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당신, 나랑 일 하나 같이 합시다. (4)
차가운 산바람이 품을 파고든다.
현종의 시선이 먼 곳을 향했다. 화산을 넘어, 화음을 넘어 저 먼 남영 땅이 있는 곳.
말없이 멀리만 응시하는 현종의 뒤에서 현영이 슬그머니 입을 연다.
"지금쯤이면 소식이 올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으음."
"거, 무심한 놈들 같으니. 뭔 일이 있는지 연통이라도 빠릿빠릿하게 보내 주면 좋을 텐데."
현영의 말에 현상이 쓴웃음을 지었다.
"놀러 간 것도 아니고, 임무를 맡아 간 아이들일세. 그럴 틈이 있겠는가?"
"답답하니 그렇지 않습니까? 답답하니!"
현영이 가슴을 치는 시늉을 했다. 그에 현종이 살짝 미간을 좁힌다.
"장로씩이나 되어서 그리 인내심이 없어서야 어찌하겠는가?"
"장문사형이 하실 말씀입니까? 하루에도 열댓 번은 여기 올라서 그러고 계시면서."
"……."
현종이 입을 다물고 고개를 슬쩍 돌렸다.
답답한 마음을 쉬이 가눌 수 없어 산을 오른 게 오늘만 해도 세 번째다. 이제는 저 현상과 현영마저 그를 따라 산을 오르고 있다.
"잘할 것이네."
현상이 슬그머니 현종의 편을 든다. 하지만 현영은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속도 좋습니다. 아무리 어쩔 수 없었다지만 애들끼리만 무당을 상대했을 텐데 걱정도 안 되십니까? 어찌 그리 속 편한 말씀을 하십니까?"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 아이들이 아닌가? 우리와는 다르니 잘할 것이야."
현영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달라야지요. 그놈들은 절대 우리 같아서는 안 됩니다."
그 말에는 현자 배의 아픔이 어려 있었다.
그들은 화산이 몰락하는 것을 제 눈으로 지켜보고, 제 몸으로 겪은 이들이었다. 믿었던 이들이 돌아서고, 사형제라 생각했던 이들이 본산을 등지는 모습을 수도 없이 보았다.
그 혼란한 와중에 일신상의 무학마저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그래서 겪은 설움은 또 오죽했던가?
"그놈들은 달라야 합니다. 그놈들은 떵떵거리며 살아야죠. 우리처럼 궁상맞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화산의 명예가……."
현상이 한마디 하려 하자 현영이 그의 말을 잘라 버렸다.
"명예고 나발이고 뭐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저는 그놈들이 배곯지 않고 어디 가서 무시받지 않으면 그걸로 만족합니다."
현상은 아무 말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닫았다.
무파에 어찌 명예와 명성이 중요하지 않겠냐마는, 저 말에는 재경각을 수십 년간 맡아 온 현영의 진심이 담겨 있다. 그러니 함부로 말을 할 수가 없다.
"그 아이들은 화산의 새로운 이름이 되어야지."
현종이 나직하게 뇌까렸다.
"우리는 그 거름으로 족한 게야. 거름으로나마 쓸 수 있다면 말이다."
그때였다.
말을 하던 현종의 고개가 느릿하게 돌아간다. 저 아래에서 운암이 산을 뛰어 올라오고 있었다.
다급하게 산을 올라온 운암이 그들을 향해 예를 갖추었다.
"무슨 일이더냐?"
"화음의 소상단주께서 남영의 소식을 보내 주셨습니다."
현종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오, 소상단주께서!"
현종이 기대와 불안이 뒤섞인 얼굴로 운암을 바라보았다. 지금 당장 소식을 이야기해 보라 말하고 싶지만, 막상 좋지 않은 소식일까 봐 겁도 난다.
그렇기에 차마 재촉할 수가 없다.
하지만 현영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빨리빨리 말을 해 보거라!"
"예. 전해 오기로는 화영문과 종도관을 대신하여 화산의 아이들과 무당의 제자들이 비무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화산이 승리하여 종도관이 남영을 떠나기로 했답니다!"
