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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32화 (132/1,567)

132화. 내 일은 이제 시작이야! (2)

"사형. 정신이 좀 드십니까?"

진현이 천천히 눈을 떴다.

진무의 얼굴과 그 뒤의 어두운 밤하늘이 흐릿한 시야에 담겼다. 진현은 눈을 한껏 찌푸렸다.

"여, 여긴……."

"무당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아직 산길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진현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으윽."

"내상이 깊습니다. 자중하셔야 합니다. 사형."

"……내상?"

진현의 눈이 흔들렸다.

그의 뇌리에 자신을 향해 날아오던 매화 잎이 스쳐 간다.

'졌구나.'

상황을 받아들이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부정하기에는 직접 두 눈으로 본 것이 너무도 생생하다.

"……나머지는 어찌되었느냐?"

"사형이 쓰러지고 남은 이들도 모두 패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났습니다."

진현이 무시무시한 눈으로 진무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 맥이 탁 풀리고 만다.

'어쩔 수 없었겠지.'

왜 끝까지 싸우지 않았느냐고 탓하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그건 그저 진현의 아집일 뿐이다. 그가 쓰러지고 다른 사제들도 패했다면, 남은 이들이 달려들었어도 결과는 뻔했을 것이다.

차라리 사제들이 더 이상 다치지 않게 물러나는 것이 현명하다.

"……잘했다."

"죄송합니다, 사형."

"아니다. 네 탓이 아니다. 다 내가… 내가 부족한 탓이지."

진현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완벽한 패배.

어찌할 수 없는 패배감이 진현을 무겁게 짓누르기 시작했다. 진현을 더 고통스럽게 만든 건, 그 패배가 결코 실수에서 비롯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나는 마지막까지 그 검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실력으로 졌다.

화산신룡도 아니고 한 수 아래라고 평가받던 화정검에게.

그 사실이 진현을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사제들마저 모두 패했다는 건 그 강함이 결코 화정검에 한정된 게 아니라는 뜻이 아닌가.'

화산의 이대제자들이 무당의 이대제자보다 강하다.

이 황당한 사실을 믿으라는 말인가?

"……종도관은 어떻게 되었느냐?"

"일단은 종도관주에게 내일 아침까지 종도관을 비우라 했습니다. 그 화정검이 사형의 이름을 들먹이며 요구하기에……."

진현이 눈을 감았다.

확실히 그는 무당이 화산에 패할 경우 종도관까지 남영에서 떠나기로, 명예를 걸고 약속했다. 그 별생각 없이 내뱉었던 약속이 지금의 무당을 옭아매고 있다.

'내가 무당의 이름에 먹칠을 했구나.'

무당과 화산의 싸움을 본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들이 눈이 있고 입이 있는 이상, 이 일은 남영을 넘어 더 먼 곳까지 퍼질 것이다.

화산이 종남의 이름을 먹이 삼아 세상에 그 이름을 다시 떨쳤듯, 이제는 무당의 이름도 화산의 명성을 드높여 주는 장작이 될 것이 뻔했다.

'아니, 그건 부차적인 문제다.'

지금 명성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 종도관이니 화영문이니, 그런 것도 아무래도 좋다. 그들이 남영을 차지하려는 이유는 그런 시시한 게 아니었으니까.

입술을 질끈 깨문 진현이 힘을 주어 말했다.

"진무."

"예! 사형!"

"너는 지금 당장 본산으로 복귀하여 이곳의 상황을 본산에 알리거라."

"예!"

"사제들은 이곳에서 부상을 치료하며 본산의 지시를 기다린다. 무작정 복귀할 상황이 아니다."

"사형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진현이 얼굴이 한껏 굳어졌다.

'남영에서 떠나겠다는 약속은 지켰다. 화영문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지켜 주지. 하지만 무당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진현이 살짝 입술을 깨문다.

얄팍한 면피라는 것은 알고 있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한 약속을 어긴다는 것은 더없이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때로는 대의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진무는 어서 출발해라."

"예, 사형!"

그때였다.

"그럴 것 없다."

모두의 고개가 일제히 한곳으로 돌아갔다. 수풀이 들썩이는가 싶더니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사, 사숙!"

"사숙께서 어떻게……."

모두가 놀람을 금치 못했다.

수풀을 해치고 나타난 이는 그들이 너무도 잘 아는 얼굴이었다.

나타난 이는 진현에게 시선을 주더니 눈살을 찌푸린다.

"네가 당한 것이냐?"

진현이 입술을 깨물었다.

"……송구합니다."

"합공이라도 당했느냐? 화산에서 온 이들의 수가 생각보다 많았던 모양이지? 그게 아니라면 다른 문파의 지원이라도 있었느냐?"

"……."

