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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34화 (134/1,567)

134화. 내 일은 이제 시작이야! (4)

검이 내리쳐진다.

무진이 반사적으로 몸을 옆으로 굴렸다.

나려타곤(懶驢打滾).

게으른 나귀가 바닥을 구른다는 의미. 체면을 중시하는 무인들을 바닥에 몸을 굴린다는 것을 더없이 수치스럽게 여긴다. 그러나 지금의 무진은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쾅!

이내 그가 있었던 자리에서 폭음이 터지더니 바닥이 움푹 팬다.

그 위력을 눈으로 확인한 무진이 삽시간에 얼굴을 굳혔다.

맞았으면?

즉사(卽死)다.

"어쭈? 피해?"

검으로 바닥에 구멍을 뚫는 기사(奇事)를 만들어 낸 청명이 건들거리며 무진에게로 시선을 보낸다.

무진이 입술을 깨물며 바닥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한층 더 신중해진 얼굴로 청명을 노려본다.

'강하다.'

전신의 털이 곤두서고 모골이 송연해진다.

단 일격.

그 일격만으로 상대의 강함을 짐작하는 데 모자람이 없었다.

어쩌면 저자는 무진이 단 한 번도 대적해 본 적 없는 강대한 적일지도 모른다. 저 장난스러운 태도와는 달리 그 실력만은 분명 진짜였다.

어째서 저만한 실력자가 복면을 쓰고 나타나는 등의 괴이한 짓을 하는 건지는 도통 이해할 수 없지만, 겉모습만 보고 상대를 경시하는 마음은 버려야…….

무진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직도 이런 멍청한 생각이나 해 대고 있다는 말인가?'

경시가 아니다.

경시란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하는 것. 하지만 지금 그는 저 청명에 비한다면 명백한 '약자'였다.

"후우우우우."

낮게 심호흡을 한 무진이 투명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청명을 응시한다.

"뭘 꼬나봐?"

"……."

이번에도 예상치 못한 말을 들었지만, 조금 전과는 달리 무진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부동심을 유지했다.

"어쭈?"

그래도 무당은 무당이라는 건가?

청명이 피식 웃으면서 무진에게 걸어갔다.

건들거리는 그의 발걸음에 맞춰 무진의 검이 가볍게 오르내린다.

촤아아아아.

맑은 폭포가 쏟아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그의 검 끝에서 푸른 검기가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청류검(淸流劍)이라.

그 별호에 더없이 걸맞은 검기였다.

"타아아앗!"

무진이 기합을 내지르며 검을 떨친다.

청강부진(淸江不盡).

수십 개의 푸른 비단이 일제히 펼쳐지는 듯한 광경이었다. 이미 무진을 잘 알고 있고, 태청검법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는 무당의 이대제자들조차 그 엄청난 위용에 자신도 모르게 입을 쩌억 벌렸다.

저 하나하나가 모두 면기(綿氣).

무당 특유의 끊어지지 않는 검기다. 일반적으로 짧게 발출해 내는 검기와는 다르게 한 번의 검기에도 몇 배의 심력과 내력이 소모된다.

부드럽다.

한없이 부드럽다.

하지만 그 부드러움 속에는 거역할 수 없는 강함이 숨어 있다. 그야말로 외유내강의 검기.

"호오?"

짧게 감탄사를 내뱉은 청명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자신에게 날아드는 수십의 비단 폭 사이로 뛰어들었다.

스스스슷.

보법을 밟는 그의 몸이 흐릿해진다 싶더니 이내 허공으로 치솟는다.

암향표(暗香飄).

화산의 독문보법을 밟아 나간 청명의 몸이 깊은 밤 고요히 낙화하는 매화 꽃잎처럼 쏟아지는 푸른 검기 속을 유영하기 시작했다.

그건 마치 광포한 폭류 위를 한 마리의 붉은 나비가 누비는 광경 같았다.

진현의 눈이 부릅떠진다.

수준이 다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무진의 무위는 그의 예상을 한참 뛰어넘었다. 그리고 무진을 상대하는 청명의 무위도 감히 그가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게 고수의 혈투.'

절로 전신에 힘이 들어간다.

