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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40화 (140/1,567)

140화. 이건 죽어도 내가 먹어야 해! (5)

날이 밝았다.

"으라차!"

개운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청명이 창을 활짝 열었다.

"날씨 좋고!"

선명한 햇살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청명은 얼굴을 간질이는 햇볕을 쬐며 씨익 웃었다.

기분이 무척 좋다.

화산에 다가올 아름다운 미래와 밝은 내일을 생각하니 절로 전신에 활력이 솟구치는 기분이다. 허리를 뒤틀어 몸을 푼 뒤 기운차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일찍 일어나셨구려."

"어?"

청명의 눈이 살짝 커졌다.

어제와는 확연히 달라진 얼굴의 위립산이 마당을 쓸고 있었다.

"문주님이 마당도 쓰시네요?"

"하하."

청명의 말에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어제부터 새로 태어난 기분이라 새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챙기려 하고 있습니다."

"음. 좋네요."

청명이 기분 좋게 미소를 지었다.

문주가 직접 마당을 쓰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그만큼 새 마음 새 뜻으로 화영문을 이끌어 보겠다는 뜻이리라.

"소도장께서는 편히 주무셨소?"

"간만에 푹 잤네요. 개운한 게 아주 좋아요."

위립산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리가 있는가?'

어젯밤 청명은 새벽까지 위립산을 치료했다. 방으로 돌아간 시간이 불과 한 시진 반 전이니 잠을 잤다고 해도 겨우 한 시진이나 잤을 것이다.

사람이 어찌 하루 열두 시진 중, 한 시진만 자고도 개운할 수 있겠는가?

'부끄럽구나.'

위립산은 청명의 겉모습만으로 보고 그가 화산을 어지럽히는 망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청명은 사숙과 사형들을 이끌고 화영문을 구해 주었고, 심지어는 위립산의 내상마저 치유해 주었다.

게다가…….

'그토록 청아한 기운을 가진 이가 망종일 리가 있는가!'

청명의 기운은 위립산이 평생 느껴 본 적 없는 도가의 기운이었다. 그 맑디맑은 기운을 직접 접하고 나니 사람이 달라 보인다. 저런 기운을 지닌 이를 좋지 않게 보았다는 사실이 부끄럽기 짝이 없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구나.'

위립산이 더없이 흐뭇한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화산신룡이라더니 말 그대로 신룡 같은 자가 아닌가? 쉽사리 자신을 내보이지 않고, 신룡이라 불리기 부끄럽지 않은 실력을 감추고 있다.

한번 좋게 보기 시작하자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보이는 위립산이었다.

저 밝은 성격도 마음에 들고, 가만히 보고 있으니 얼굴도 꽤 잘생긴 것 같다.

청명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묻는다.

"사숙들이랑 사형들은 아직 안 나왔나요?"

"소도장 말고는 나온 이가 없네."

"벌써 해가 중천에 떴는데!"

"……."

중천?

위립산이 눈을 비볐다.

아무리 봐도 이제 막 해가 뜬 것뿐인데 중천이라…….

'그만큼 하루를 부지런히 산다는 뜻이겠지.'

청명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제 웬만해서는 좋게 생각하려는 위립산이었지만, 그는 한 가지 커다란 착각을 하고 있었다.

바로 기운과 인성은 별 관계가 없다는 점이다.

맑은 도가의 기운을 지닌 이는 인성도 도가의 깊은 뜻을 따르리라 생각하는 것은 도가를 제대로 겪어 보지 못한 이들의 착각일 뿐이었다.

그리고 청명의 경우는 더더욱 그러하다.

"쯧. 아침까지 끝내라고 했더니만!"

청명이 성큼성큼 걸어 본관으로 향했다.

"어딜 가십니까?"

"아. 사숙이랑 사형들에게 시켜 놓은 게 있어서요."

응?

누가 누구에게 뭘 시켰다고?

위립산이 고개를 갸웃했다.

'잘못 들었나.'

아마도 잘못 들었겠지.

위립산이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청명은 휘적휘적 걸어 본채로 다가갔다. 그리고 지체 없이 문을 열어 젖혔다.

"다 풀었……. 뭐여?"

청명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눈앞에 기이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삭. 삭. 삭. 사삭.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백천이 기다란 두루마리에 세필로 무언가를 죽어라 써 갈기고 있다. 바닥으로 흘러내린 종이가 벌써 바닥을 가득 채울 지경이다.