현종이 눈을 부릅뜬다.
"그게 사실이더냐?"
"소상단주께서 이미 몇 번이나 확인을 해 봤다고 합니다. 그러니 사실일 겁니다."
"무당과 비무라. 무당과의 비무에서 이겼다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장문인."
"허허. 허허허허허."
현종이 말을 잇지 못하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현상이 빙그레 웃으며 말한다.
"그것 보십시오. 그 아이들은 다르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남영으로 간 아이들 모두의 실력을 아는 현상으로서는 그 아이들이 또래에 진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렸던 것은 무당 제자들의 실력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뿐이었건만, 이제는 그마저도 시원하게 해결되었다.
"그럼 화영문은?"
"화영문은 남영에 계속 남아 다시 문도를 받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것 참 잘되었구나."
현영도 그제야 환한 웃음을 지었다.
"잘 해낼 줄 알았습니다! 아암, 그놈들이 어떤 놈들인데!"
"허어, 무당을 이겼구나."
"대단한 일입니다. 그 아이들은 정말 화산의 이름을 빛낼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현상은 뭔가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이건 너무 민감한 문제라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말이었다.
이대로 이대제자와 삼대제자가 성장해 준다면, 언젠가는 화산이 다시 구파일방에 들 날도 오리라.
너무 꿈 같아서 말로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 아이들은 바로 복귀를 한다더냐?"
"직접 연락을 받은 것이 아니라 거기까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남영에 남아 할 일이 없으니 이제 돌아오지 않겠습니까?"
"음, 그렇겠지."
현종이 빙그레 웃으며 현영을 돌아보았다.
"재경각주."
호칭이 달라지자 현영도 자세를 바로 한다.
"예, 장문인."
"고생하고 돌아올 아이들을 환영할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나?"
"걱정 마십시오. 제가 잘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사흘 정도면 돌아오고 남겠지."
현종이 더없이 따뜻한 눈으로 저 먼 남영 땅이 있는 곳으로 다시금 시선을 주었다.
'고생 많았다, 이 녀석들아.'
그리고 그때였다. 현영이 의아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런데 좀 신기하긴 합니다."
"뭐가 말인가?"
"청명이 그놈이 별 사고를 안 친 모양입니다. 그놈이 일을 저질렀으면 그 소식이 제일 먼저 들려왔을 텐데."
그에 현종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 녀석도 도기(道器)가 아니더냐. 안에서 샌다고 바깥에서까지 새기야 하겠느냐?"
"하기야 그렇습니다."
"이번 일로 천하는 우리 화산이 아직 몰락하지 않았음을 확실히 알게 되겠지. 그리고 화산의 제자들이 천하의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것 역시 알게 될 것이다. 이제는 우리가 더 열심히 해야지."
"물론입니다. 장문인."
"그래, 그래."
현종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의 시선은 더없이 맑고 투명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은 몰랐다.
지금 '그' 청명이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세상일이라는 건 절대 원하는 대로는 풀리지 않는 법이다. 특히나 청명이 관련된 일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 * *
"그러니까……."
무당의 장로 허산자(虛散子)가 가만히 앞을 응시하다 말고 고개를 돌려 진현을 바라보았다.
"네가 예전에 말한 대로라면……."
"……예."
"남영에는 화영문 말고는 마땅한 문파가 없고."
"예."
"남영 자체는 시골이나 다름이 없어서 보는 눈도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이지?"
"그렇습니다."
허산자가 앞쪽을 다시 바라본다. 그렇게 몇 번 번갈아 가며 시선을 주던 그는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저 사람들은 다 뭐란 말이더냐?"
"……그게."
진현 역시 망연히 앞쪽을 바라보았다.
글쎄, 저걸 뭐라고 해야 하나?
바글바글?
아니면 우글우글?
남영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사람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문제는 저 사람들이 남영의 입구를 점거하고 있는 게 아니라, 지금 남영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눈앞에 보이는 수많은 사람들도 남영으로 향하는 이들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게다가 하나같이 허리춤에 병장기를 차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다들 무림인임에 틀림이 없다.
"……어."
