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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41화 (141/1,567)

141화. 당신, 나랑 일 하나 같이 합시다. (1)

"음."

귓가로 들려오는 낮은 침음에 진현이 살짝 몸을 떨며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머리 위에 단정히 얹힌 도관.

깔끔하게 빗어 정리한 머리.

대추처럼 붉은 얼굴과 배꼽까지 길게 내려오는 검은 수염.

관운장의 현신이라고 할 만한 외양을 가진 눈앞의 이 남자가 바로 당대 무당의 장문인인 허도진인(虛道眞人)이다.

허도진인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무진이 패했다 했느냐?"

"예. 그렇습니다, 장문인."

"그것도 화산의 삼대제자에게?"

"예."

"음."

무표정한 얼굴만 봐서는 그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채기가 쉽지 않다.

"화산신룡이라.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종남의 이대제자 열을 내리 베었다면, 그만한 일을 해도 이상하지 않지."

진현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무당과 종남은 다르다는 말을 하고 싶지만, 그는 입을 열 입장이 아니다. 그 화산에 무참히 패배한 것은 무당 역시 마찬가지니까.

"무진은 어디에 있느냐?"

"부상이 깊어 의약당으로 모셨습니다."

"부상이 깊다라……."

허도진인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현."

"예, 장문인."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아느냐?"

"……제자가 미욱하기 때문입니다."

"아니다."

진현이 고개를 살짝 들었다.

차마 되묻지 못하고 눈으로만 의문을 표하는 그에게 허도진인이 설명을 해 주었다.

"무당의 무학이 가진 특성 때문이다. 무당의 무학은 익히면 익힐수록 더 강해진다. 내력이 깊어질수록, 깨달음이 늘어날수록, 그리고 검을 참오한 시간이 길수록 위력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되지."

"그렇습니다."

"훗날에는 쉬이 이길 수 있는 이도, 내력이 쌓이기 전에는 이기는 게 쉽지 않다. 내 장담하건대 무진이 무당의 무학이 아니라 다른 문파의 무학을 익혔더라면 그 화산신룡이라는 아이에게 패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진현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맞는 말이어도 그렇다 할 수 없다. 무당의 무학을 욕보이는 것이니까. 틀린 말이어도 틀렸다 할 수 없다. 장문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이다.

"알겠느냐, 진현아?"

"제자는 이해가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약선의 연단법이 필요한 것이다."

"아……."

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무당의 연단법보다 더욱 뛰어난 약선의 연단법이라면, 무당의 무학이 가진 약점을 메울 수 있다. 그렇다면 무당은 천하제일문파로 발돋움할 수 있을 것이다.

뻔히 아는 이야기를 다시 하는 데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하나는 목적의 재고,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 중요한 일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돌아온 진현에 대한 질책이었다.

"죄송합니다, 장문인."

"네 잘못이 아니다."

허도진인이 가만히 턱수염을 쓸어내렸다.

"화산신룡이 직접 올 것이라는 건 예상했다. 하지만 화산신룡이 무진을 이길 정도로 강하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너 정도만 되어도 화산신룡은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여겼건만, 내 판단이 잘못되었구나."

"죄송합니다."

이 말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래. 어떻더냐? 네 눈으로 본 화산신룡은?"

"……."

진현이 살짝 입술을 깨문다.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그 황당하기 짝이 없는 자를?

하고 싶은 말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결국 진현의 입 밖으로 나온 말은 하나뿐이었다.

"……그는 괴물입니다."

허도진인의 눈빛이 무거워진다.

"화산의 다른 제자들도 강했습니다. 부끄럽지만 이 제자도 그들을 당해 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화산신룡은 그들과도 한 차원 다른 곳에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그저 강할 뿐이지만, 화산신룡에게서는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벽을 느꼈습니다."

"음……."

허도진인의 입에서 다시 무거운 침음이 흘러나온다.

'그 정도란 말인가?'

무진이 화산의 청명에게 패한 것만으로도 충격적인 일이다. 그런데 지금 진현의 평가는 청명이 겨우 그 정도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진현 이 아이는 당년의 무진보다 강하다.'

세월이 흘러 무진의 나이가 된다면 무진보다 배는 더 강해질 수 있는 아이다. 그런 아이가 청명에게 벽을 느끼고 있다?

