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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33화 (133/1,567)

133화. 내 일은 이제 시작이야! (3)

무진(無振). 대 무당파 22대 제자.

무당의 이대제자인 무자 배의 일원이자, 천하에 그 이름을 떨치는 무당삼검(武當三劍)의 일인.

별호는 청류검(淸流劍).

그를 수식하는 말은 이 외에도 많았다.

확실한 것은 그는 지금의 무당을 이끌어 가는 이들 중 하나라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문파의 대소사는 장문인과 장로들이 결정하지만, 그 결정된 대소사를 실행하는 이들은 일대제자다. 그리고 무진은 그 무당의 일대제자 중에서도 수위에 꼽히는 이다.

천하의 모두가 그를 칭송하고, 천하의 모두가 그를 받든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는 법.

그는 오늘 처음으로 그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하는 이를 만났다.

'화산신룡이라.'

무진은 싸늘한 기운이 서린 눈으로 눈앞의 복면인을 노려보았다.

'아무 생각이 없는 멍청이는 아닐 테고?'

그런 멍청이들이 무당의 이대제자들을 쓰러뜨릴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는 건 역시 비장의 한 수가 있다는 뜻.

하지만 그 한 수가 무진에게도 통할 거라 생각하는 건 더없는 오만이다.

무진의 검 끝이 가만히 청명에게로 향했다.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하지 않다. 서로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검을 부딪쳐 원하는 것을 쟁취할 뿐이다. 그게 강호의 방식이니까.

"무량수불."

무진이 나직하게 도호를 외웠다.

그 도호가 거슬린다는 듯 청명이 가볍게 고개를 꺾는다.

'자세 좋고.'

안정되어 있다는 느낌.

청명이 보기에도 딱히 흠잡을 것 없는 자세다. 그 오만하던 무당의 이대제자들이 저자에게는 과하게 깍듯한 이유가 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저 정도라면 강호에 명성을 꽤 떨치고 있을 것이다.

이대제자까지야 결국은 후기지수.

하지만 지금 청명의 눈앞에 있는 이는 후기지수가 아니다. 진정한 무당의 검수가 지금 청명을 노리고 있다.

금방이라도 살을 꿰뚫을 듯한, 칼날 같은 기세와 함께 말이다.

청명이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이 정도라면 다시 태어나 그가 검을 맞대 본 이들 중에서는 당연히 최고수다.

하지만…….

"아. 붙기 전에 하나만."

무진의 눈썹이 꿈틀댄다.

"인제 와서 없었던 일로 하자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그저 내기를 걸고 싶은 것뿐이에요."

"내기?"

"네."

청명이 씨익 웃으며 말한다.

"기껏 이겼는데 얻는 게 없으면 서로 섭섭하잖아요. 그러니 서로 바라는 것 하나는 들어주죠. 저는 그 검총인가 뭔가가 뭔지 듣고 싶은데요?"

무진이 가만히 청명을 바라본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음에도 눈가에서 웃음기가 배어난다. 감히 그의 검을 앞에 두고 웃는다라…….

"해 주지."

"오? 화통하신데?"

"대신 그쪽이 진다면 복면을 벗고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해라. 그리고 화산은 결코 무당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인정하는 걸로 하지."

"거참. 나 화산 사람 아니라니까. 하지만 뭐 좋아요. 그 정도는 해 드리죠."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대신 져 놓고 딴말하기 없기에요."

무진의 얼굴이 치욕으로 일그러졌다.

"나는 무당의 제자다. 혀를 깨물고 죽을지언정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크으, 감동적이네요."

청명이 씨익 웃었다.

'이래서 이런 애들이 편하다니까.'

조금만 긁어 주면 지들이 알아서 더 날뛰거든.

"자, 그럼 시간 끌 것 없이 시작하죠. 덤벼 보세요."

완전히 아랫사람을 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이윽고 무진의 몸에서 살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사형 괜찮을까요?"

"……."

진현은 그 말에 바로 대답을 내어 놓지 못했다. 어째서 대답을 하지 못하는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다.

저자의 정체는 화산신룡 청명이 분명하다.

저 체형과 저 말투. 무엇보다 제정신이 아닌 듯한 태도가 의문의 여지를 앗아 가지 않는가?

'나는 저자의 실력을 보지 못했다.'

화산의 제자들과 맞붙을 당시, 화산신룡은 뒤에 앉아 구경이나 했을 뿐, 단 한 번도 검을 들지 않았다.

