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진짜 무정함이 뭔지 알려 주지. (2)
동굴의 끝은 또 다른 동굴로 이어졌다. 다른 것이 있다면 지금까지 거쳐 온 동굴과 달리, 다시 야명주가 박혀 있다는 것.
"……이거 미묘하게 반복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사형?"
"으음. 그런 것 같구나. 게다가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이 야명주가 박힌 공간은 쓸데없는 짓만 하지 않으면 안전한 것 같구나. 쓸데없는 짓만 안 하면."
그 말을 하면서 은근히 자신을 돌아보는 백천을 보며, 홍대광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이 실수할 때도 있는 법이다."
"딱히 뭐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 대협."
그래, 대협. 아직은 대협이라고 불러 주는구나. 눈물 나게 고맙네.
이곳까지 오면서 화산의 제자들을 관찰한 결과 홍대광은 몇 가지 기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지 모를 청명과는 달리 화산의 제자들은 나름 명문의 제자답게 예의를 안다는 점이었다.
물론 얼핏얼핏 청명과 비슷한 언행이 엿보이기는 하지만, 당장 그들의 옆에서 청명이 어슬렁거리고 있다 보니 그 정도는 티도 나지 않는다.
'그리고 굉장히 강하다는 것.'
마라흡혈편복이 있던 동굴을 헤쳐 나오면서 개방도들은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그 상처로 마비독이 파고드는 바람에 운신이 어려워진 상태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동굴을 빠져나가는 걸음이 느려지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화산의 제자들은 그 급박했던 상황 속에서도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운이 좋아서?
'그럴 리가.'
한두 번은 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운이 이어진다면 그건 실력일 수밖에 없다.
"화정검께 하나 여쭐 게 있소만."
"백천이라 불러 주십시오. 민망한 별호라."
"좋소이다. 그럼, 백천 소협."
"예."
"화산에 있는 사형제들의 실력이 이곳에 있는 이들과 비슷하오?"
백천이 살짝 고민하는 듯하다 입을 열었다.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윤종이나 조걸은 삼대제자 중에서 가장 앞서는 아이들이고, 저나 유 사매도 이대제자 중에서는 수위에 속하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산에 남은 사형제들의 실력이 저희에 비해 크게 처지지는 않습니다."
그 말을 하면서 백천은 슬쩍 청명을 돌아보았다.
저 짐승 같은 놈에게 괴롭힘을 당하며 키운 실력이다. 누구 하나 크게 뒤떨어질 이유가 없다.
"……그렇구려."
홍대광의 얼굴이 살짝 심각해졌다.
그가 분타주로 있는 곳은 개방의 낙양 분타다. 낙양은 중원에서도 큰 도시로 꼽히는 곳이고, 그런 만큼 거지들 중에서도 나름 실력 있는 놈들이 배치되었다.
물론 질보다는 양으로 밀어붙이는 개방의 특성상, 그를 따르는 거지들이 타 문파의 정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한들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수준은 더욱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 있는 화산의 제자들은 그런 낙양 분타의 걸개들보다 확연히 더 나은 실력을 보여 주고 있지 않은가?
정말로 화산의 다른 문하들이 이들의 실력과 비등하다면, 대체 화산의 전력을 어느 정도로 평가해야 한다는 말인가?
'게다가 저 괴물 놈도 있고.'
조금 전 보았던 그 일검이 눈에서 사라지지가 않는다. 아니, 어쩌면 평생 가도 잊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런 환상적인 검은 살면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저 청명이 성장하여 화산을 이끌고, 화산의 문하들이 함께 성장하여 그 뒤를 받쳐 준다면?
'정말 부활이라고 하기에 손색이 없겠군.'
왕년 화산은 구파일방 중에서도 수위에 꼽히는 문파였다. 십만대산에서 전력이 크게 상하고, 이어진 마교의 발악에 본산이 무너지지만 않았어도 지금 같은 처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화산의 제자들이 성장만 해 준다면 과거 화산의 위세를 되찾는 것도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특히나 저 청명이 계속 저 기세로 날뛰어 준다면 말이다.
