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이건 죽어도 내가 먹어야 해! (2)
청명은 말 그대로 눈이 돌아갔다.
그동안 사소한 이득이나 돈에 집착한 적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이건 그 정도가 아니다. 아예 경우가 다르다.
약선이 누구인가?
다른 건 몰라도 연단법(煉丹法)에 있어서는 고금제일이라는 평가를 받던 사람이다. 연단법이란 곧 영약을 만들어 내는 법. 과거 약선이 만든 혼원단(混元丹)은 소림의 대환단마저 씹어 먹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대환단이다. 대환단!
천하에 잘나가는 문파는 저마다의 연단법을 가지고 있고, 그 연단법을 바탕으로 문도들의 내공을 증진시킨다. 그중 천하제일로 평가받는 것이 소림의 대환단과 무당의 자소단이다.
어마어마한 자금력과 어마어마한 인력을 동원할 수 있는 무당과 소림이 만들어 낸 영약의 효과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하지만 약선은 홀로 연단법을 연구해 그 두 문파의 영약을 뛰어넘은 사람이다.
내력과 무공에 목숨을 거는 무림인들에게 대환단 이상의 효능을 가진 혼원단은 말 그대로 무가지보(無價之寶)였다.
혼원단을 손에 넣은 이는 막대한 내력을 바탕으로 단숨에 고수의 반열에 들곤 했으니 어쩌면 무가지보라는 말도 부족할지 모른다.
백 년 전에도 혼원단이 세상에 풀렸다는 말이 돌면 여지없이 피바람이 불었다. 눈이 돌아 버린 이들은 혼원단을 손에 넣기 위해 서로를 죽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데 혼원단도 아니고 약선의 무덤이라고?
그렇다는 건…….
'연단법이 있을 수도 있다!'
사람이란 자신이 이룩한 것을 남기려 하는 법!
그만한 업적을 이룩한 사람이 자신이 평생을 연구한 연단법을 그냥 없애 버렸을 리가 없다. 반드시 어딘가에는 남겨 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검총이 실존한다면 그 연단법은 그 내부에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
'이건 죽어도 내가 먹어야 해!'
아니. 정확하게는 화산이 먹어야 한다.
왜 소림의 대환단이 유명하고, 무당의 자소단이 유명하겠는가? 무학을 익히는 데 내력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실력이 같다면 내력이 더 많은 이가 유리한 것은 자명한 이치!
그러다 보니 소림이든 무당이든 막대한 돈과 인력을 투자하여 연단법을 연구했고, 천하에 손꼽히는 영약을 만들어 냈다. 그 영약을 섭취한 두 파의 제자들은 나날이 더 강해질 것이다.
그래. 조금 전 무진이 나이에 걸맞지 않은 막대한 내공으로 검기를 줄기줄기 뿜어낸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화산은…….
'연단법이 없지.'
정확하게는 실전됐다.
'영약도 없고.'
덕분에 지금 화산의 제자들은 영약은 구경도 못 하고, 예전에 청명이 숙취해소제로 먹던 매화단이나 나눠 먹는 처지가 됐다.
심지어 이제는 그 매화단도 없다.
청명이 있는 동안에야 근성으로 어찌어찌 해결할 수 있다지만, 청명이 없어진 뒤에는 문파의 연단법이 실전되었다는 사실이 치명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아니! 그러니까 좀 잘 남겨 두지! 그걸!"
청명이 하늘을 보며 삿대질을 했다.
- ……내가 알았나?
장부고 무공이고 다 챙겨 놓고는 연단법을 안 챙겨 놓네! 이러니 의약당 놈들이 지들이 괄시받는다고 파업하는 것 아닌가!
아니, 그래. 뭐 일단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청명이 반쯤 돌아 버린 눈으로 진현을 노려보았다.
"확실해?"
"……예."
"그러니까 그 검총이라는 게 약선의 무덤이라는 게 확실한 이야기냐고?"
진현이 살짝 헛기침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탈검무흔이 천하제일인의 자리에 올랐음에도 세상에 인정을 받지 못한 건, 그의 무공이 형편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형편없는 무학으로 그는 당대의 고수들을 모조리 꺾어 냈죠."
"어, 그렇지."
