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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51화 (151/1,567)

151화. 진짜 무정함이 뭔지 알려 주지. (1)

그 새빨간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붉은 점을 본 이들은 모두 본능적으로 움직임을 멈췄다.

'뭐, 뭐야? 저거?'

조걸의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기관? 아니면?'

뭐가 되었든 그들에게 좋은 소식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일단 저 붉은 점을 보는 순간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육체가 먼저 알고 경고를 보내는 느낌이다.

위기를 감지한 그의 시선은 자연히 청명에게로 향했다. 평소의 행동거지가 어떻든 간에, 이런 순간 제일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해도 청명이다.

"처, 청명아."

"응?"

"저게 다 뭐냐?"

"어……. 박쥐 같은데?"

"박쥐?"

"어. 눈이 빨간 박쥐에 대한 이야기를 내가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그러니까……."

청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박쥐 눈은 원래 빨갛던가?"

그게 지금 중요하냐? 어?

그때 가만 생각하던 청명이 생각이 났다는 듯 손뼉을 쳤다.

"아, 맞다. 흡혈편복(吸血??)! 분명 그런 이름이었지!"

멈춘 채로 눈알만 굴리던 홍대광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 저 빨간 게 전부 박쥐의 눈이라고?"

"어. 그런 것 같은데?"

"그,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

"뭘 어떻게 해. 그래 봐야 박쥔데. 그냥 지나가면 되겠지."

청명이 태연하게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다른 이들이 긴장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괜찮은 건가?'

하기야.

박쥐면 별문제는 안 된다. 사람에 따라서 징그러워서 피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박쥐에 물려 죽었다는 사람은 들어 본 적이 없으니까.

다들 살짝 긴장을 풀고 조심스레 청명의 뒤를 따랐다.

그때 백천이 청명의 뒤에 바짝 붙더니 나지막히 입을 연다.

"그런데 청명아."

"응?"

"나도 흡혈편복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 보았다만, 흡혈편복의 눈이 붉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 그 말이 맞는 거냐?"

"어? 아닌데? 내가 듣기로는……. 아!"

청명이 다시 손뼉을 친다.

"그냥 흡혈편복이 아니구나. 마라흡혈편복(魔羅吸血??)이었어. 운남에 마라흡혈편복이라는 영물이 있는데, 그 영물에게 물리면 피를 쪽쪽 빨려 껍데기만 남고 죽는다고 하더라고? 단단하기는 얼마나 단단한지 칼도 안 들어가서 웬만한 고수도 한 마리를 감당하기 어렵……."

말을 하던 청명의 목소리가 점점 흐려졌다.

청명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모두 뭐 씹은 얼굴로 몸을 부들부들 떨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청명은 진지하게 입을 뗐다.

"……알지?"

"응."

청명이 깊게 숨을 들이쉬고는 천천히 발을 뻗는다. 그답지 않게 신중함이 가득한 움직임이었다.

"조용하게……."

후드득.

"가면 얘들도……."

후드득! 후드득!

"잘 모를……."

후드드득! 후드득!

청명이 빙그레 웃고 말았다.

'그럴 리가 있나.'

"망했네."

끼에에에에에에에에엑! 끼이이이이이이익!

고막을 찢어 버릴 것 같은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미친 듯이 쏟아지더니 시뻘건 눈의 마라흡혈편복들이 일제히 구름처럼 날아올랐다.

"달……."

청명이 막 달리라고 소리치려는 순간, 뒤에 있던 이들이 일제히 그를 제치고 부리나케 앞으로 내쳐 달렸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잡히면 뼈도 못 추린다! 달려어어어어어어어어!"

청명이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저 개……."

뭐? 사형제는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 사형제지간의 정이 어쩌고 저째?

어떻게든 살아 보겠답시고 청명을 밀치며 걸음아 날 살려라 달아나는 사형제들을 보고 있으니 눈물이 앞을 가릴 지경이다.

그 와중에 제일 앞에서 뒤도 안 보고 달려가는 백천의 모습이 확연하게 두 눈에 들어온다.

지 혼자 살겠다고 저거, 저거.

어찌나 잘 컸는지 보고만 있어도 뿌듯…….

"……은 개뿔이! 에라이, 썩을 놈들아!"

사방에서 마라흡혈편복들이 붉은 눈을 번뜩이며 달려든다.

"히이이익!"

청명도 부리나케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아아아! 동굴에 왜 박쥐가 있어!"

"동굴이니까 박쥐가 있지! 미친놈아!"