진현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분명 그놈이 또 뭔가를 저질렀구나!'
그게 아니고는 설명이 안 된다. 진현의 뇌리에 실실 쪼개는 청명의 얼굴이 떠오른다.
뿌드득.
이를 갈아붙인 진현이 낮게 말한다.
"아무래도 그 화산 놈들이 일을 벌인 모양입니다."
"……일?"
"장보도를 퍼트린 것 아니겠습니까?"
허산자의 동공이 살짝 흔들린다.
"……그, 그걸 퍼트린다고? 대체 무슨 생각으로?"
검총의 가치는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도 불가능할 정도다. 그렇기에 무당 역시 이 일에 사활을 걸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 귀중한 정보를 담은 장보도를 퍼트려 버린다고?
'정신이 박힌 인간이 할 짓인가, 그게?'
허산자가 말문이 막힌다는 눈으로 남영 입구를 바라보았다. 무당 내에서도 유독 침착한 성정을 지녔다고 평가받는 허산자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화산신룡인가 뭔가 하는 놈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소리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수도 없이 들었다. 그런데 설마 이렇게까지 막 나가는 놈일 줄이야.
"아무리 장보도를 퍼뜨렸다고 하더라도, 불과 사흘 만에 사람이 이리 모일 수 있다는 말이냐?"
"……검총이 남영 근처에 있다는 정보까지 샌 모양입니다. 보아하니 남영 주변의 무림인들은 모조리 몰려온 것 같지 않습니까?"
"으으음."
허산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거야말로 그들이 가장 피하고 싶었던 일이다. 검총은 그 존재만으로도 피를 부를 만한 곳이다. 그렇기에 은밀하게 일을 해결하려 들지 않았던가.
'이건 악의까지 느껴지는 일이로고.'
허산자는 즉각 사태를 알아챘다.
이건 누군가 검총을 노리고 벌인 일이 아니다. 이건 어떻게든 무당이 홀로 검총에 들어가 발굴하는 것만은 막아 보겠다고 벌인 일이다.
"장보도를 가져간 아이가 화산신룡이라고 했었느냐?"
"그렇습니다."
'대체 뭐 하는 놈이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황당하기 짝이 없다.
'그 어린아이가 이런 독한 수를 쓸 수 있다고?'
내가 못 먹으면 너도 먹지 말란 소리다. 아니, 먹더라도 개고생은 해 보라는 뜻이다.
남영에서 풍겨 오는 진득한 악의에 허산자가 다문 입술에 꽉 힘을 준다.
"어떻게 합니까, 장로님?"
진현의 막막한 물음에 허산자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당황한 것은 사실이지만, 계속 놀라고만 있을 수는 없다.
"남영으로 향하고 있다는 건…… 아직 장보도를 풀지 못했다는 뜻이겠지?"
"그런 것 같습니다."
"음."
허산자의 입에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악의……. 악의라.'
발목을 잡겠다는 그 발상은 높게 사나, 그렇다고 발목 잡혀 줄 무당이 아니다.
"그렇다면 달라질 것은 없다. 사람들의 눈을 피한다는 계획은 어긋났지만, 검총에 먼저 들어갈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다."
무당 제자들의 눈이 단호해졌다.
"보아라."
그가 앞쪽을 슬쩍 가리켰다. 이쪽을 힐끔힐끔 보는 이들이 있었다. 그중 몇몇은 심지어 대놓고 힐끔거리면서 저들끼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미 주목을 끌어 버린 상황이다. 우리가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저들은 어떻게든 우리를 방해하려 들 것이다."
"예."
"하나 그뿐. 잊지 마라. 우리는 무당이다. 우리가 마음을 먹는다면 천하의 누구도 우리의 앞을 막아설 수 없다!"
"예, 장로님!"
무당이라는 그 이름이 그들의 가슴에 불을 붙인다.
"거추장스러운 일을 피하려 했을 뿐이지, 세상이 두려워 숨어들려는 게 아니었다. 이제 모두가 그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모두를 한번 돌아본 허산자가 차가운 목소리로 일갈한다.
"준비해라. 검총으로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