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당신, 나랑 일 하나 같이 합시다. (2)
홍대광의 시선이 찻잔에 머물렀다.
이가 나간 더러운 잔에 싸구려 엽차가 따라진다. 하지만 상대는 그런 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후루룩후루룩 잘도 마셨다.
'깐깐한 성격은 아니고.'
맡고 있는 직책상, 나름 여러 문파의 사람들을 만나 봤지만, 이 나간 찻잔을 보는 순간 눈부터 찌푸리는 사람이 꽤 된다.
'거지 굴에 와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바라는 것들이 이상한 거지.'
그런 면에서 눈앞의 이 사람은 일단 합격이다.
장소를 가릴 줄 알고, 상황을 이해할 줄 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러니까……."
홍대광이 살짝 얼떨떨한 시선으로 청명을 보며 말했다.
"그쪽이 그 화산의 삼대제자이신?"
"청명이요."
"그럼 그 화산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화산신룡이?"
"영 마음에 안 드는 별호기는 한데, 다들 그렇게 부르더라구요."
청명이 한숨을 내쉬었다.
신룡이 뭐냐, 신룡이. 낯부끄럽게.
좀 고상하고 있어 보이는 별호도 많을 텐데, 꼭 그런 유치한 걸 붙인다니까.
"어, 그럼, 어……."
슬쩍 청명의 복색을 다시 살핀 홍대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이 슬쩍슬쩍 손에 들린 보고서로 향한다.
'용모파기랑 비슷한 것도 같으니.'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저 나이대의 아이들은 하루에서 반 치씩 자라 버리니까.
일단 가슴에 새겨진 매화 무늬만으로도 저자가 화산의 제자라는 건 어느 정도 증명된다.
홍대광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이 화산의 삼대제자인 화신신룡 청명이라는 것은 알겠소이다. 그래서 무슨 일로 본 분타주를 찾아오셨소?"
"뭐 좀 팔려구요."
"……."
홍대광의 이마에 살짝 핏대가 돋는다.
'이 새끼가 여기가 뭔 난전인 줄 아나?'
개방 낙양 분타에 찾아와 물건을 팔겠다고 한 놈은 이놈이 처음이다.
"……그럼 물건을 팔겠다고 밖에 있는 거지 놈들을 집어 던지면서 들어왔소?"
"분타주님을 만나러 왔다니까 안 들여보내 줘서 할 수 없이 좀 손을 썼죠."
"크흠."
홍대광이 심호흡을 했다.
이건 무작정 청명을 탓할 일이 아니다. 화산신룡이라면 강호에 가지는 명성을 감안했을 때, 그를 만나지 못할 사람은 아니었다.
상대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대충 돌려보내려 한 수하들이 잘못한 일이다.
"그 일에 관해서는 제가 사과드리겠소."
"괜찮아요. 거지가 뭘 알겠어요."
"……."
홍대광이 눈을 가늘게 뜨고 청명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평범하지는 않군.'
놀랄 일은 아니다.
강호에 이름을 날리는 이들치고 평범한 이를 찾는 게 더 어렵다. 그 많은 강호인들 중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이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평범하지 않은 경우가 허다했다.
게다가 당대의 후기지수 중에서 가장 큰 명성을 날리고 있는 화산신룡이라면 성격 파탄자라고 해도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뭘 팔러 오셨다고 했소?"
"네."
"소협. 소협이 강호 경험이 없어서 잘 모르는 모양인데, 개방은 그런 곳이 아니외다. 물건을 팔려면 난전으로 가 보시오."
"아, 그래요?"
청명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도 산뜻하게 일어나는 바람에 홍대광은 되레 당황했다.
'잡을까?'
일단 뭘 팔러 왔는지는 들어 보고 싶은데…….
홍대광이 고민을 채 마치기도 전에 청명이 물었다.
"여기 가까운 하오문 지부가 어디죠?"
뜬금없는 질문에 홍대광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하오문 지부는 왜 찾으시는 거요?"
"물건 팔려구요."
"……."
홍대광의 눈이 흔들렸다. 개방에서 거절당하자마자 하오문을 찾는다는 건 저자가 멋모르고 이곳을 찾아온 게 아니라는 뜻이다.
"혹시 그 팔려는 물건이라는 게……?"
"안 살 사람한테 굳이 말할 필요가 있나요."
"자, 잠시만. 소협, 아무래도 내가 실수를 한 것 같소이다!"
홍대광이 얼른 붙들었지만 청명은 퉁명스럽게 받아쳤다.
"그래도 같은 정파라고 여기로 왔더니만, 거지들은 못 들어간다고 길 막아서지, 분타주는 난전에나 가 보라고 하지. 개방이 영 옛날 같지 않네요."
네가 옛날 개방을 어떻게 알아?