"분타주님……."
생각에 잠겨 있던 홍대광은 헐떡대며 힘들어하는 개방도들을 보며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화산신룡. 마음이 급한 건 알겠다만, 조금만 쉬어 갈 수 있겠느냐? 제자들의 상세를 살필 시간이 필요하다."
"뭐, 그러세요."
의외로 청명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자 홍대광이 되레 움찔했다.
"왜요?"
"아니. 답지 않게 너무 간단히 허락하니까."
"사람이 아프다는데 그럼."
"……고맙다."
홍대광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대협의 기질이 있는 것인가?'
대협이라 불리는 이라 해서 성향이 다 동일하지는 않겠지만, 반드시 갖춰야 할 것이 하나 있다면 이득보다 사람을 더 우선시하는 마음이다.
그런데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았던 청명에게서 사람을 우선시하는 말이 나온 것이다.
'보면 볼수록 알 수 없는 놈이네.'
홍대광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개방도들을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청명은 살짝 미간을 좁힌 채 앞쪽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의 신경은 저 먼 곳에 집중되어 있었다.
'기파가 쭉쭉 퍼지는구만.'
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기와 투기가 마구 뿜어져 나오고 있다. 크게 전투가 벌어졌거나 함정에 빠진 이들이 뭔가와 싸우고 있다는 뜻이리라.
'괜히 빨리 가서 싸워 줄 필요가 없지.'
느긋하게 기다리면 길은 저들이 다 뚫어 줄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센 놈들만 골라서 안으로 들여보낸 것 아닌가?
저들은 검총에 들어와서 좋고, 청명은 쉽게쉽게 가서 좋고.
이 안에 또 어떤 함정들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 아까 보았던 마라흡혈편복 같은 놈들이 계속 나온다면 제아무리 청명이라고 해도 결국에는 지쳐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곳에서 살아남는 법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짜낼 체력 한 방울까지 아끼는 것임을 오랜 전투 경험으로 체득한 청명이었다.
쉬어 가는 분위기가 조성되자 일행들이 다들 벽에 기대고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그러면서도 혹시 기관을 건드릴까 조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이고."
바닥에 주저앉은 윤종이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한탄하듯 말했다.
"이런 데서는 목숨이 열 개라도 부족하겠네."
"엄살은."
청명이 피식 웃자 윤종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본다.
'저놈은 뭔가 굉장히 익숙해 보이네.'
아무리 담이 크다고 해도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면, 당황할 수밖에 없다.
빛도 제대로 들지 않는 곳, 어떤 함정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곳을 한 발 한 발 전진해 나간다는 건 생각 이상으로 사람을 지치게 만들었다. 내내 긴장하고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니까.
그런데도 청명은 여전히 태연자약했다.
"안 힘드냐?"
"뭘 했다고 힘들어? 이제 시작인데."
"……시작이라고?"
"약선, 탈검무흔쯤 되는 이가 제대로 작정하고 함정을 만들었으면 이 정도로 끝나지 않을 거야. 아예 아무것도 없다면 모를까."
윤종이 미간을 좁혔다.
그 말에 불만이 있는 건 아니다. 그가 주목한 부분은 '작정하고'였다.
"탈검무흔, 그러니까 약선은 왜 이런 곳을 만들었을까?"
"응?"
"……혼원단을 남기고 싶었다면 남기면 그만이고, 신병을 남기고 싶었어도 그냥 남기면 되잖아. 그런데 왜 이런 함정을 만들어서 자신의 무덤에 들어온 사람들을 위험에 빠트렸냐는 뜻이야."
"난들 알겠어."
청명이 피식 웃었다.
윤종의 의문은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뭔가 이상하다. 특히나 약선이라는 이름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래. 수많은 병자를 치료하고, 더 많은 영단을 만들어 낸 선인이잖아. 그래서 약선이라 불리는 거고."
"그렇지."
"그런데 그런 약선의 정체가 그 탈검무흔이고, 그 탈검무흔이 왜 이런 무덤을 만들었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이해할 필요 없어."