진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지금 나타난 이에게 자신의 수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건 너무도 힘든 일이었다. 왜냐면 그가 바로 그의 사숙인 무진(無振)이기 때문이다.

무진.

그 이름을 아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하나의 칭호를 떠올리리라.

무당삼검(武當三劍).

무당의 실질적인 무력을 담당하는 일대제자 무(無)자 배.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무당삼검의 일인.

그 무진이 바로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장문인께서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고 나더러 가 보라 하셨다. 보아하니 장문인의 혜안이 틀리지 않았던 모양이구나, 진현."

"……예, 사숙."

"네 입으로 직접 말해 보아라. 남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

진현과 무진의 눈치를 살피던 진무가 슬쩍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사숙, 그건 제가 말씀드리……."

"진무는 함부로 나서지 말거라."

"……사형."

묵묵히 그 상황을 보던 진현은 결국 진중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사숙."

"흐음."

무진이 가만히 턱수염을 쓸어내렸다.

진현의 말대로라면 이대제자 중 누구도 화산의 이대제자를 당해 내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건 진현 하나가 패한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황이다.

"화산이 그토록 강해졌다는 말인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무학이란 대를 이어 전승되는 법. 윗대가 강하면 아래도 강해지는 법이고, 윗대가 약하다면 아래도 약할 수밖에 없다. 때로는 이변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그 이변이 세대 전체에 걸쳐 일어나지는 않는다.

화산은 몰락했던 문파였다. 그러니 지금 화산의 윗대들의 무학은 보잘것없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 그 아랫대가 무당의 제자들보다 강하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흐음."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하던 무진은 진현을 바라보고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아이가 내게 거짓을 고할 리는 없겠지.'

"진현."

"예, 사숙."

"네 이름을 걸고 약속을 했다고?"

"……그렇습니다. 그러나…… 제 명예 같은 것은."

"이놈!"

무진이 낮게 일갈했다.

"네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은 별게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네 이름이 어디 너만의 것이더냐. 네가 추악한 짓을 벌인다면 세상은 네가 아니라 무당을 욕할 것이다. 그게 무당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임을 왜 모른다는 말이더냐!"

"……송구합니다."

무진이 마뜩잖다는 얼굴로 눈살을 찌푸렸다.

"검수의 입에서 나온 말은 가볍지 않다. 또한 네 명예 역시 그리 가볍지는 않을 터."

"……예."

"남영은 포기한다."

"사숙?"

"어차피 남영이야 남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얻으려 했던 곳에 불과하다. 이리되었다면 차라리 남영을 뛰어넘어 바로 검총으로 향한다."

"하나 아직 검총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잖습니까? 그렇기에 남영이 필요한 것 아니었습니까?"

"걱정할 것 없다. 본산에서 검총의 위치를 해독해 냈으니까."

"아!"

진현의 눈이 흔들렸다.

그렇다면 굳이 남영에서 시간을 끌 필요가 없다. 검총으로 바로 가 발굴해 내면 되니까.

"화산에 패한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비한다면 그런 일 따위는 사소하기 그지없다. 설욕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테니, 마음을 다잡거라."

"예, 사숙!"

내내 가라앉아 있던 진현의 눈이 빛을 발했다.

'검총만 열 수 있다면, 이런 치욕쯤은 얼마든지 되갚아 줄 수 있다.'

"부상이 심하다고 생각되는 이들은 본산으로 복귀하거라. 곧 본산에서 지원이 올 테니, 굳이 무리할 필요 없다. 가능한 이들만 나와 함께 간다."

당연히 함께 갈 심산이었던 이대제자들이 우물쭈물하자 무진이 눈을 찌푸렸다.

"검수는 스스로를 냉정히 평가하여야 한다고 누누이 말했거늘! 사형제들의 짐이 될 셈이냐!"

그제야 세 사람이 앞으로 나서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사숙."

"부끄러울 것 없다. 부상을 입은 것이 어찌 부끄러운 일이란 말이더냐. 본산으로 돌아가 치료를 받아라. 뒷일은 내가 맡겠다. 설마 이 무진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

"당연히 사숙을 믿습니다."

"그럼 됐다."

무진이 빙그레 웃었다.

"가서 기다리고 있거라. 본산에 남영에서 있었던 일을 고한 뒤, 내가 아이들을 이끌고 곧장 검총으로 갔다고 전하거라."

"예!"

이대제자들이 빠르게 숲길을 따라 달려 나가자 무진이 진현을 돌아보았다.

"갈 수 있겠느냐?"

"절대 폐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음."

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좋다. 너는 나를 따……."

그때, 무진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간다.

"사숙?"

무진이 수풀의 한쪽을 바라보며 눈을 찌푸린다.

"누구냐?"

"예?"

진현의 시선도 그리고 다른 제자들의 시선도 무진을 따라 이동한다.

