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당신, 나랑 일 하나 같이 합시다. (3)
'과연 화산신룡이군. 명불허전이다!'
홍대광은 더 이상 청명의 실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의심할 필요가 없다. 반쯤 돌아가 버린 그의 턱주가리가 충분히 증명해 주고 있으니까.
맞았냐고?
아니……. 뭐 그렇다면 그렇고 아니라면 아닌데.
정확하게는
'내가 다시는 거지 굴 쪽으로는 오줌도 안 싼다.'
하고 외치며 나가려는 청명의 허리를 잡고 늘어지다가 팔꿈치에 스쳤을 뿐이다.
참으로 다행이다.
스쳐서 이 정도인데, 제대로 맞았으면 평생 고기를 먹지 못하게 됐을 것이다.
"……백이십만 냥 쳐드리겠습니다."
"장난하세요?"
"백삼십……."
"하?"
"……."
홍대광은 당당한 정파인 개방의 제자다. 그것도 낙양이라는 대도시의 분타주를 맡을 만큼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이다.
그런 이가 새파란 놈에게 마냥 질질 끌려다녀서야 되겠는가.
홍대광이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개방이 그토록 강조했던 단 하나의 가치를 굳건히 지켜 나가기로 다짐했다.
"하이고오, 소협. 저희 분타에서 융통할 수 있는 돈은 그게 전부입니다. 본파에서 지원을 받으려면 최소한 보름은 더 걸립니다. 정 그러시면 제가 이백만 냥 쳐드릴 테니, 백만 냥은 지금 받으시고, 한 달 뒤에 나머지 백만 냥을……."
"삼백만 냥."
"……."
"일시금 삼백. 아래로는 꿈도 꾸지 마세요."
'저 귀신 같은 새끼.'
홍대광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삼백만 냥이라는 말이 나온 것부터 기경할 일이다. 홍대광이 평가한 저 장보도의 적정가가 삼백만 냥이었으니까.
그 가치를 알고 말하는 건지, 아니면 모르고 일단 야바위를 치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액수가 꼭 맞아떨어진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지만 도리가 없다.
청명은 의자에 등을 한껏 기댄 채 다리를 꼬았다. 그의 한 손에 들린 장보도가 팔랑거린다.
마치 이거 안 받으면 난 하오문으로 바로 달려간다 하고 몸으로 말하는 것 같다.
"소협……. 지금 말했듯이 지금 낙양 분타에는 그만한 돈이 없습니다."
"네, 알아요."
"예?"
"거지굴에 무슨 돈이 있겠어요. 그 백삼십이라는 것도 여기저기 빌릴 돈을 다 감안해서 나온 금액이죠?"
"그, 그렇소이다."
"근데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다 방법이 있으니까."
"……방법이라시면?"
청명이 흐뭇하게 웃는다.
"저기 옆에 보면 대륙전장 낙양 지부가 있던데, 거기 가서 개방 이름으로 급전이 필요하다고 하면 삼백만 냥 정도는 바로 끊어 줄 거예요. 전표로 가지고 오세요."
"……."
"간단하죠?"
어, 간단하지.
그거 정말 간단한 일이네. 내가 그걸 왜 몰랐을까?
"물건 산다고 사채를 쓰라니! 인생 망하는 지름길이지 않소!"
"왜 그걸 그쪽이 걱정해요? 거지가 더 망할 인생이 어디 있다고?"
"……어?"
틀린 말은 아닌데?
"망했으니 거지지! 안 망했는데 왜 거지를 하나, 거지를!"
"……."
설득력이 있다.
'아, 살짝 넘어갈 뻔했다.'
"여하튼 그렇게는 무리요. 우리는 더 이상은 드릴 수 없소. 하오문에서도 그만한 돈은 준비하지 못할 거요."
이건 사실이었다.
그만한 돈을 단숨에 내놓는다는 것은 어디서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 어쩔 수 없죠."
