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내 일은 이제 시작이야! (1)
자신에게 달려드는 무당의 검수들을 본 윤종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 이러면 안 되는데?"
"비겁하다고 할 셈이냐?"
"아니, 그게 아니라!"
어디 보자. 여기에 넷?
"아니! 이건 불합리하지!"
윤종이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아무래도 그가 가장 먼저 승리를 거두었기에 그에게로 모조리 몰려온 모양이다.
"이러면 안 된다고!"
"말이 많……."
"아니! 그게 아니라!"
윤종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우리 중에 제일 센 사람이 내가 아니라고! 내가 제일 약하다고!"
"……."
"백천 사숙이야 그렇다 치고! 이럴 거면 두 번째로 센 사람한테 가야지!"
윤종의 너무도 격렬한 반응이 무당의 제자들이 멍하게 그를 바라본다. 억울해 죽겠다는 얼굴을 보니 화도 안 난다.
"두 번째로 센 사람이 누군데?"
누군가가 얼떨떨하게 물어보자 윤종이 바로 손을 들어 한 사람을 가리켰다.
"저기 있잖아! 저기! 눈 없나!"
윤종이 가르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린 이들의 얼굴에 의혹이 어렸다.
저 사람?
검이 공간을 가른다.
지금까지 그들이 봤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화산의 검이 펼쳐지고 있었다.
하늘을 유영하는 듯 부드럽게 펼쳐지는 보법.
화려하지 않지만, 그만큼 더 유려한 검.
유이설의 검이 공간을 접어 내고 있었다.
그녀의 검이 펼쳐지는 곳은 지켜보는 이들이 서 있는 곳과는 동떨어진 느낌이다.
무당 제자들의 눈이 흔들린다.
"그러니까 내가 아니라고!"
윤종이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일갈했다.
유이설은 원래 강했다.
원래대로라면 화종지회에서도 유이설이 이대제자의 대표 중 한자리를 차지했어야 했다. 그녀는 나이는 어려도 입문은 빠른 편이었고 검에도 특출한 소질을 보였다.
냉정하게 본다면 그 시점에도 백천을 제외하면 유이설을 이길 사람은 흔치 않았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청명의 가르침을 받았다.
'저 사람도 제정신은 아니야.'
남들은 어떻게든 청명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온 화산을 숨어 다니는 반면, 유이설은 어떻게든 청명에게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악착같이 쫓아다녔다.
그리고 가르침에 어떤 의문도 표하지 않으며 맹목적으로 배우고 익혔다.
그 짓을 이 년이나 하더니 이제는 검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지에 올라 버렸다.
백천과 직접 붙은 적이 없어서 정확하게 평가를 내릴 수는 없지만, 모르긴 몰라도 밀리지는 않을 거라는 게 윤종의 생각이었다.
털썩.
유이설을 상대하던 무당 제자가 결국은 버텨 내지 못하고 쓰러진다.
차가운 침묵이 장내를 지배했다.
"아아악!"
그리고 날카로운 비명이 그 차가움을 깨뜨린다.
조걸을 상대하던 이도 제대로 일격을 허용하고 다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그의 우측 허벅지에 생겨난 긴 자상에서 피가 철철 흘러내리고 있다.
넷.
순식간에 넷이 쓰러졌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쓰러진 이들 중, 부절검 진현이 있다는 것이다.
'사, 사형이…….'
'한 사람에게.'
무당의 제자들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진현은 그들보다 한 단계 위의 강자다. 다시 말하자면 진현이 쓰러진 이상 그들 중 누구도 저 백천이라는 자를 일대일로는 쓰러뜨릴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다른 이들도 모두 당했다.
남은 사람은 여섯.
쓰러진 이는 넷.
수만 보면 할 만해 보인다. 그러나 쓰러진 이들 중에 진현이 있는 이상, 전력은 오히려 여섯 쪽이 더 약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구나 저들은 티끌만 한 상처도 입지 않았다.
이토록 일방적인 결과를 그들 여섯이서 바꿀 수 있을까?
계산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남은 이들이 차마 달려들지 못하고 움찔거렸다.
그 동작에서 저들이 의욕을 잃었다는 것을 대번에 알아본 백천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계속하겠소?"