승패에 따른 이득 따위는 머리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그저 이 전투를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지켜봐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다른 이대제자들의 생각 역시 다르지 않은지, 그의 등 뒤에서는 숨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카가가각!

바닥에 닿은 검기의 물결이 대지를 깊게 갈라낸다.

저 부드럽기 짝이 없는 비단 같은 물결에 저만한 위력이 숨어 있다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스치기만 해도 살이 갈라지고 뼈가 부러질 것이다.

하지만 더 대단한 건 그런 검기를 줄기줄기 뿜어내는 무진이 아니라, 그 어마어마한 검기의 물결 속을 아무렇지도 않게 누비는 청명이었다.

스으으읏.

검기가 아슬아슬하게 청명의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타닷.

가볍게 검을 짚어 허공으로 몸을 띄운 청명은 검기의 물결을 거스르며 무진을 향해 빠르게 나아갔다.

거칠 것 없는 경쾌한 동작!

옅은 미소까지 머금고는 허공을 유영하듯 무진을 향해 나아간다.

'진즉에 이럴 것이지!'

그가 아는 익숙한 무당의 검이다.

무당삼검이라는 이름을 거저 딴 건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안 되지!"

그 순간.

쇄애애액!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새로운 검기의 물결이 청명을 향해 뻗쳐 왔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였다.

하지만 청명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의 입가에 담긴 미소가 오히려 더욱 짙어진다.

검을 슬쩍 뻗은 청명이 날아드는 물결을 가볍게 베어 낸다.

촤아아아악!

넘실거리며 밀려온 검기의 물결이 청명의 검기에 베이며 좌우로 갈라진다.

청명은 물결 깊숙이 검을 찔러 넣고는 그 반동으로 몸을 허공으로 띄워 올렸다.

파앗!

쏟아지는 물결과 그 물결을 헤쳐 나가는 구도가 일순 무너진다. 높이 몸을 띄워 올린 청명이 달빛을 받으며 아래로 낙하했다.

그 모습을 보는 무진의 얼굴이 일순 딱딱하게 굳었다.

"타아아아앗!"

면면부절.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검기는 멈추기도 쉽지 않다. 청명이 검기의 영역에서 벗어나 버린 이상 그의 검은 그저 잘못된 곳으로 향하며 낭비될 뿐이다.

그리고 덕분에 틈이 드러나고 만다.

청명이 달을 등지고 무진에게 날아든다.

"하앗!"

그에 질세라, 무진이 기합을 내지르며 청명을 향해 좌수를 뻗었다.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지는 기운이 청명을 향해 뿜어졌다.

'면장(綿掌)!'

무당을 대표하는 장법!

부드럽게 물줄기처럼 이어지는 장력!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위력은 천하의 어떤 장력에도 뒤지지 않는다.

하강하던 청명이 허공을 박차고 몸을 빙글 돌렸다. 면장의 공력이 그의 옆구리를 스치며 허공으로 치솟는다.

그 순간이었다.

청명이 살짝 얼굴을 굳히며 허공에서 몸을 틀었다. 하지만 분명 스치고 지나간 공력이 다시 방향을 바꾸더니 그의 등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회선장(回旋掌)까지?'

공력의 수발이 경지에 오르지 않고서는 결코 사용할 수 없는 기술이다.

"제법!"

청명이 날아드는 면장의 공력을 향해 다리를 쭉 당긴다.

그리고는 그대로 면장의 공력을 걷어찼다.

콰앙!

한동안 가벼운 발출음만 들리던 공간에 커다란 폭음이 터졌다. 면장을 걷어찬 청명이 그 반동을 이용해 어마어마한 속도로 무진을 향해 달려든다.

"차아아아아앗!"

그새 태청검법의 검기를 회수한 무진이 얼굴을 굳히고 검을 들어 올린다.

그리고!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무진이 검으로 허공에 부드러운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희고, 검은 검기가 허공에 선명한 형상을 만들어 내었다.

"혜검(慧劍)이다!"

진현이 자신도 모르게 비명에 가까운 탄성을 질렀다.

태극혜검(太極慧劍).

무당을 상징하는 검이자 무당의 최고위 검법.

너무나도 난해하고 복잡하여 조사 이래로 누구도 완성하지 못했다는 불가해(不可解)의 검법.

'사숙께서 벌써 혜검을 전수받으셨다는 말인가?'