청명이 주섬주섬 장보도를 쑤셔 넣었다.
'이번에는 안 당한다, 이놈아.'
아까야 워낙 값을 후려쳐서 불렀으니 하오문에 가는 게 겁이 났지만, 이번에는 아니다.
하오문이라 해도 홍대광이 부른 이상을 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니 여유로울 수 있었다.
"하오문에 가 보려 하오? 그것도 좋겠지. 가서 물어보고 다시 오시오."
"안 가는데요?"
"……응?"
"하오문 안 간다구요."
홍대광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그럼 어딜 가시는 거요."
"무한에요."
"무한? 거기는 왜?"
"낙양 분타에서 안 산다니까 무한 분타에 가서 팔려구요."
"……."
홍대광의 눈가가 경련을 일으켰다.
"개, 개방 무한 분타에?"
"네. 아, 여기보다 멀어서 안 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됐으니 어쩔 수 없죠."
딸꾹.
홍대광의 입에서 딸꾹질이 터져 나왔다.
'저게 무한 분타에 팔리면?'
망한다. 말 그대로 망한다.
분타가 왜 분타인가? 본단에서 처리하지 못하는 일을 깔끔하게 처리하라고 분타다. 그리고 각 분타주들은 다들 훗날의 개방 방주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이들이다.
누가 얼마나 공을 세웠느냐가 재깍재깍 평가된다. 그런데 무한 분타에서 약선의 장보도를 입수하게 된다면 무한 분타주의 평가가 수직 상승 할 것이다.
'안 돼! 자오개(慈烏?) 놈이 득 보는 꼴은 못 본다!'
세상 모든 사람이 청명 같지는 않겠지만, 모두가 조금씩은 그런 마음을 품고 있기 마련이다.
내가 잘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이 잘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특히나 그 사람이 경쟁 관계에 있다면 말이다.
"부지런히 달리면 하루면 도착할 테니까. 그럼 가 볼게요."
"자, 잠시만 소협!"
"왜요?"
"자, 잠시만!"
홍대광이 피눈물을 흘리는 심정으로 청명을 잡았다.
무한 분타주 자오개가 이득을 보는 것도 문제지만, 자오개 놈의 성정이라면 반드시 청명이 낙양 분타에 먼저 들렀다가 못 팔아서 자신에게 왔다는 말을 떠들어 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단순히 자오개가 득을 보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약선의 장보도를 그냥 보냈다고 늙어 빠진 장로 놈들……. 아니, 장로님들이 맨발로 달려와 싸대기를 후려칠 게 분명하다.
"사, 사겠소! 삼백만 냥!"
"누가 삼백이래요?"
"……예?"
청명이 씨익 웃으며 품 안의 장보도를 꺼내 흔든다.
"삼백이십."
"아, 아니 조금 전에는……."
"물건의 시세라는 건 잠깐 사이에도 변하는 법이죠. 그새 이십만 냥이 올랐네요."
"……."
"어이쿠야. 물건 값이 또 오르려고 하네. 이제는 삼백삼십이네. 조금만 더 있으면 삼백오……."
"으아아아아! 사겠소! 산다고! 삼백삼십!"
"크으.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너무도 감격해 버린 홍대광이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야 말로 감격의 증명 아니겠는가?
'내가 이 어린놈에게 있는 대로 얻어맞고, 가진 걸 다 털릴 줄이야.'
심지어는 고리대금까지 쓰게 생겼다.
대체 어디서 이런 놈이 떨어졌는지 알 수가 없다.
"진품임은 확실히 보장되어야 할 것이오!"
"물론이죠."
"만약 가품일 시에는 반드시 그 책임을 묻겠소!"
"그러세요."
"끄응."
홍대광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젠 기호지세다.
"장백! 장백이 밖에 있느냐?"
"예, 분타주님!"
"대륙전장에 가서 내 이름을 대고 이백오십만 냥을 융통해 오거라. 그리고 분타의 자금도 팔십만 냥 가져오고!"