그 태도에서 보건대 어쩌면 그곳에 있었던 화산의 제자 중, 가장 강한 이는 화산신룡이었을지도 모른다.

- 그쪽들의 실력으로는 저놈을 끌어낼 수 없소. 수준이 맞아야 하는 법이지.

그래. 그 화정검이 그리 말했다.

진현을 쓰러뜨린 화정검이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화산신룡이 무진을 꺾는 건 불가능하다.

무진과 청명의 사이에는 적어도 삼십 년의 시간이 존재한다. 동 배분 사이에서는 절대의 강자로 불리는 이가 바로 무진이다.

그런 이를 삼십 년의 시간을 넘어 상대한다고?

어찌어찌 한 배분 정도는 따라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배분이 둘이나 차이가 난다면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아비뻘을 넘어 할아비뻘에 가까운 이를 무슨 수로 이긴다는 말인가.

무진이 청명의 나이로 강호를 종횡할 때 청명은 태어나지도 않았다. 그 세월의 힘은 결코 인력으로 따라잡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진현은 그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리 불안하다는 말이더냐?'

진현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고, 이미 한번 절대 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이들에게 패해 본 진현은 이 상황을 냉정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특히나 저 여유 넘치는 청명의 자세가 자꾸만 사람을 불안하게 한다.

'안 돼.'

진현의 눈에 핏발이 선다.

그가 화정검에게 패한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거기에서 끝날 일이다. 하지만 무진이 청명에게 패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라도 한다면 그건 정말 끝장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된다면 무당은 줄곧 화산의 아래로 평가될 테니까. 적어도 청명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말이다.

'그럴 일은 없다! 절대로!'

진현이 핏발 선 눈으로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검 끝에 새파란 검기가 어린다.

두 배분 아래의 어린 검수를 상대하기에는 과한 처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진은 검에 실린 내력을 빼지 않았다.

상대는 무당에게 망신을 준 것은 물론이고, 이제는 그에게까지 시비를 걸고 있다. 그런 자를 벌하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화산신룡이라.'

그 이름은 무진 역시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몰락해 가던 화산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신성.

이토록 호사가들을 흥분시킬 만한 일도 흔치 않을 것이다. 성급한 자들은 이미 그를 천하제일 후기지수의 자리에 올려 두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 화종지회 이후 이 년간 딱히 이렇다 할 만한 활동이 없어서 이제는 조금 시들해진 면이 있지만, 결국 명성이란 허울일 뿐. 중요한 것은 이자가 해낸 일들이다.

만약 화종지회의 소문이 모두가 진실이라면, 눈앞의 청명이라는 작자는 결코 경시할 수 없는 실력자일 것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여기에서 꺾어 두어야 한다.'

그가 한층 더 진지해진 얼굴로 청명을 노려보았다.

얼핏 보기에는 딱히 강해 보이지 않았다.

무란 수련을 통해 육체에 쌓아 나가는 것. 경지에 오른 이들은 굳이 그 힘을 표출하고 싶지 않다고 해도, 자연히 배어 나온다.

동작 하나하나가 무의 이치를 따르게 되고, 은연중에 강한 기세가 흘러나오는 법이다.

그렇기에 서로 검을 맞대 보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상대의 강함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눈앞의 복면인에게는 강자의 기세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이목을 속이고 근처까지 접근하지 않았더라면 정말 평범한 강도라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정신 나간 강도라고 생각했겠지.

알 수가 없다.

강한지. 강하지 않은지. 제정신인지. 제정신이 아닌지.

세상의 혼란을 한데 모아 사람에게 쑤셔 넣은 것 같은 자다.

"눈싸움은 그쯤 하시고, 덤비시라니까요?"

"나더러 선공을 하라는 건가?"

"네."

"……나더러?"

무진의 눈썹이 꿈틀댄다.

아까 덤벼 보라는 둥 하는 말이 설마 진심이었단 말인가.

아무리 화산의 제자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저자가 청명임은 너무도 명확하다. 그런데 지금 두 배분이 높은 자신에게 선공을 하라는 것인가?

"오만함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그럼 제가 가죠. 후회나 하지 마세요."

"이!"

막 호통을 치려는 순간이었다.

파아아앗!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뭔가가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간다.

주륵.

무진이 그게 청명이 날린 검풍이라는 것을 깨달은 건, 길게 갈라진 볼에서 뜨거운 피가 흘러내린 시점이었다.

"……."

"인사는 했어요."

청명이 씨익 웃었다.

그 순간 무진은 청명을 경시하는 마음을 완전히 버렸다.