"아니! 운남에 있다던 놈들이 왜 여기에 사냐고!"

"내가 어떻게 알아!"

홍대광도 버럭질을 해 대며 꽁지가 빠져라 달리기 시작했다.

"약선은 얼어 뒈질 약선! 이 미친놈이 운남에서 이걸 여기까지 가지고 와서 풀어놨네! 사형! 장문사형! 선계에 그 새끼 있으면 죽빵 좀 갈겨 주쇼!"

- 내가 천하제일인을 무슨 수로 패냐.

"아니! 그럼 평소처럼 사제들이랑 같이 다구리라도 놓든가!"

"혼자서 뭐라는 거야! 이 미친놈이!"

"끄으으응!"

진짜 청문이 있었으면

'저 미친놈이 화산의 명예를 땅에 처박는다.'

하고 길길이 날뛰었을 소리를 잘도 해 대는 청명이었다.

그런 그를 응징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마라흡혈편복들이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무섭게 달려들었다.

청명이 다급히 양손을 휘둘러 마라흡혈편복들을 쳐 냈다.

카앙! 카아앙!

'와, 이거 뭐야!'

손으로 박쥐를 치는데 쇳덩어리를 치는 느낌이 난다. 운남에서는 마라흡혈편복이 있는 동굴에 잘못 들어가면 커다란 물소도 삽시간에 뼈만 남는다더니, 손끝에 전해지는 감각을 보니 납득이 간다.

"아악!"

"조심해! 발톱이 날카롭다!"

청명이야 날아드는 박쥐들을 후려쳐 밀어 낼 수 있었지만, 다른 이들은 그럴 상황이 못 됐다. 흡혈편복의 발톱에 스친 곳이 길게 갈라지며 피를 내뿜는다.

피냄새를 맡은 흡혈편복들은 더더욱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수백 마리나 되는 놈들이 허공에서 어지럽게 교차하며 날아들었다가 훌쩍 멀어지기를 반복한다.

보고만 있어도 정신이 아득해지는 광경이다.

"부, 분타주님! 팔이! 팔이 안 움직입니다!"

"뭐? 빌어먹을 마비독인가?"

홍대광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박쥐야!'

강철 같은 몸에 웬만한 명검을 우습게 만들어 버리는 발톱. 거기에 마비독이라니!

이건 웬만한 고수도 감당할 수 없는 괴물이다. 문제는 그런 괴물이 한두 마리도 아니고 수백 마리씩 떼를 지어 공격을 해 대고 있다는 것이다.

"아악!"

어깨에서 날카로운 통증을 느낀 홍대광이 고개를 획 돌렸다. 어느새 그의 어깨에 마라흡혈편복 한 마리가 붙어 있었다.

"이 박쥐 새끼가!"

홍대광이 벼락같이 소리를 지르며 흡혈편복을 쳐 낸다. 그러자 그의 어깨에서 살점이 한 움큼 떨어져 나가며 피가 쭉쭉 뿜어져 나온다.

'이러다 다 죽는다.'

상처는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그 상처로 마비독이 파고든다는 것이다. 곧 움직임이 무뎌질 테고, 그 뒤에는 이 빌어먹을 것들에게 산 채로 뜯어 먹히는 결말밖에는 남지 않는다.

"절대 물리면 안 된다! 가까이 오는 박쥐는 모조리 죽여!"

"분타주님! 무기가 안 먹힙니다! 이놈들 움직임이 이상합니다. 미리 궤적을 알고 있다는 듯 피합니다!"

"뭔……."

하지만 짜증을 낼 겨를도 없었다. 홍대광은 자신의 얼굴을 향해 날아드는 흡혈편복을 쳐 내려 재빨리 손을 뻗었다.

개방이 천하에 자랑하는 취팔선장(取八仙掌)의 일장.

그러나 박쥐는 허공에서 빙글 회전하더니 홍대광의 일장을 너무도 쉽게 피해 냈다.

"피해?"

한낱 미물이 개방의 무리(武理)가 담긴 일장을 피한다고?

순간 등골이 서늘해진다.

'세상에 어찌 이런 말도 안 되는 괴물들이 있단 말인가?'

세상은 넓고 괴이 망측한 것들이 수도 없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무림의 정보에 밝은 개방의 분타주이니 그럴 수밖에.

그러나 막상 그것들을 직접 보게 된 심정은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다.

홍대광이 전력을 다한다고 해도 이 괴물들을 열 마리는 감당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하지만 이곳에는 마라흡혈편복이 열 마리가 있는 게 아니라 수백 마리가 있다. 이러다가는 정말 모두가 전멸하고 말 것이다.