"그, 그 큰돈을 대체 어디 쓰시려고……?"
"잔말 말고 빨리 가, 인마!"
"예, 옛!"
장백이라 불린 이가 부리나케 달려가자 청명이 흐뭇하게 미소를 짓는다.
"거래할 줄 아시네요."
"……소협도 아주 죽여주는구려."
정말 죽이고 싶을 만큼 말이다.
홍대광이 이를 뿌드득 갈았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생긴 건 어린 티가 풀풀 나는데 하는 짓은 강호의 늙은 생강들보다 더하다. 강호의 노인들은 그래도 체면이라는 것이 있어서 의뭉은 떨지언정 최대한 자신의 체면에 손상이 가는 짓은 피하기 마련인데.
눈앞의 이놈은 잃을 게 없다는 것처럼 굴고 있다.
"내 화산신룡이 이리 돈을 밝힐 줄은 몰랐구려."
"돈 벌 줄 알았으면 거지 됐겠어요? 이해합니다."
"……."
아니, 근데 이 새끼는 어떻게 하는 말마다 사람 속을 뒤집어 놓지?
"끄응."
협상에서 털리고, 말로도 털린 홍대광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사 버린 것. 이제는 되돌릴 수 없다. 차라리 산 장보도를 어찌 처리할지나 고민하는 게 낫다.
저 꼴 보기 싫은 놈을 생각할 게 아니라.
'진품이기만 하다면 삼백만 냥도 싸게 먹히는 거다.'
팔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그 이상의 돈은 언제든 받아 낼 수 있다. 그리고…… 팔지 않는다는 선택지도 있다.
'이건 검총의 장보도다.'
팔아 치운다면 거금이 되겠지만, 차라리 개방이 검총을 발굴해 버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가능만 하다면…….
'아니, 진짜 그게 더 나을 수도 있겠는데?'
홍대광이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는 와중에, 장백이 안으로 뛰어 들어온다.
"여기 있습니다. 분타주님."
"수고했다.
"그리고 여기 아까 말씀하신 술……."
홍대광의 입매가 살짝 떨린다.
'아니. 이 새끼 왜 눈치도 없이 술도 이렇게 비싼 걸?'
'이미 협상이 되었으니 술은 물려라'라고 말을 하려는 찰나 청명의 손이 번개같이 술병을 낚아챈다.
"아이고! 감사!"
"……."
재빨리 뚜껑을 딴 그가 술병에 코를 들이댄다.
"크으, 향 좋고. 개방 분타에는 어울리지 않는 술이네요."
꼴꼴꼴꼴.
병째 나발을 불더니 크으, 하는 소리와 함께 소매로 입가를 쓱 문지른다.
"한잔하실?"
"……괜찮소."
이제 홍대광은 한시라도 빨리 이놈을 보내 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전표를 확인한 그는 다시 한번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 살아생전 전장에서 돈을 빌리는 날이 올 줄이야."
"거지한테는 색다른 경험이겠네요."
"……여기 있소이다. 확인하시오."
받아든 전표만 한 뭉치가 넘었다. 전표를 촤라락 넘기며 확인한 청명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전표를 품속으로 쑤셔 넣었다. 가슴께에 묵직함이 느껴지자 온 세상이 뿌듯해지는 기분이다.
"크, 왜 돈 냄새는 맡아도 맡아도 질리질 않는 걸까."
'진짜 도인인가?'
아무리 봐도 사짜 같은데?
어쩌면 한번 몰락했다가 회복하는 와중에 화산이 원래의 색을 버린 걸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어찌 이런 자가 화산에서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여기 있어요."
청명이 깔끔하게 장보도를 홍대광에게 넘겼다.
홍대광은 장보도를 받아 들고는 눈을 가늘게 뜬다.
'아무리 봐도 진품이다.'