보통 천하제일인쯤 되면 그 별호와 함께 독문 무공도 같이 유명해지는 법인데, 청명은 탈검무흔의 무공이 무엇인지 들어 본 적이 없다.
'생각하니 확실히 이상하긴 하네.'
"그건 탈검무흔이 상상할 수도 없는 막대한 내력을 바탕으로 별다른 초식 없이 상대를 꺾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도 의심하는 자는 있었으나 약선 본인이 부인하며 흐지부지되었지요. 하지만 그가 죽은 뒤 약선의 지인 중 하나가 그 사실을 털어놓은 것이 은밀히 전해졌습니다."
"그걸 몇몇 문파만 알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진현이 한숨을 내쉰다.
이제 그 몇몇 문파에 화산이 추가될 것이다. 아니, 강도가 추가될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무인의 맹세는 천금보다 중한 법. 사사로운 이득 때문에 사숙의 명예를 더럽힐 수는 없었다.
아니, 그보다…….
'말을 안 하면 우릴 보내 주지 않겠지.'
천하의 무당제자들이 협박을 당한다는 걸 세상 사람들이 믿을지 모르겠지만, 그건 지금 이 자리에서 엄연히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었다.
"이제 저는 아는 것을 모두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저희를 보내 주십시오."
"뭐 당연하지. 나는 약속을 지키는 남자니까."
청명이 빙긋 웃었다.
보내 주지. 보내 주고 말고.
하나만 더 챙기고.
"그래서 장보도는?"
"……네?"
"장보도 어딨냐고. 아까 네가 장보도 발견했다며."
"……."
진현의 눈이 흔들렸다.
"그, 그건……."
진현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알고 있는 사실을 말씀드린다고는 했지만, 장보도까지 드린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랬지. 나도 알아."
"그런데 왜?"
청명이 피식 웃었다.
"잘 생각해 봐. 내가 지금 너희를 이대로 보내 주면 너희는 무당에서 제자들을 끌고 오겠지?"
"……."
"아마 개미떼처럼 몰려올 거야. 그렇지?"
"……."
"그럼 나는 닭 쫓던 개 되는 거지. 아무리 나라고 해도 무당 놈들이 개미처럼 우글거리는데 뭘 해 볼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게다가 니들도 아직 정확한 검총의 위치는 모르는 거 아냐. 장보도를 가진 너희도 못 찾은 걸, 나 혼자 이 남영 땅을 뒤져서 찾을 수 있을 리 없지."
그러니 말을 해 준 거겠지만.
청명이 씨익 웃으며 진현을 바라보았다.
진현의 생각 따위야 빤하다. 청명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혼자서 무당을 상대할 수는 없다. 그리고 화산은 이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청명이 그 사실을 안다고 해도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 적어도 장보도 정도는 넘겨줘야 조건이 맞지 않겠어?"
그게 왜 그렇게 되냐? 그게?
진현이 얼굴을 굳혔다.
"장보도는 드릴 수 없소. 그건 조건에 없었소!"
"못 줘?"
"그렇소!"
"못 준다고?"
"……그렇……."
"정말?"
"……."
진현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싱글싱글 웃으며 다가오는 청명을 보고 있자니 머릿속이 새하얘진다.
"도, 도인이 되어서 타인을 겁박하여 물건을 강탈하겠다는 것이오? 그대도 도를 좇는 이라면……."
"도?"
"그, 그렇소이다!"
"누가?"
.
"……."
청명이 주먹을 움켜쥔다.
뿌드드득.
그의 손에서 나는 뼈 소리가 섬뜩하게 진현을 파고든다.
"내가 몇 번이나 말하는데, 내가 누구라고?"
"화, 화산……."
"쯧쯧. 우리 도사님이 말귀를 영 못 알아들으시네! 다시 한번 말해 주지! 나는 지나가던 강도다!"
"……."
아니. 이 새끼야. 그게 우긴다고 될…….
"선택해!"
청명의 눈이 불타올랐다.
"장보도를 주고 순순히 무당으로 돌아가서 지원군을 끌고 오든가……. 아니면!"
쿵!
청명이 바닥을 내리찍는다. 그러자 땅이 움푹 파이며 커다란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여기 목만 내놓고 묻혀서 내가 검총을 찾아낼 때까지 기다리든가!"
"……."