진현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긴다!

의심한 순간도 있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이미 승부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태극혜검은 무적의 검법.

제아무리 청명이 날고 기는 재주가 있더라도 저 검 앞에서는…….

그 순간이었다!

"아니, 이 새끼야!"

청명의 검이 노을빛 검기를 뿜어내더니 허공에 만들어진 태극의 형상을 주저 없이 후려쳤다.

콰아아아아아앙!

태극이 깨어진다.

"커억!"

그 충격으로 무진이 피를 뿜으며 나가 떨어졌다.

털썩.

바닥에 떨어진 그는 입가를 움켜잡고 두어 차례 선지피를 뿜어내었다. 솟구치던 내력이 일순 역류하며 내상을 입은 것이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리는 눈으로 청명을 바라본다.

"어, 어떻게?"

이기고 싶었다.

상대는 너무도 강했고, 이대로 가면 무당의 명예가 땅에 떨어질 판이었다. 그렇기에 아직은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명을 받았음에도 태극혜검을 꺼냈다.

아직 얻은 것은 한 초식에 불과하지만, 혜검은 혜검! 청명을 쓰러뜨리는 데는 무리가 없을 거라 여겼다.

그런데 일격.

고작 일격에 무너지고 만 것이다.

어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무진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탁.

바닥에 내려선 청명이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복면 사이로 드러난 그의 눈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잘나가다가 뭐 하는 짓거리야!"

"……으음?"

무슨 소리지?

"하. 이래서 요즘 것들은. 어디 숙련도 안 된 검을 꺼내고 있어. 뒈질라고!"

"……."

무진이 두 눈을 부릅떴다.

"이 새끼가 무당 놈이라는 게 기본이 안 되어 있네. 야! 더 좋은 검술 꺼내면 무조건 더 세냐? 그럼 뭐 하러 기초 검술부터 익혀 나가냐! 처음부터 제일 센 거 익히면 그만이지!"

"아……."

"죽어도 손에 익은 검으로 승부를 봤어야지. 멍청하게 손에 익지도 않은 검을 꺼내 들어? 여기가 전쟁터였으면 넌 지금 죽었어."

청명이 혀를 찬다.

'저래서 문제라니까.'

청명이 화산에 매화검법이 아닌 칠매검을 전해 준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모든 문파들이 무학을 단계적으로 나눠 익히게 하는 데엔 다 이유가 있다. 기본 검술을 완숙하지 못한 이는 언젠가는 파탄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칠매검조차 완전히 익히지 못하는 놈들이 매화검법을 익힌다?

'검에 먹힌다고.'

지금의 무진처럼 말이다.

주제에 맞지 않는 검술은 오히려 독이 된다. 무진이 태극혜검을 꺼내지 않았다면 몇 합은 더 버텼을 것이다.

"속이 빈 바위는 단단한 돌멩이에도 으스러지는 법이지. 겉만 익힌 혜검 따위는 태청검법만도 못해!"

무진의 눈이 흔들렸다.

자신이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내가 쌓아 온 것.'

태극혜검.

그 드높은 이름에 마음을 빼앗겼다. 태극혜검만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 낼 수 있다면 세상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거라는 마음에 섣불리 꺼내 들고 말았다.

무란 쌓아 나가는 것.

결코 오르는 것이 아님을 잊고 있었다.

무진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포권을 했다.

"가르침에 감사드리오."

패했다.

하지만 패하지 않았다면 결코 얻지 못했을 귀한 교훈을 얻었다. 그러니 무참한 패배 앞에서도 아쉬울 리 없었다.

무진은 되레 개운한 얼굴로 청명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표했다.

인사를 받으며 청명이 빙그레 웃는다.

"야."

"……예?"

"뭐 다 끝난 것처럼 굴고 있냐?"

"……."

"이리 와. 넌 뒈지게 맞아야 돼."

"……."

무진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고개를 든 그는 보았다. 청명의 눈이 '원한'으로 번들대는 모습을 말이다.

어?

이자가 왜 이렇게 열받았지?

그러나 그 의문을 풀어 줄 생각 따윈 없다는 듯 청명이 검을 틀어쥐고는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온갖 심술을 얼굴에 잔뜩 담은 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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