'후대의 무당이 화산에 짓눌릴 수도 있겠구나.'

이건 무척 심각한 일이었다.

"진현아."

"예, 장문인."

"다시 갈 수 있겠느냐?"

진현이 고개를 번쩍 들어 허도진인을 보았다.

"제자에게 그럴 자격이 있겠습니까?"

"너는 분명 실수를 저질렀다."

"……."

"그러니 그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주어야겠지. 남영으로 떠날 이들의 준비가 거의 끝났다. 이번에는 장로들이 직접 갈 것이다. 준비가 끝나는 대로 너도 다시 남영으로 가거라. 그리고 검총을 발굴하거라."

"제자 반드시 성공하고 돌아오겠……."

"내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진현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귀로 한층 더 낮아진 허도진인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그 화산신룡이라는 아이는 아마 지금쯤 장보도를 해석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가 똑똑하다면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겠지. 그리고는 적당한 시기를 봐서 연단법을 탈취하려 들 것이다."

"아……."

"검총이 내가 예상한 형태라면…….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바깥의 누구도 알 수 없을 터."

진현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설마…….

"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이라 본다. 네 실수는 네가 만회하거라."

진현이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제자……."

그리고 그의 결연한 눈에 차가운 빛이 어린다.

"반드시 명을 완수하고 돌아오겠습니다."

* * *

낙양.

개방 낙양 분타의 분타주인 홍대광(洪大光)이 책상에 다리를 올린 채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하아아아암!"

더러운 소매로 입가를 쓱쓱 문질러 닦은 그는 시큰둥한 눈으로 책상에 놓인 보고서를 하나 집어 들었다.

"요새는 영 재미있는 일이 없단 말이야."

태평성대라.

최근 몇 년간 강호에는 큰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다. 좋게 말하자면 태평성대고 나쁘게 말하자면 뻔하디뻔한 나날들이 지속되는 중이다.

그건 낙양도 마찬가지인지라 개방의 낙양 분타주인 홍대광도 하릴없이 시간을 때울 뿐이었다.

'분타주를 맡지 말 걸 그랬어.'

별일이 없다와 할 일이 없다는 다른 말이다.

세상에는 대단치 않더라도 반드시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널려 있었다. 지금 당장 처리하지 않아도 별일은 없지만, 쌓아 두면 문제가 되는 일들 말이다.

그런 일들을 밀리지 않게 처리하는 것이 홍대광의 역할이었다.

"뭐 사건 하나 안 터지나?"

그럼 이 지루한 분타주실을 벗어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분타주실이라고 해 봐야 다 쓰러져 가는 움막에 어디서 주워 온 책상을 하나 가져다 둔 것에 불과하지만.

"어디 보자……."

지금 그가 읽고 있는 보고서는 거지들이 물어 온 정보를 적어 둔 것이었다.

낙양의 거지들은 동냥질을 다니며 온갖 것들을 보고 듣는다. 그렇게 보고 들은 것을 분타의 거지들에게 전하면, 그들이 정보를 다시 정리해 홍대광에게 보고한다.

그 보고서에 적힌 정보들 중 쓸 만한 것을 가려내는 게 홍대광이 오늘 해야 할 일이었다.

"어디 보자. 낙성루가 망했다. 거기 음식이 괜찮았는데 아쉽구만. 주인이 마음 착해서 동냥도 잘 받아 줬는데. 음, 그래서 망했나?"

심드렁하게 보던 보고서 한 장을 바닥으로 내던진다.

"낙양 성화무관과 중정보 사이에 시비가 벌어져서 제자들이 주먹다짐을 했다. 성화무관이 이겼고 중정보의 제자들 중 다섯이 의가에 실려 갔다……. 이걸 무림의 일이라고 분류해야 하나?"

보고서 한 장이 책상 옆에 놓인다.

"아랫동네 최씨가 네쌍둥이를 순산……. 이것들이 이제는 하다하다."

홍대광이 손에 든 종이를 구겨서 바닥으로 던졌다.

"끄응. 뭐 제대로 된 정보도 없고……."

새 보고서를 펴든 홍대광이 심드렁한 눈으로 내용을 읽어 나갔다.

"무당의 제자들이 남영에서 화산의 제자들에게 패배함."