일단 양피지 자체에서 오래된 티가 엄청 난다. 그리고 그어진 선들도 세월에 살짝살짝 바래어 있다.
아무리 정교하게 위조한다고 해도 홍대광은 알아볼 자신이 있다. 하지만 이 장보도에서는 어떤 위조의 흔적도 찾아낼 수 없었다.
"그럼."
청명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때 홍대광이 지금까지와는 달리 살짝 차가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좋은 거래였소. 하나, 한 가지는 명심하시오. 그대가 만약 수작질을 부렸다면 그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될 거요. 천하에 거지의 눈이 없는 곳은 존재하지 않소."
"거 속고만 사셨나. 그거 무조건 진품이에요."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가 있소?"
"네."
"오?"
홍대광의 안색이 환해졌다. 저렇게까지 자신 있게 나온다는 건 그에게도 나쁜 소식이 아니다. 이 장보도가 진품일 확률이 올라가는 거니까.
"그게 뭐요?"
"무당이 그 장보도 해석했거든요. 그러니 진품이죠."
"아. 그럼 확실하……."
홍대광이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그의 수염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한다.
"바, 방금 뭐라고?"
"해석, 그러니까 풀었다고요."
"누가?"
"무당이."
"아……. 무당이?"
"네."
청명이 싱긋 웃는다.
그 웃음이 얼마나 상쾌한지 절로 기분이 좋아질 정도다.
"그럼 곧 무당이 발굴을 하러 가겠구려."
"네. 지금쯤 출발했을 걸요?"
"아, 그러니까……."
홍대광이 마침내 상황을 이해했다. 그리고 그 이해가 부를 만한 반응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걸 왜 지금 말해! 이 미친놈아아아아아아아아!"
청명이 낄낄대며 거지굴을 빠져나간다.
"저 새끼 잡아아아아아아!"
하지만 그 청명이 고작 거지들에게 잡힐 리가 없었다. 달려드는 거지들의 손을 이리저리 잘도 피해 낸 그는 훌쩍 움막 지붕으로 뛰어올라 소리쳤다.
"거짓말은 안 했어요!"
진실을 다 말하지 않았을 뿐이지.
"무당이 뭔가 한다는 걸 사람들이 알기 전에 빨리 팔아넘기는 게 좋을 거예요. 그럼 이만."
청명이 훌쩍 몸을 날리자 분을 이기지 못한 홍대광이 끝내 게거품을 물고 뒤로 넘어갔다.
"분타주님!"
"분타주님 괜찮으십니까?"
"저……. 저 미친……. 저……."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린다.
"안 돼! 내 돈! 이러고 있을 시간도 없다!"
홍대광이 장보도를 움켜쥔다.
그의 두 눈이 불타올랐다.
"지금 당장 검총의 장보도를 살 만한 문파를 수소문해라! 싸게 넘긴다고 해!"
"선별합니까?"
"아니! 있는 대로 다 불러들여! 근처에 있는 문파! 현금박치기 가능한 곳들로! 그리고 문파가 아니어도 괜찮다. 이름 있는 자들이 주변에 있는지 확인하고 모조리 다 불러들여! 그리고 도면 전문가들 불러서 사본 떠라! 당장!"
"예! 분타주님!"
두눈이 이글거리다 못해 활활 타오르는 듯 보였다.
"그리고!"
"예!"
"본파에 지원을 요청해라! 우리 개방도 간다!"
"예?"
"……어디 한번 해 보자! 쟁탈전!"
개방 혼자서는 무당을 감당할 수 없다. 급하게 끌어모은 병력으로는 더더욱.
하지만 이 장보도를 이용해 군웅들을 끌어모은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래. 한번 해 보자고. 이렇게 된 거, 영약 쟁탈전이다! 그 망할 화산신룡 새끼도 족칠 겸!"
그 모든 것이 청명이 짜 놓은 흐름이라는 것을 알 리가 없는 홍대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