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내 일은 이제 시작이야! (5)
당황한 무진이 한 발 뒤로 물러서며 의문을 표했다.
"여기서 더 하겠다는 거요?"
"아니. 더 하겠다는 게 아니라 패겠다는 건데?"
팬다고?
나를?
저건 아무리 봐도 원한에 찬 얼굴이다.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던 무진은 다시 한번 다급하게 물었다.
"내가 딱히 그대의 원한을 살 일은 없었을 텐데?"
"허?"
청명이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고개를 옆으로 비딱하게 꺾었다.
"없어?"
"……."
"원한이 없어어어?"
청명이 황당하다는 듯 말한다.
"이거 또라이 아냐?"
헛웃음이 절로 나온다.
"멀쩡히 잘 살고 있던 남의 속가문파……. 아니, 나랑은 관계없는 화산의 속가문파를 너희들 마음대로 두드려 패서 문주까지 자리에 드러눕게 만들어 놓고!"
어…….
분명 그러긴 했지.
"그것도 모자라서 잘 살던 애들을 당장 꺼지라고 윽박질러 놓고! 뭐? 원한이 없어?"
청명의 눈에 한 줄 핏발이 선다.
"여하튼 이래서 대 문파 새끼들은! 지들이 저지른 건 생각 안 하고 남 탓만 한다니까? 시비는 지들이 걸어 놓고 뭐가 어쩌고 저째?"
청명이 손에 침을 뱉으려다 움찔했다.
'아, 복면 썼지.'
큰일 날 뻔했네.
청명이 이대제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것들이야 그냥 시키는 대로 하는 놈들이라 치자. 에휴, 그래. 쟤들이 무슨 죄가 있겠냐?"
삽시간에 위에서 시키는 대로만 하는 어린이가 되어 버린 이대제자들이 울컥하며 눈으로 항의했다. 그러나 청명은 그 반응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너는 아니지. 일대제자쯤 됐으면 문파가 저지른 일에 책임을 져야지."
청명이 묘한 눈으로 이대제자들을 바라보았다.
"설마 내가 사람이 좋아서 니들을 보내 줬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
아니. 근데 너 화산 제자 아니라 강도라며.
거 정체성부터 좀 확립하시고…….
"이 새끼들이 미쳐 가지고! 삼십 년 동안 상납금을 보낸, 이 시대에 마지막 남은 선인을 후드려 까서 내상 입히고 핍박해 놓고. 뭐? 원한이 없어? 없어어어어어?"
청명이 두 눈을 희번덕거린다.
물론 청명이 이들에게 딱히 원한이랄 게 없다.
하지만 문파란 그런 것!
제자의 원한은 문파의 원한! 그리고 속가의 원한은 본산의 원한!
청명은 지금 화산이 아닌 화영문의 원한을 등에 지고 있다.
"이리 와, 새끼야. 너는 하루 온종일 처맞고 한 대 더 맞아야 돼. 위에서 너를 보냈다는 건 네가 이 일에 웬만큼 관여를 했다는 뜻이겠지? 화산의 속가를 건드린 대가가 뭔지 내가 제대로 알려 주지."
무진의 입장에서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 일에 그가 관여한 것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건 그의 윗선에서 결정한 일이었다. 물론 무진 역시 결정에 영향을 주기는 했지만, 이처럼 모든 책임을 떠맡을 정도로 관여한 적은 없다.
"왜? 억울해?"
"……."
"억울은 얼어 뒈질 억울이야! 무당에 입산해서 좋은 건 다 받아 처먹고, 좋은 무공은 다 얻어 배우고, 세상 걱정 없이 편하게 살아 놓고 이제 와서 책임은 남에게 미루시겠다?"
무진이 움찔했다.
"정신 좀 차려라. 문파란 그런 게 아니다. 애새끼가 잘못을 저질러도 위에서 욕 퍼먹고, 위에서 싸지른 똥을 아랫놈이 치우는 게 문파다."
지금 청명이 그러고 있듯이 말이다.
아, 이건 내가 싸지른 건가?
여하튼!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 게 세상 이치지. 지금부터 내가 벌을 줄 테니, 달게 받아라."
"아, 아니……."
금방이라도 청명이 달려들 듯하자 무진은 일단 검부터 움켜잡았다. 청명이 삐딱하게 무진을 보며 목을 우드득 소리 나게 한차례 꺾었다.
"그리고 내가 아까 분명히 말했을 텐데? 순순히 안 불면 걸어서는 못 돌아가게 해 준다고. 크으. 내가 이래 봬도 약속은 꼭 지키는 사람이라서 말이지."