의문이 들었지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이, 일단 다시 앉아 보시겠소이까?"
"흐음. 별로 땡기질 않는데."
"그러지 마시고. 어서, 어서."
그제야 청명이 못 이긴 척 다시 자리에 앉았다. 홍대광이 얼른 크게 소리친다.
"여기 차를 좋은 걸로 바꿔 와라."
"차는 됐어요. 곡차나 주세요."
"……."
홍대광이 고개를 갸웃한다.
곡차는 술의 완곡한 표현이다. 곡식으로 빚은 차가 바로 술 아니던가?
"도인이?"
"그러니 곡차죠."
"어……. 이, 일단 알겠소. 여기 술 내와라! 술!"
크게 지시를 내린 홍대광이 고개를 돌려 청명을 바라보았다.
'멋모르는 자는 아닌 것 같고.'
그럼 정말 건수가 될 만한 걸 물어 왔다는 건데.
홍대광이 얼른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다.
"그래. 팔려고 하는 게 뭐요?"
"이거요."
청명이 지체 없이 품 안에서 장보도를 꺼내 내려놓는다.
'암호문?'
홍대광이 미간이 확 좁아졌다.
한눈에 보기에도 보통 물건이 아니다. 개방의 분타주라는 위치에 있으면서 비슷한 물건을 몇 번 다뤄 본 적이 있지만, 지금 청명이 내민 암호문은 지금까지 그가 봐 온 것과는 그 격이 달랐다.
'대체 얼마나 복잡한 거야?'
저게 만약 제멋대로 그려 놓은 선이 아니라 정말 정교하게 짜인 암호문이라면 대체 얼마나 대단한 자가 만들어 놓은 건지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이, 이거……."
홍대광이 무의식적으로 장보도를 향해 손을 뻗자 청명이 홍대광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에헤이! 손대면 안 되죠. 보기만 하세요!"
"……."
홍대광이 기함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본다.
'시,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오는 줄.'
청명이 손등을 때릴 때까지 홍대광은 그의 움직임을 전혀 알지 못했다. 만약 청명의 손에 검이 들려 있었다면 손목이 잘려 나가도 알지 못했으리란 뜻이다.
'화산신룡이 이 정도였나?'
물론 그는 화산신룡의 실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정보를 다루다 보면 뜬소문과 진실을 어느 정도 구분할 수 있게 된다. 화산신룡의 일화가 회자될 때 종남이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것만 봐도, 과장은 있을지언정 거짓은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소문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라 할지라도, 홍대광이 동작조차 잡지 못했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었다.
'화산신룡에 대한 본방의 평가를 대대적으로 수정해야 한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홍대광이 다시 장보도를 바라보았다. 일단 가장 중요한 건 이거니까.
"이게 대체 뭡니까?"
"에…… 그러니까,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하나."
청명이 어깨를 으쓱한다.
"……."
설명을 모두 들은 홍대광이 장보도와 청명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
"아, 잠시만요."
잠시간 말이 없던 홍대광이 입을 떼려 하자 청명이 손을 살짝 들어 말을 막았다.
"그거 믿어도 되냐, 황당하다, 뭐 그런 말은 사양할게요. 지금까지 충분히 들었거든요. 그리고 그게 진짜인지 아닌지를 조사하고 판단하는 게 그쪽이 하는 일 아니에요?"
"……그렇긴 합니다."
청명이 씨익 웃는다.
"됐고. 그래서 얼마에 살 거예요?"
얼마?
홍대광의 얼굴이 달아오른다.
만약 청명의 말이 모두 사실이고, 이자가 정말 청류검 무진을 때려잡고 그에게서 장보도를 구해 온 것이라면. 그리고 이 장보도가 정말 탈검무흔, 그러니까 약선의 무덤인 검총의 것이라 했을 때.
'견적이 안 나온다.'
무가지보(無價之寶)다.
정확하게 말하면 값은 매길 수 있지만, 그 값의 영역이 홍대광이 판단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선다.
홍대광의 눈이 빠르게 회전했다.
"그러니까, 어……. 이걸, 음……."
그러다 그는 돌연 고개를 번쩍 들어 청명을 바라보았다.
"파신다구요?"
"네."
"왜요?"
"……그게 물건 팔러 온 사람한테 할 말이에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홍대광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이걸 왜 판다는 거지?'
약선의 장보도다. 다시 말하자면 거기에는 각 문파의 신병이기와 혼원단, 그리고 그 연단법이 있을 확률이 높다.
그 셋 중 하나만 강호에 풀려도 피바람이 몰아칠 것이다. 무엇을 손에 넣어도 작게는 개인에서 크게는 문파, 그리고 어쩌면 강호의 운명까지 바뀔 수가 있다.
그런데 그 모든 비밀을 간직한 장보도를 팔아 재낀다고?