"아닌데. 이게 아닌데. 이게……. 이러면 안 되는데."

까드득. 까드득!

한 손은 가공할 속도로 뭔가를 써 내리고, 다른 한 손은 입에 물려 있다. 그는 엄지손톱을 연신 물어뜯으며 초조한 듯 몸을 떨어 댔다.

"이게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뭐가 나와야 하는데."

청명이 멍한 눈으로 백천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쿵. 쿵. 쿵. 쿵.

탁자에 앉은 조걸이 자신의 머리를 탁자에 연신 들이받는 소리다.

"나는 쓰레기야……. 나는 쓰레기야……. 나는 쓰레기야……. 나는 쓰레기야……."

"……."

윤종은 장보도를 들고 머리를 쥐어뜯고 있다. 바닥에 뽑힌 머리카락들이 수북하다.

그리고 유이설은 한쪽 구석에 틀어박혀 우울한 얼굴로 뭔가를 연신 중얼거리는 중이다. 그녀의 주변만 유독 조금 더 어두운 것 같다.

"……아니, 이게 뭔 짓거리들이여?"

청명이 황당한 눈으로 소리치자 네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본다. 그리고 깊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못 풀겠다고?"

"이건 무리야."

백천이 엄지손가락을 문 채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어디서 기재 소리를 수없이 들은 사람이지만, 이건 답이 없어."

"그래?"

백천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웬만한 천재가 아니면 풀 수 없다. 천하에 이걸 풀 수 있는 사람은 셋도 안 될 거야. 내 장담한다!"

"무당은 풀었다는데?"

"진짜?"

"……."

"……."

백천이 나직하게 헛기침을 했다.

"……무당에 대단한 천재가 있는 모양이지."

청명의 얼굴이 뚱해졌다.

"무당 놈들은 풀었는데 화산은 못 푼다고?"

"누가 그러더냐! 사숙들 중에서는 풀 수 있는 분도 계실 거다. 하지만 여기서 풀어내기에는 시간과 인력이 촉박하다!"

"흐으으음."

청명이 고개를 살짝 돌렸다. 백천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썩은 동태눈으로 허공을 보고 있다. 아무래도 시간을 더 준다고 풀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여하튼 무당은 풀어도 우리는 못 푼다. 이건 우리 능력으로는 무리다. 전문적으로 공부한 이가 필요해."

"뭘 공부한 사람?"

"기관도해라든가, 진법이라든가."

"아, 그걸 공부한 사람은 풀 수 있다 이거지?"

"그럴 거다. 그러니 빨리 찾아내야 한다!"

"여기에서?"

"……."

백천이 자신도 모르게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여기 남영이지.'

그런 걸 전문적으로 공부한 이는 성도(省都)에서도 찾기 어렵다. 하물며 이런 시골에 그런 이가 있을 리가 없다.

"……지금이라도 빨리 큰 도시에 가 보는 게 좋지 않을까?"

"지금이라도?"

청명의 고개가 삐딱해진다.

그리고 그 고개의 각도를 본 윤종이 흠칫 뒤로 물러났다. 평소보다 삐딱함의 강도가 높다. 이건 청명이 제대로 열이 받았다는 뜻이다.

청명의 눈이 번들거리기 시작한다.

"조금만 있으면 무당 놈들이 개떼처럼 몰려올 건데. 뭐? 큰 도시에 가서 해독할 사람을 찾아?"

"……."

백천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청명이 화를 낼 것 같아서 겁이 나는 게 아니다. 청명이 대책 없는 놈인 건 사실이지만, 잘못하지도 않은 일을 트집 잡아 사람을 괴롭히는 놈은 아니다.

지금 백천이 겁을 먹은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청명의 눈이 서서히 돌아가는 게 보이기 때문이다. 저런 얼굴을 보인 후에는 저놈이 정말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바, 방법이 없잖느냐?"

"호오라? 방법이 없어?"

청명이 입꼬리를 쭈욱 말아 올렸다. 그 사악한 미소를 본 화산의 제자들이 움찔한다.

"뭐, 뭐 어쩌려고?"

"정리해 보자고."

청명이 손을 뻗자 윤종이 손에 들고 있던 장보도를 얼른 넘겼다.

"진품은 맞아?"

"맞는 것 같다. 난해하긴 한데 뭔가 법칙이 있다. 시간만 주어진다면 어떻게든 해 볼 수 있겠지만……. 지금 당장은 무리다."