"화산신룡! 화산신룡! 어떻게 좀 해 봐라!"

그리고 이런 위기에 찾을 사람이라고는 청명밖에 없다.

"아오!"

청명이 짜증을 내며 검을 뽑아 들었다.

"화산……."

청명을 한 번 더 재촉하려 뒤를 돌아본 홍대광은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청명은 그저 검을 뽑아 들었을 뿐이다. 표정도, 움직임도, 그 기세까지. 그 어떤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다르다.'

대체 뭐가 다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의 청명과 지금 그의 뒤를 달리고 있는 청명은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 말도 안 되는 위화감이 홍대광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입만 열면 뻘소리를 늘어놓던 화산의 어린놈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백전(百戰)의 경험을 가진 시퍼런 칼날 같은 검사(劍士)가 그곳에 있었다.

이윽고 그의 검이 천천히 움직인다.

화아아악.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다. 청명의 검이 느릿하게 움직인다. 검 끝이 절로 파르르 떨린다 싶더니 이내 수십, 수백 개의 검영이 어둑한 동굴 안을 뒤덮기 시작했다.

'매화?'

피어난다.

분열되어 갈라진 검 끝마다 한 송이 매화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작은 꽃봉오리가 이내 만개한 꽃의 형상으로 화한다. 마치 이 동굴 안이 커다란 매화나무 숲이 되어 버린 것만 같다.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홍대광은 자신도 모르게 넋을 놓고 말았다.

'이게 바로 화산의 무학인가?'

화산의 매화.

한때 세상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던, 하지만 이제 다시 그 이름을 만방에 떨치기 시작한 화산의 매화가 홍대광의 두 눈 앞에서 고스란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어디선가 자욱한 매화향이 풍겨 오는 것만 같다.

검에서 향이 날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 그가 맡고 있는 매화 향이 그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홍대광은 짙은 그 향기에 전율했다.

그리고.

낙화(落花).

매화가 휘날리기 시작한다. 매화 꽃잎은 바람을 따라, 흐름을 따라 마치 눈보라처럼 동굴을 메우며 마라흡혈편복들을 휩쓸어 갔다.

끼에에에에에엑!

까아아아아아아악!

마라흡혈편복들이 내지르는 비명이 동굴을 울린다.

후드드득.

박쥐들의 날개 소리가 홍대광의 귀를 파고들었다.

조금 전에도 들었던 날개 소리. 하지만 조금 달라졌다. 이번엔 청명의 검에 베인 마라흡혈편복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내는 소리였다.

"아……."

동굴을 가득 메웠던 매화가 어느새 씻은 듯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은 홍대광이 자신도 모르게 깊은 아쉬움이 담긴 탄식을 내뱉고 말았다.

스르르릉.

청명의 검이 다시 검집 안으로 들어간다.

"후우."

짧게 숨을 토해 낸 청명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곳에는 정제된 칼날 같은 기세의 검수…….

"망할 박쥐 새끼들이 주제도 모르고!"

……는 없고!

익숙한 모습의 청명이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쭉 펴고 있었다.

"……."

입 안 열고 가만히만 있었으면 좀 감동했을 텐데.

"뭐 해, 안 가고?"

"가, 간다."

홍대광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쉬이이익. 쉬이이익.

그 일검에 모든 마라흡혈편복들이 떨어진 건 아니다. 아까의 절반도 넘는 흡혈편복들이 살아남아 동굴 벽에 붙어 이쪽을 노려보고 있다.

하지만 영물은 영물. 기껏해야 박쥐인 주제에 청명의 강함을 깨달았는지 감히 이쪽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나지막하게 위협하는 소리만 낼 뿐이다.

'새 대가리에 두려움을 심어 주는 검이라니.'

아니. 박쥐는 새가 아니던가?

이걸 괴이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고개를 내젓는 홍대광의 눈에 드디어 동굴의 끝이 보였다.

'빌어먹을, 이제 또 뭐가 나올지 겁부터 나는군.'

살짝 입술을 깨문 홍대광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래도 이놈 옆에 붙어 있기로 한 건 최고의 선택이었다.'

그게 아니었으면 벌써 죽었을 테니까.

홍대광이 신뢰가 가득 담긴 눈으로 청명을 바라본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알았는지 청명도 흐뭇하게 웃으면서 말한다.

"놀러 왔어요? 자꾸 뭘 구경하시네?"

"……."

"개방도 다됐네. 다됐어."

"……."

아니, 그건 아닐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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