무진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러고 보니 분명 그런 말은 들었던 것 같다. 그때는 그저 오만한 자가 제멋대로 지껄이는 말이라 생각해 흘려들었건만.
타협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무진이 얼굴을 굳혔다.
그때, 진현들과 무진이 순간적으로 시선을 교환한다.
갈등이 밀려온다.
이곳에는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합공을 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체면이고 자시고 이자는 자신들을 순순히 보내 주고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이니까.
그러니 차라리…….
그 순간이었다.
실리와 양심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던 무진을 향해 청명이 득달같이 달려든다.
"어떻게!"
청명이 손에 든 검을 위에서 아래로 강렬하게 내리친다.
미처 뻗어 나오지도 못한 무진의 검기가 청명의 검기에 사방으로 흩어진다.
"시간이 이만큼 지났는데!"
청명이 우측 발을 앞으로 크게 내디뎠다!
"발전이 없냐, 이 새끼들아!"
콰아아아앙!
"끄으으윽……."
어마어마한 힘을 싣고 내리쳐진 청명의 검을 막아 낸 무진의 코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허리가 뒤쪽으로 과도하게 꺾였다.
'허, 허리…….'
허리가 부러질 것 같다.
하지만 어떻게든 버텨 냈…….
"그걸 막냐, 그걸?"
쾅!
아니, 버텨 낸 게 아닌 것 같은데?
청명이 다시 검을 내리치기 시작한다.
"무당파 새끼가! 흘릴 생각은 안 하고!"
쾅!
"그걸 힘으로 막아? 그걸?"
쾅!
무진의 발이 바닥을 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망치로 못을 박는 듯한 풍경.
청명의 검에 가격당한 그의 몸이 바닥을 꿰뚫는다.
"능유제강은 얼어 뒈질 능유제강! 여하튼 입만 살아 가지고!"
콰아아앙!
"끅……."
허리에서 우드득 하는 소리가 들렸다.
허리에서 느껴지는 통증과 검을 막느라 끊어질 것 같은 팔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귀에 짜증과 노기가 뒤섞인, 세상에서 제일 심술궂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가리! 대가리! 대가리! 대가리! 이 새끼야! 내가 대가리 조심하라 그랬지!"
쾅! 쾅! 쾅! 쾅! 쾅!
연속으로 내리쳐진 검을 어떻게든 막고 있는 무진이었지만, 청명의 검에 실린 힘을 감당하지 못한 그의 검이 자꾸만 자신의 머리를 후려치고 튕겨 올라간다.
"끅! 끄윽!"
검면이 한 번씩 머리를 치고 올라갈 때마다 거대한 쇠망치가 머리를 가격하는 고통이 느껴졌다.
그래도 검면으로 막아서 다행이지, 검날로 막았으면 지금쯤 그의 머리에 선명한 선이 몇 개는 생겼을 것이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머리가 아니었다.
'허, 허리가…….'
허리에서 나는 소리가 심상치 않다.
이러다가는 정말 뒤로 접혀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무진이 이를 악물었다.
'바, 반격을 어떻게든……!'
적은 더없이 강대하다.
화산신룡이고 나발이고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배분? 배분 빌어먹을, 그게 지금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일단은 살고 봐야지!
다행히도 눈앞의 이놈은 조금 전부터 그의 머리만을 노리고 있었다. 검으로 막고 있음에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말이다.
'하, 한 번만!'
저 검을 한 번만 흘려내면 된다.
의외의 반격을 맞는다면 반드시 틈이 생길 것이고 무진은 그 틈을 노릴 능력이 있다. 아니, 능력이 없다 해도 반드시 해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 전에 허리가 부러질 테니까.
"대가리!"
검이 번쩍 들린다.
'지금!'
무진이 내력을 있는 대로 끌어올려 하체에 밀어 넣었다. 단단한 반석을 마련한 그는 이윽고 상체의 힘을 쭉 뺐다.
'흘려낸다!'
무당의 기본은 부드러움.
그 어떤 강력한 힘이든 흘려낼 수만 있다면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릴 수 있다.
그가 이를 꽉 깨물고 번쩍 들린 검을 바라보았다. 저 검이 내리쳐질 때 검면으로 비스듬히…….
어?
그런데 왜 저게 안 내려오지?
내가 지금 집중을 과하게 해서 시간이 느리게 흘…….
그때였다.
무진의 시야에 뭔가 시커먼 것이 들어온다. 반사적으로 쳐다보니 무언가가 얼굴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시커먼 것이 그의 얼굴 바로 앞까지 날아온 청명의 주먹이라는 것을 깨달은 무진이 자신도 모르게 빙그레 웃고 말았다.