"진품이라 이거지."

청명이 장보도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럼 무당이 장보도를 풀었다는 것도 사실이겠네."

"……."

"자. 그럼 우리는 겨우 이거 하나를 못 풀어서 남영 땅에 있으면서도 검총이 어딘지 알 수 없는 거고. 무당 놈들은 지금쯤이면 무당파에 도착했을 테니, 며칠 지나기도 전에 남영으로 몰려오겠지? 그렇지?"

"……."

청명의 얼굴이 점점 신중해졌다.

"그럼 우린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어서 무당 놈들이 혼원단을 처먹고 더 강해지는 걸 지켜봐야 한다 이거지?"

무당과 혼원단이라니.

그건 청명이 살면서 들어 온 조합 중 가장 끔찍한 조합이다.

무당과 소림은 기본적으로 강대한 내력을 중심으로 하는 무학을 사용한다. 그런 놈들이 더 강한 내력을 얻게 된다?

그건 정말 답이 없다.

당장 어제 싸웠던 무진만 해도 그렇다. 그놈이 혼원단을 먹으면 내력이 증진될 테고, 그리된다면 청명을 제외한 화산의 제자들은 무진의 압도적인 내력 앞에 손도 써 보지 못할 것이다.

"흐으으음."

청명이 눈을 찌푸렸다.

'어떻게 하지?'

청명이 깊은 고민에 빠진 듯하자 윤종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청명아."

"응?"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끼리 무당을 상대할 수는 없잖느냐?"

"……."

"이번에는 포기하고……."

"사형, 지금 뭐라고 했지?"

"응? 포기하자고……."

"아니. 그 전에."

"……우리끼리 무당을 상대할 수 없다고."

"우리끼리. 그래, 우리끼리."

청명이 마치 뭔가를 깨달은 듯 두 눈을 빛냈다.

"우리끼리는 못 막는다……."

청명이 입꼬리를 씨익 말아 올렸다.

"그럼 우리끼리가 아니면 되겠네!"

"으응?"

"판 키우자!"

윤종과 백천이

'아니, 이놈이 또 무슨 짓을 하려고?'

라고 묻는 듯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청명이 친절하게 대답을 해 준다.

"어차피 우리끼리는 무당 못 막아. 내가 무진을 이겼다는 걸 알면 무당도 진심으로 나올 거야."

"그렇지."

"그럼 차라리 판을 제대로 키워 버리는 게 나아!"

"뭘 어떻게?"

"여기 검총이 있다는 정보를 세상에 풀어 버리는 거지."

"……."

백천이 멍한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이놈 제정신인가?'

검총의 존재는 그 정보만으로도 귀하기 그지없다. 억만금을 줘도 바꿀 수 없는 보물과도 같은 셈이다.

그런데 지금 기껏 그걸 얻어 놓고 동네방네 소문내겠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

"아, 아니 잠깐!"

윤종이 손을 들어 백천을 만류했다.

"미친 소리 같지만, 생각해보면 틀린 소리는 아닙니다. 어차피 무당이 여기에 오면 저희는 무당을 못 막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여러 문파가 동시에 몰려오면?"

"……서로 견제한다."

"그렇죠!"

윤종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그럼 미약하지만 확률이 생기기는 합니다. 어부지리를 노릴 수 있으니까요. 무당이 단독으로 검총을 발굴한다면 저희가 끼어들 여지가 없지만…… 다른 문파들이 다 몰려온다면 여지가 생깁니다! 그리고……."

윤종이 고개를 슬쩍 돌려 청명을 바라보았다.

"난장판이 벌어지면 제일 신나게 날뛸 놈도 있잖습니까?"

백천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다 미쳐 돌아가는 느낌이지만.'

이미 기호지세다.

빠르게 머리를 굴린 백천이 청명을 바라보았다.

"그럼 어떻게 소문낼 건데? 여기 검총이 있다고 떠들고 다니면 되나?"

"잘도 믿겠다."

"그럼? 시간이 없잖아!"

청명이 어깨를 으쓱한다.

"우리가 아무리 지껄여 봐야 아무도 안 믿어. 누가 봐도 믿을 만한 놈이 대신 떠들게 해야지."

"그게 누군데?"

청명이 빙긋 웃는다.

"누구가 아냐. 어디라고 해야 맞지."

청명이 몸을 획 돌렸다.

"다녀올 테니 다들 쉬고 있어."

"어디 가려고?"

청명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낙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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