'목을 노렸다면 목이 잘렸다.'

방심?

아니, 방심하지 않았다.

그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청명의 검이 몇 배는 빨랐을 뿐이다.

무진이 입술을 질끈 깨문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실책.

하지만 아직 만회의 여지가 없는 건 아니다. 무진이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배려에 감사하오."

"감사까지야."

청명이 어깨를 으쓱한다.

"감사하는 마음이 있으면 적당히 하지 말고 제대로 했으면 좋겠는데."

"당연히……."

무진의 눈에 새파란 빛이 어렸다.

"그럴 생각이오!"

무진의 발이 땅을 박찬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의 속도로 청명을 향해 달려들었다.

청명이 그 광경을 보며 눈을 빛냈다.

'그래야지!'

청류검 무진.

최근에는 강호에 딱히 관심이 없는 청명조차도 한 번은 들어 본 이름이다. 그만큼이나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다 보여 봐라.'

확인해 볼 수 있다.

백 년 전의 강호와 지금의 강호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강호의 무학은 발전했는가?

아니면 마교와의 전쟁으로 잃은 것들 때문에 약해졌는가?

종남의 제자들은 그 척도가 되어 줄 수 없었다. 그들의 무학은 변질되었고, 청명이 상대한 이들은 후기지수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무진이라면 그 척도가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우우우우웅!

무진의 검이 새파란 검기를 뿜어내었다.

'태청(太淸)인가?'

검기가 마치 강물처럼 밀려온다.

도도한 대하(大河).

무당이 자랑하는 끊이지 않는 검기. 그 강대한 흐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내력이 필요하다.

무당의 이대제자들이 척도가 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당의 무학은 진정한 대기만성의 무학.

무당 특유의 후발제인(後發制人)도, 그 부드러움도, 결국에는 상대를 압도하는 막대한 내력에서 나온다. 같은 무학이라 할지라도 내력의 크기에 따라 그 위력이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는 것이 무당의 무학이다.

보라.

저 끊임없이 밀려오는 검기의 강물을.

청명이 푸르게 또 푸르게 밀려오는 검기를 보며 살짝 눈을 가늘게 떴다.

'청류검이라.'

그 이름에 걸맞은 검기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하지!'

청명의 검이 느릿하게 앞으로 겨누어진다. 그의 검 끝에 붉은 노을빛 검기가 어렸다.

우우우우웅.

이내 노을빛 검기가 밀려오는 검기의 강물을 좌우로 갈라낸다.

무진이 두 눈을 부릅떴다.

'가른다고?'

이 검기를?

"말도 안 되는!"

의식하기도 전에 경악하는 탄성이 터져 나온다.

무당의 검기는 면면부절(綿綿不絶).

결코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검기다. 그런데 그 검이 너무도 간단하게 갈라지고 있었다.

"큭!"

무진이 검을 회수하고는 재빠르게 다시 내지른다.

대하도도(大河滔滔).

검에서 끊임없이 뿜어져 나온 검기가 더욱 짙고 푸른빛을 띠며 흘러들어 간다.

단전에서 솟구친 내력이 남김없이 검을 통해 뿜어져 나온다.

무당의 검은 자연의 검.

자연은 자애롭지만, 때로는 그 어떤 것보다 더 흉포하게 인간을 휩쓸어 버리는 법.

인간이 흐르는 장강의 물길을 막을 수 없듯, 강처럼 흘러나오는 검기에 대항하는 것은 너무도 부질없는 짓으로만 보였다.

'완벽하다!'

무진은 자신이 뿜어낸 검기에 확신을 가졌다.

저놈이 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가 있다 한들, 이 검기를 어찌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만큼이나 완벽하게 전개된 대하도도였다.

이 검이라면…….

그 순간이었다.

"쯧!"

짜증 섞인 목소리와 함께 순간 노을빛의 섬광이 번쩍인다. 그와 동시에 밀려들어 가던 그의 검기가 사방으로 튕기며 완전히 분쇄되고 말았다.

"컥!"

손목으로 전해지는 거대한 힘에 무진이 일순 균형을 잃고 뒤로 나가떨어졌다.

털썩.

바닥에 주저앉은 그의 눈에 검을 떨치는 복면인의 모습에 들어온다.

"볼 것도 없네."

복면인이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그러더니 검을 틀어쥐고는 무진을 향해 걸어간다.

"무당삼검은 얼어 죽을. 그 실력으로?"

"……."

"너는 일단 좀 맞고 시작하자."

청명이 지체 없이 무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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