'개새끼.'
입만 열면 거짓말…….
퍼어어어어어어어억!
"턱주가리! 이 새끼야!"
바닥에 무릎까지 박혔던 무진의 몸이 뽑혀진 못이 튕겨 나가듯 허공으로 솟구친다.
휘리리리릭!
떨어질 생각이 없는지 허공에서 한참 동안 팽이처럼 팽그르르 회전하던 무진의 몸이, 잠시 후에야 바닥으로 처박힌다.
회전력을 감당하지 못한 몸은 바닥에 떨어져서도 한참 동안 구르다 겨우겨우 멈춰 섰다.
"끄르르르륵……."
게거품을 문 채 의식을 잃은 무진을 보며, 청명이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이래서 대문파 놈들은. 쯧쯧쯧."
얼마나 정직하면 적이 한 말을 그대로 믿을 수가 있나? 이래서 화산이고 무당이고 산을 벗어나야 하는 거다. 다들 산에 처박혀서 도경만 읽다 보니까 이리 순진해지는 것 아닌가?
"좋은 경험 했다고 생각해라."
청명이 혀를 차고는 무진에게 다가가 의식을 잃을 그를 발로 툭툭 찬다.
"야, 일어나 봐. 그거 설명해야지. 검……. 검 그거 뭐였지. 검?"
하지만 무진은 도통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
청명이 자신의 주먹에 실린 힘과 여리기 짝이 없는 무진의 턱을 계산해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못 일어난다. 한 삼 일은 푹 자겠네.
'좀 흥분했나?'
뭐 괜찮겠지. 말해 줄 사람은 무진 말고도 많으니까.
"그럼……."
청명이 고개를 슬쩍 돌렸다.
청명이 목만 돌려서 보내는 시선에, 무당의 이대제자들이 움찔하며 한 발 뒤로 물러선다.
"그 검……. 뭐시기 하는 게 뭔지 아는 사람?"
"……."
입을 다물면 된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란 날아든 질문에는 어떻게든 반응을 하는 법이고, 지금 그들의 앞에 있는 놈은 눈치라면 귀신 싸대기를 후려칠 놈이었다.
"너! 그리고 너!"
정확하게 진현과 진무를 지목한 청명이 씨익 웃는다.
"이리 와 봐."
"……."
진현과 진무가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마지못해 쭈뼛쭈뼛 청명을 향해 걸어갔다.
'이건 안 된다.'
'못 이겨.'
무진의 턱을 주먹질 한 방에 돌려 버리는 인간이다. 이곳에 있는 이들 모두가 합공을 해도 이긴다는 보장이 없다. 게다가 기세가 이미 넘어가 있는데 합공이 제대로 될 리가 있는가?
어색한 얼굴로 다가온 이들에게 청명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검……. 검 뭐?"
"……검총."
"그래! 그랬지. 검총. 그게 뭔지 말해 줄 사람?"
진현과 진무가 입을 꾹 다물었다.
"오? 말하지 않으시겠다?"
대항할 의지는 잃었지만, 그렇다고 아는 걸 다 토해 낼 수는 없다. 그건 그들에게 남은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어, 뭐. 좋아. 인정해. 말하기로 한 건 이놈이니까. 너희는 나랑 약속한 게 없지. 약속이라는 게 남이 대신 지켜 주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
진현의 눈에 의문이 일었다.
세상에, 이놈의 입에서 상식적인 말이 나오다니?
"그럼 거기서 그냥 구경해."
"……예?"
"구경하라고."
"뭘……?"
"뭐긴 뭐야."
청명이 씨익 웃는 게 복면 너머로도 느껴진다. 그 웃음에 괜히 불안해지는 두 사람이었다.
"말을 안 해 주면 말할 사람을 깨워야지."
말할 사람?
설마 무진을 말하는 건가?
"어, 어떻게?"
저렇게 의식을 잃은 사람을 어찌 깨운다는…….
"내가 나름 살아 보면서 느낀 건데."
청명이 바닥에 쓰러진 무진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세상일 전부를 폭력만으로 해결할 수는 없어."
그렇지.
이상하게 맞는 말을 하…….
"그러나!"
청명의 눈에 살기가 번들대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해결할 수 있지!"
"……."
"일어날 때까지 패면 언젠가는 일어나겠지. 아니면 뒈지거나! 너희들은 거기서 절대 입 열지 마라! 절대로!"
진현이 빙그레 웃었다.
그냥 말을 하는 게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