사박사박.

풀을 밟는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시커먼 흑의를 입은 사내가 천천히 걸어 나온다.

'흑의?'

검은 야행복. 그리고 검은 복면.

누가 봐도 수상한 복색을 갖춘 이가 태연하게 걸어 나와 그들의 앞에 섰다. 그러더니 태연히 복면을 매무시하곤 입을 연다.

"지나가던 강돈데 말 좀 물읍시다. 그 검총이라는 게 뭐요?"

"……."

"……."

지나가던 강도?

지금 지나가던 강도라고 한 건가?

무진의 눈이 흔들렸다.

'내 살다 살다…….'

살아오며 황당한 일은 꽤 겪어 보았다고 자부하는 무진이지만, 이런 경우는 난생처음이다. 무슨 놈의 강도가 자신을 강도라고 밝힌다는 말인가?

그것도 무당의 문하들 앞에서.

"강도가 이 외진 산길을 돌아다닌다고?"

"……어."

복면인이 살짝 흠칫한다.

"그럼 산적?"

'미친놈인가?'

불과 하루 전 사질이 한 것과 똑같은 생각을 하는 무진이었다.

그리고 하루 전 같은 생각을 했던 그의 사질은 괴한의 말투와 체형에서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저거, 설마?'

생각이 채 정리되기도 전에 말이 먼저 튀어나온다.

"화산신룡?"

"……."

복면인의 고개가 삐딱하게 꺾인다.

"……아니, 내가 뭘 했다고 그걸 바로……. 아니지.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진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티가 너무 나잖아! 인마!

"그래도 화산의 제자이기에 최소한의 명예는 아는 자일 거라 생각했건만, 얼굴을 감추고 강도를 자청하다니! 부끄러움을 모르는가?"

진현의 일갈에 복면……. 아니,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거참 나 아니라니까. 그러네."

"추하구나!"

"거, 이해를 못 하시는 모양인데."

"음?"

"곧 그쪽도 내가 내가 아니라는 걸 인정하게 될 거야. 보통 그렇게 되더라고."

수많은 이들이 몸으로 겪어 본 일이니까.

"사람을 놀려도 유분수……."

노기를 토해 내려는 진현의 눈에 무진의 손이 살짝 들리는 것이 보인다. 진현이 가만히 입을 닫았다.

"그럼."

무진이 빙그레 웃는다.

"그대는 화산의 제자가 아니라 강도라는 말이로군."

"크으, 겨우 말이 통하는 사람을 찾았네요."

"그래. 자네는 절대 화산의 제자가 아닐세."

"엥?"

무진이 허리에 찬 검을 슬쩍 앞으로 내밀었다.

"나는 여기서 그저 강도를 벨 뿐이네. 화산의 제자는 애초에 없었던 거지. 그렇지 않나?"

"호오?"

청명이 탄성을 흘렸다.

저 양반 똑똑한데?

"지금이라도 복면을 벗고 사죄한다면 적당히 끝내 줄 수도 있네. 하지만 끝까지 헛짓거리를 한다면 자네는 내 검이 얼마나 무정한지 알게 될 걸세."

"아, 그래요?"

청명이 피식 웃고는 말했다.

"그럼 이쪽도 미리 말해 두죠. 지금이라도 그 검총이라는 게 뭔지 말하고 순순히 정보를 넘기면 멀쩡히 걸어가게 해 드리죠."

"……."

"아니면 걸어서는 못 돌아갈 거예요. 내 장담하죠."

무진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화산이 강해졌다더군."

"부끄럽게 무슨 그런 소리까지."

……네가 좋아하면 안 되지, 인마. 최소한 정체를 감추려는 노력이라도 해라!

"그중 화산신룡이 제일이라는 말이 있던데?"

"하하하. 과찬이죠."

이제는 진현도 포기해 버렸다. 저 인간은 상식으로 해석하는 게 불가능하다.

"그럼 어디."

무진은 천천히 검을 뽑았다.

"그 대단하다는 화산신룡의 검을 견식 해 보실까?"

"거 말귀를 못 알아들으시네. 저는 화산 사람이 아니라니까요."

청명이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들었다.

"검에 매화 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아, 바꾸고 온다는 게 그만."

청명이 한쪽 눈을 찡긋한다.

"못 본 척해 주세요. 예의 있게."

무진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그러지."

그의 눈이 새파란 광망을 토한다.

"그래야 자네가 큰 부상을 입어도 내가 할 말이 있을 테니까. 각오하게."

"거 무당은 세월이 지나도 바뀌는 게 없네."

청명이 검을 들어 무진을 겨눴다.

"하나만 더 말해도 되나요?"

"……뭔가?"

청명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한다.

"대가리 조심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이게 습관 같은 거라."

무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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