모든 일에는 정도라는 게 있는 법!"

"그 정도라는 건……."

대라검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사람마다 다른 게 아니겠소, 걸개?"

"대라검……."

"긴말할 필요 없소. 어차피 당신들은 죽을 테니까."

"……이곳에서 이러고 있는 이유가 뭐요?"

"하하하. 뻔한 걸 묻는구려. 굳이 미리 가서 힘을 뺄 필요가 없지. 그대들도 이제는 알 것 아니오? 이곳은 함정으로 가득하오. 선두를 뚫는 이는 피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지.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다 보면 눈먼칼에도 맞는 법. 조금 더 효율적인 방법을 선택한 것뿐이오."

홍대광이 이를 갈았다.

선두에는 무당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무당을 중인들이 쫓고 있다. 이들은 그 둘이 상잔하기를 기다렸다가 신병을 탈취할 계획인 것이다.

거기까지는 굳이 비난할 생각이 없다. 그것 역시 훌륭한 전략이니까.

하지만…….

홍대광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아까는 미처 보지 못했던, 광장으로 이어지는 여러 문들이 보인다. 그들이 지나온 곳처럼 석벽으로 막혀 있어서 발견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출구는 저들 뒤에 있는 딱 한 곳뿐이다.

"알겠소?"

"……뭘 말이오?"

"우리는 탈검무흔의 유지를 따르고 있을 뿐이오. 갈라졌던 길이 하나로 모이고, 이곳에는 커다란 광장이 있지. 그리고 이 뒤로 가는 길은 오직 하나뿐이오. 다시 말해……."

대라검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여기서 서로 죽고 죽이라는 뜻이지."

그 섬뜩한 말에 홍대광의 몸이 살짝 떨렸다.

'대체 약선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곳을 만들었단 말이더냐?'

굳이 저들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이런 구조라면 결국 보물에 눈이 시뻘개진 이들이 이곳에서 마주할 수밖에 없다. 겨우겨우 함정을 뚫고 나온 이들은 당연히 강자일 것이고, 검총이 주는 압박감과 불안함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을 것이다.

그런 이들이 서로 마주하게 된다면 싸움은 너무도 쉽게 벌어진다.

"그래서 죽고 죽인다는데 무슨 문제가 있소. 다만 우리는 죽이는 입장일 뿐이지."

대라검이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매섭게 벼려진 검날에 미처 닦아 내지 못한 선혈이 묻어 있다.

그 선혈을 본 홍대광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런 하찮은 이유로……."

"순진한 척하지 마시오, 걸개. 그대도 알고 있지 않소? 지금까지 검총이라는 이름이 세상이 퍼졌을 때, 피가 흐르지 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소. 가짜 검총마저도 피를 부르는데, 설마 진짜 검총 안에서 모두가 하하호호 잘 지낼 수 있다고 믿은 건 아니겠지? 그러니 걸개도 방도들을 이끌고 오신 것 아니오?"

홍대광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사실 저 말은 그리 틀리지 않다. 홍대광 역시 이곳에서 피를 볼 각오를 하고 왔으니까.

지금까지는 화산의 제자들과 함께 기관을 뚫느라 적을 상대할 일이 없었을 뿐, 평범하게 적을 맞이했다면 홍대광 역시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잖은가?'

죽일 수밖에 없는 적은 죽인다.

하지만 죽이지 않아도 되는 적까지 죽일 이유는 없다. 이곳에서 자리를 잡고 오는 이를 족족 잡아 죽인다는 건 그저 조금의 귀찮음을 피하기 위한다는 명목하에 저지르는 살인이고 살육이다.

홍대광은 그걸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도 죽이겠다는 거요?"

"도리가 있겠소?"

"그럼 말은 필요 없겠군."

홍대광이 이를 갈고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개방의 거지들이 재빠르게 홍대광의 뒤쪽으로 도열한다.

"흐음. 개방이라. 원래라면 부담스럽겠지만, 사람의 눈이 없는 이곳에서는 그저 거지새끼들일 뿐이지."

대라검이 이죽대며 말했다.

홍대광 역시 자신들의 약세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들은 하나하나가 무시할 수 없는 강자다. 그런 이들이 열이나 연합을 했으니, 개방 분타의 전력으로 어찌할 수 있는 이들이 아니다.

그러니…….

"백천 소협. 도와주시오."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

백천이 검을 뽑으며 홍대광의 옆에 가 섰다. 그의 뒤로 윤종과 조걸. 그리고 유이설이 선다.

"딱히 협의를 따른다고 자부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도를 넘은 이를 그냥 두고 볼 생각은 없습니다."

화산의 제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의 발밑에 시체만 해도 최소 스무 구가 넘는다. 다르게 말하자면, 저들이 이곳에서 스무 명이 넘는 이들을 사냥하고 도륙했단 소리다.

분노가 서린 화산 제자들의 눈을 보며 대라검이 미소 지었다.

"이거이거, 화산의 제자들이시구만. 최근 화산의 이름이 꽤 울려 퍼지던데. 안타깝게도 강호가 만만치 않음을 오늘 알게 되겠군."

"닥쳐라!"

백천의 일갈에 대라검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래서 강호초출(江湖初出)들을 보는 건 즐겁다니까."

"시간 끌 것 없소. 빨리 처리하고 무당을 뒤쫓읍시다."

"크크크크. 또 피 맛을 보겠군."

하나 둘 병기를 뽑아 든 이들이 개방과 화산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홍대광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설마 저자들이 모두 연합을 할 줄이야.'

남영으로 몰려온 이들 중 고수라고 이름 난 이들은 모두 저기에 모인 느낌이다. 저들이 모두 합세한다면 무당이라고 해도 쉽지 않을 터. 그런데 그런 자들이 설마 이런 치졸한 짓거리를 하다니.

하지만 치졸하다 하더라도 위협적인 것은 사실이다. 냉정하게 봤을 때, 개방과 화산만으로는 저들을 상대하기 버겁다. 아니, 일방적으로 밀릴 확률이 높다.

"홍 걸개. 나를 원망 마시오. 강호는 원래 무정한 곳이외다."

홍대광이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든 기회를 만들어 저 뒤의 유일한 길로 도주해야 한다.'

홍대광이 막 그렇게 결심을 굳힌 찰나였다.

"다 지껄였냐?"

귓가에 이질적인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감정의 고저가 느껴지지 않는, 낮은 목소리.

홍대광의 고개가 천천히 뒤로 돌아간다.

청명.

무표정한 얼굴을 한 청명이 그를 스쳐 앞으로 나갔다.

"흐음?"

걸어 나오는 그를 본 대라검의 눈에 미묘한 빛이 감돈다.

"너는 누구지?"

"알 것 없어."

"……뭐라 했느냐?"

청명은 대라검을 응시하고는 싸늘한 목소리로 일갈했다.

"강호가 원래 무정한 곳이라고 했나?"

"……."

"진짜 무정함이 뭔지 알려 주지."

이윽고 청명의 검이 천천히 검집에서 뽑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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