그의 고개가 삐딱하게 돌아간다.
"어느 쪽이야?"
진현은 더없이 인자한 얼굴로 웃었다.
"물욕을 버려야 진정한 도인이 아니겠습니까?"
힘 앞에서는 도인이고 뭐고 없는 법이다.
* * *
"흐흐흐흐흐흐."
청명이 터덜터덜 산을 내려오며 몇 번이고 장보도를 확인했다.
어지럽게 선과 기호가 마구 뒤섞인 그림. 그 안에서 느껴지는 현기 가득한 기운이 이것이 확연한 진품임을 직감하게 했다.
"크흐흐흐. 약선의 무덤이라 이거지? 선인에게는 하늘이 복을 내려 준다더니. 과연 착하게 산 보람이 있네."
어쩐지 먼 하늘 위에서 누군가 쌍욕을 내뱉으며 삿대질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다.
거, 가만히 좀 있으쇼! 연단법도 안 챙겨 놔서 사람이 이 고생을 하게 만들어 놓고는!
청명이 다시 흐뭇하게 웃으면서 장보도를 바라보았다.
생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기호와 어지러이 그인 선들.
"이걸 해석해야 자신의 무덤에 들 자격이 있다 이거지?"
하하하하.
이런 깜찍한 짓을.
장보도로 보건대 아마도 약선은 자신이 이룩한 것에 대한 자부심이 넘쳐나는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난해한 장보도를 남기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만한 장보도를 풀 수 있는 기재가 반드시 자신의 무덤에 관심을 가질 거라는 확신. 참으로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다.
"뭐 그리 틀린 말도 아니지."
이미 청명이라는 기재가 관심을 가졌으니까.
청명이 장보도를 보며 피식 웃었다.
"이게 암호라는 말이지?"
웬만한 이는 절대 풀 수 없게끔 만들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청명이 누군가?
"후후훗."
제 입으로 말하기는 민망하지만, 청명은 화산이 구파일방의 한자리를 차지하며 잘나갈 때도, 화산 역사상 몇 없었던 역대급 기재로 불렸던 사람이다.
그런 청명이 겨우 이런 장보도 하나 풀지 못할 리가 없지.
청명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장보도를 노려보았다. 이 선의 법칙을 배열하면…….
한참 동안 그렇게 어지러운 선들을 노려보던 청명이 마침내 흐뭇한 표정으로 장보도를 내려놓았다.
"뭐라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네!"
기재는 얼어 죽을.
내가 사람 머리 후드려 까는 데 천재지. 이런 걸 언제 해 봤겠냐고!
"끄응."
영 답답하다는 눈으로 장보도를 다시 몇 번 훑어보다가 결국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무리다."
보기만 해도 눈이 아프고 머리에서 쥐가 나는 느낌이다. 이게 검보라면 하루 종일도 들여다볼 수 있지만, 이건 검의 궤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살짝 고민을 하던 청명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걸 꼭 내가 풀 필요는 없지!"
그에게는 믿음직한(?) 사숙과 더없이 총명한(?) 사형들이 있으니까!
"여하튼!"
곧 무당파 놈들이 본산의 제자들을 이끌고 올 것이다.
무진이 청명에게 패하고 장보도까지 탈취당했다는 것을 알면 무당의 장로 놈들이 눈이 돌아선 우글우글 몰려올 게 분명하다.
아무리 청명이라고 해도 그들을 모두 상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과거 매화검존일 때라면 무당의 장로 따위 열 명을 동시에 상대해도 대번에 후드려 깠겠지만, 지금의 그는 과거의 무위를 회복하지 못했다.
'길어 봐야 사흘 정도인가?'
그때쯤이면 무당의 본산에서 본진이 몰려올 것이다. 최소한 그 전에는 검총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내고 무당 놈들보다 먼저 검총에 들어가야 한다.
"시간이 없네!"
청명은 단호한 의지가 서린 눈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혼원단의 제조법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화산은 다시 한번 나아갈 수 있다. 내력을 얻게 된다는 건, 천하제일검문으로 도약하는 데에 필요한 필수 요소 중 하나를 더 손에 넣는 것이므로.
"일단 나부터 좀 먹고!"
여전히 아쉽기만 한 단전을 주무르며 청명이 박차를 가해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