홍대광이 피식 웃는다.

"이젠 아주 별 말도 안 되는 소리까지 다 나오는구만. 이 새끼는 뒈졌다."

종이를 바닥에 떨어뜨린 홍대광이 다음 보고서를 읽기 시작했다.

"남영 화영문과 종도관을 대신해 화산 이대제자들과 무당 이대제자들간의 비무가 발생. 화산이 승리하여 종도관이 남영에서 철수."

홍대광이 허리를 바짝 세운다.

'잠깐. 이거 진짠가?'

그의 손길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비슷한 내용이 적혀 있는 보고서를 모두 추려 재빨리 읽고 바닥에 던졌던 보고서까지 다시 주워 읽은 홍대광의 눈이 떨리기 시작한다.

"화산의 이대제자들이 무당의 이대제자를 이겼다고?"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같은 보고가 너무 많이 들어온다. 보고를 종합해 보면 화산의 제자들이 무당의 제자들을 꺾는 모습을 남영 사람들이 모두 지켜봤다는 말인데…….

'그 많은 이들이 모두 입을 맞춰 거짓말을 할 수는 없는 법 아닌가?'

그렇다면 정말 화산의 제자들이 무당의 제자를 쓰러뜨렸다는 뜻이다. 종도관이 남영을 떠나고 화영문이 남았다는 것만 보더라도 그 결과는 명확하다.

"으으음."

홍대광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거 심상치 않은데?'

이미 화산은 종남을 꺾은 적이 있다. 당시 강호에 크게 화제가 되었지만, 그 이후 화산이나 종남이나 침묵을 지키고 딱히 이렇다 할 행보를 보이지 않았기에 일이 크게 번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그 화산이 무당마저 꺾어 냈다.

'한 번은 우연일 수 있다. 하지만 두 번의 우연은 없는 법이지!'

그렇다는 건 화산의 후기지수들이 세인들의 평가보다 몇 배는 더 강하다는 뜻이다. 그러면…….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화산이 부활할 수도 있다는 뜻인가?'

만약 사실이라면 이건 대형 사건이다.

화산은 이미 구파일방에서 퇴출된 곳이 아닌가? 그런 이들이 다시 힘을 갖추게 되면 강호의 세력권이 뒤틀릴 수밖에 없다.

난세는 이런 데서 시작되는 것이다.

"음. 아무래도 섬서……. 응?"

보고서를 뒤적거리던 홍대광이 눈이 부릅떠졌다.

"……무진? 청류검 무진이 의식을 잃고 무당제자들에게 업혀 무당으로 돌아가는 게 목격되었다고?"

이건 또 무슨 개소린가?

청류검 무진이라면 무당삼검 중 하나다. 그런 이가 의식을 잃고 쓰러질 만한 일은 대체 또 뭐란 말인가?

'남영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

아무래도 이건 조사를 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홍대광이 막 바깥의 수하들을 불러들이려던 찰나였다.

우득!

움막의 문이 뜯겨지듯 열리며 삼결개 하나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부, 분타주님! 좀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으응?"

홍대광이 황당한 얼굴로 삼결개를 바라보았다.

나와 보라니.

어디 삼결개 따위가 분타주를 오라 가라 한단 말인가?

'내가 요즘 거지들 기강을 덜 잡았구나.'

쪽박이 좀 깨져 봐야, 왕거지 무서운 줄 아는 법이지. 오늘 제대로 기강을…….

"히이이이익!"

"드,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마, 막아!"

응?

홍대광이 고개를 획 돌렸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지?

"웬 소란들이냐!"

그가 막 언성을 높여 외친 순간.

저벅. 저벅. 저벅.

나직한 발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반쯤 뜯겨 버린 문으로 한 사람이 천천히 들어선다.

"하아아아아."

'입김?'

아니, 저거 연기라고 해야 하나?

쟤 왜 입으로 연기를 내뿜지. 사람 무섭게?

아무런 허락 없이 안으로 들어온 놈이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주변을 둘러본다. 그러더니 정확하게 홍대광에게 시선을 고정한다.

"댁이 여기 분타주요?"

"……."

황망한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던 홍대광이 일단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 그렇소만?"

안으로 들어온 이.

청명이 씨익 웃으며 말한다.

"나랑 일 하나 같이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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