홍대광이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청명을 바라보았다.
"차라리 이 장보도의 비밀을 풀어 보는 게 낫지 않겠소이까?"
"안 살 거예요?"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이게 으음……."
청명이 피식 웃었다.
"내가 풀 수 있으면 풀었죠. 그런데 어차피 못 푸는 거 안고만 있으면 뭐 하겠어요? 돈이라도 벌어야지."
"음."
홍대광이 고개를 끄덕인다.
확실히 그건 맞는 말이다. 보물이랍시고 평생을 싸 짊어지고 끙끙대다가 결국에는 보물의 덕을 보지 못하고 죽는 이들도 부지기수다. 차라리 청명이 현명한 건지도 모른다.
'이문에 밝고 판단이 빠르다. 도인답지 않아. 오히려 상인이나 속가에 가깝다. 화산의 제자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그건 이자가 생각 이상으로 위험한 자라는 뜻이다.
문파의 방침에 전적으로 따르는 이들은 아무리 강해도 세상의 이치에 순응하는 법이다. 하지만 이런 이들은 힘을 손에 넣으면 세상을 제멋대로 뒤흔들려 한다.
'삼십 년 내로 화산이 천하에 이름을 떨칠 수도 있겠군.'
홍대광이 생각에 빠진 듯하자 청명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기요."
"아. 말씀하시오."
"서로 바쁜 사람이니까. 빨리빨리 처리하자구요. 얼마 쳐줄 거예요?"
"……음."
홍대광이 장보도를 빤히 바라보다가 슬쩍 청명의 눈치를 살폈다.
'머리 회전은 빠른 것 같지만 아직은 경험이 부족하지.'
그는 짐짓 무척 곤란한 듯한 얼굴을 해 보였다.
"이 장보도가 정말 검총의 장보도가 맞다면 그 값은 무가지보라고 할 수 있소."
"그렇죠."
"하지만 고려해야 할 것이 워낙 많소이다."
"응?"
"첫째는 이 물건이 무당에서 나왔다는 것. 그러니 본디 무당의 물건이라 할 수 있소. 아무리 검총의 장보도라고 하더라도 무당의 물건이라는 걸 알면 구매하려는 이의 수가 반으로 줄 것이오."
"흐음."
"그리고 또 하나는 이 장보도를 풀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실하지 않다는 것."
"흐으음."
"그 외에도 개방이 이것을 매입했다는 사실을 숨겨야 하고, 소문이 퍼지지 않게 은밀히 살 사람도 찾아야 하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게 정말 검총의 장보도라는 증거가 없소."
"그래서요?"
청명이 빤히 홍대광을 바라보았다. 그는 살짝 헛기침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 모든 것을 감안했을 때, 이 장보도의 적정가는 십만 냥. 내 특별히 화산신룡과의 친분을 나누는 값으로 이만 냥 더 쳐주겠소. 십이만 냥 어떠시오?"
"십이만 냥요?"
"그렇소."
"그렇게나요?"
"하하하하. 내 특별히 잘 쳐준 거요."
청명이 빙그레 웃자 홍대광도 그를 마주 보며 마주 웃었다.
'그래, 네가 뭘 알겠냐?'
아무리 머리 회전이 빠르고 검의 재능으로 강호를 울린다지만, 산속에서 풀 뜯어 먹고 사는 도인들이 재물에 밝을 리가 없다. 이런 놈들을 바로 호구라고 하는 거다. 호구.
그러니까 지금 상황은 낙양 분타로 호구가 넝쿨째 굴러들어 온…….
덥썩.
청명이 책상 위의 장보도를 도로 품 안에 쑤셔 넣었다.
"가까운 하오문 지부가 어디라고 했죠?"
"……소협?"
청명이 빙그레 웃는다.
"가격이 잘 안 맞는 것 같으니 저는 그만 가 볼게요."
"소, 소협.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가격이 안 맞다니!"
잘 나가다가 갑자기 왜 이래?
그 순간 청명이 살짝 번들거리는 눈으로 홍대광을 노려보았다.
"십이만 냥?"
"……그, 그렇소. 정 마음에 안 든다면 내가 십오만 냥까지는……."
"십오만 냐아아아앙?"
"……."
홍대광은 그 순간 직감했다.
'잘못 걸렸다.'
이 새끼 이거 가격이 얼만지 대충 짐작하고 있다. 어, 어떻게든 이 사태를 수습해야…….
"이 새끼들이 보자보자 하니까?"
급기야 청명의 눈이 완전히 뒤집혔다.
콰아아앙!
그리고 책상도 뒤집혔다.
사방으로 비산하는 보고서와 엽차를 보며 홍대광이 넋을 놓았다.
"감히 누굴 등쳐먹으려고 들어! 이 거지새끼들이!"
어…….
이거 아무래도 망한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