"으응?"
청명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사람에 대해 딱 한 가지 확신하는 게 있거든."
"그게 뭔데?"
"사람은 절대 예측할 수 없다는 거지."
"……."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도 한 번씩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 주는데, 이백 년 전 사람의 생각 같은 걸 어떻게 알겠어? 우리는 그냥 여기서 챙길 거나 챙겨 나가면 그만이야. 의도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은 거지."
현실적인 말이었다.
하지만 무척 냉정한 말이기도 했다.
청명은 그렇게 말했지만, 윤종은 이 무덤에 약선의 의도가 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리기가 어려웠다.
'약선은 이 무덤에 든 이들에게 무엇을 전하려는 걸까?'
그때, 고민에 잠긴 그를 흘끗 본 청명이 말했다.
"그게 아니겠지."
"으응?"
"시작은 여기가 아니지. 따지려면 약선이 왜 탈검무흔이 되었나부터 시작해야지."
"……아."
윤종이 살짝 놀란 얼굴을 했다.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약선은 연단법으로 일가를 구축한 이다. 굳이 탈검무흔으로 세상에 나서지 않아도 충분한 명성과 영광을 거머쥔 사람이었다.
그런 이가 굳이 복면을 쓰고 검을 잡은 이유가 뭘까?
윤종이 가만히 청명을 바라보았다.
청명은 뭔가를 짐작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 감당하기 힘든 사제는 누구보다 어리면서도 때때로 따라가지도 못할 깊이를 보여 주곤 하니까.
"뭐?"
"아니, 넌 뭔가 짐작하고 있나 해서."
청명이 피식 웃는다.
"그런 게 뭐가 중요해?"
"응?"
"약선이 다른 의도가 있다면 혼원단을 곱게 놓고 물러날 거야?"
"……그건 아니겠지."
"그럼 된 거지. 나는 옛사람의 사정 같은 건 관심 없어. 중요한 건 여기에 혼원단의 연단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지."
"음."
"그건 죽어도 내가 손에 넣는다. 반드시!"
이글거리는 청명의 눈을 보며 윤종이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단순해서 좋다.'
때로는 저런 청명의 성격이 부럽다. 이리저리 고민하지 않으니까.
단순히 겉으로 보기만 그런지는 몰라도.
그때 유이설이 청명에게 챙겨 왔던 물통을 건네었다. 청명도 두말없이 그녀가 내민 물을 받아 마셨다. 그리고 불쑥 홍대광에게 물었다.
"거지 아저씨! 끝나 가요?"
"해독제가 효과가 있는 모양이다."
"마비독의 해독제를 챙겼다고?"
"정확하게는 마비산(痲?
散)의 해독제다. 여기에서 어떤 놈을 만날지 모르니까. 혹시나 싶어 사용해 봤는데 해독이 되는군."
"호오."
청명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홍대광을 바라보았다.
"뭐냐! 이 홍대광 어르신을 뭐로 보고! 이래 봬도 강호에서는 개방의 지낭으로 불리는 몸이시다!"
"아아, 네네."
"끄응."
반응이 영 시원치 않자 홍대광이 고개를 내젓는다. 하기야 이놈에게 이런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해독 얼추 다 했으면 출발하죠."
"그런데 이 검총은 대체 어디까지 이어지는 거냐. 우리가 온 거리만 해도 짧지 않을 텐데."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동굴이 완만하게 곡선을 이루고 있어서 실제 이동한 거리는 얼마 안 될 거예요."
"……그래?"
"그렇다고는 해도 이만한 지하에 공간을 만드는 건 한계가 있겠죠. 슬슬 끝이 보일 거예요."
"흐음. 그래. 일단 알겠다."
일행들이 다시 몸을 일으키고 준비를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청명은 일순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슬슬 끝이 보일 거라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문제는 그 끝에 도달하는 이들이 그들 말고도 분명 존재할 거라는 사실이다.
'악의적이군.'
약선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며 청명이 입꼬리를 쭉 말아 올렸다.
"어디, 또 뭘 준비했는지 볼까?"
청명이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