"……."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무는 법이다. 백천은 굳이 상황을 거기까지 몰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계속한다면 귀 파에게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부상을 입은 이들은 지금 당장 치료를 받지 못한다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소. 이 일이 사형제들의 미래를 버릴 정도로 대단한 일은 아니잖소?"
"으음."
"물러나시오. 이번에는 우리가 이겼소. 사형제들을 데리고 가 치료하고 오늘 밤까지 남영을 떠나시오. 부절검이 제 명예를 걸고 약속했으니 이제 무당은 더 이상 화영문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 걸로 알겠소. 그리고 종도관 역시 남영에서 떠나시오"
진무는 자신에게 모이는 사형제들의 시선을 받으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진현이 의식이 없는 이상, 결정권자는 바로 그다.
이번 일은 어떻게든 반드시 성공시켜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이미 승기를 잃었다.'
여기서 더 싸워 봐야 피해만 늘릴 뿐이다.
고민 끝에 진무는 양손을 모아 포권 했다.
"화산의 배려에 감사드리오. 오늘은 우리가 패했음을 인정하겠소."
백천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배웅하지 않겠소이다."
"그럼."
진무가 눈짓을 하자 멀쩡한 이들이 부상을 입은 사형제들을 부축하고, 의식을 잃은 이들을 들쳐 업었다.
그러더니 화산의 제자들을 한번 바라보고는 말없이 화영문을 나서기 시작했다.
"비켜 주시오!"
어느새 정문까지 가득 채워 버린 사람들을 밀어 내며 무당의 제자들은 종도관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바라보는 남영 사람들은 다들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은 무학의 수준을 파악할 수 없었다. 그저 뭐가 번쩍번쩍 하고 휙휙 대는 것을 본 게 전부다.
하지만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 무당이 화산에 패해 화영문에서 물러나고 있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다.
'세상에, 무당이…….'
'화산이 무당을 꺾다니.'
이들 중 화산이 무당이 꺾는 결과를 예상한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물론 이 승부의 결과가 화산이 무당보다 강하다는 것을 말해 주지는 않는다. 겨우 이대제자들의 승부로 화산과 무당의 격차를 논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비록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일이라고는 해도 화산이 무당을 꺾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
"허어. 화산이 다시 예전의 위상을 되찾고 있다 하더니. 그 말이 정말 사실인 모양이네."
"그러게나 말일세. 대단하지 않은가? 화영문을 살리기 위해서 무당과 싸우다니!"
"저런 곳의 속가는 할 만하지. 아암. 할 만하고말고!"
무너진 담장 밖에서 승부를 지켜보던 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백천이 그들에게 시선을 한번 주고는 슬며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위립산에게 다가갔다.
"문주님."
"아……. 아? 아!"
위립산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백천을 바라본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는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화산은 화영문을 지켜 내었습니다."
"……."
백천의 옆으로 백천의 사형제들이 도열한다. 자신의 앞에 선 화산의 제자들을 보며 위립산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자꾸만 눈가가 시큰해진다.
"화영문의 문주로서, 화산에 감사를 표하는 바요."
위립산이 깊게 포권을 하자 백천들이 마주 포권 했다.
"별말씀을.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는 위립산과 그런 위립산을 웃으며 바라보는 화산의 제자들.
누가 봐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광경이었다.
"크으, 감동이 들끓는구만?"
"……."
저 망할 놈만 어떻게 하면 말이다.
* * *
"축하드립니다, 위 문주님."
"정말 멋졌습니다."
"하하하핫! 그렇게 화산, 화산 입에 달고 사시더니. 마침내 그 보답을 받으시는군요."
위립산이 입을 귀에 걸고는 연신 포권을 했다.
"감사합니다. 감사드립니다."
무당의 제자들을 떠났지만 위립산은 쉴 수가 없었다. 남영의 주민들이 끝없이 찾아와 그에게 축하를 건넸기 때문이다.
이들 중 대부분은 화영문과 종도관이 대립했을 때, 그저 강 건너 불구경을 했던 이들이다. 그런 이들이 이제 화영문이 확고하게 남영을 차지했다 싶으니 한발 걸쳐 보겠다고 친한 척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 상황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위립산은 미소로 이들의 인사를 받았다.
아무러면 어떤가?
이것 역시 승자만이 누릴 수 있는 권한이다. 가식 어린 인사를 받는 처지가, 패해서 남영을 떠나는 처지보다야 백배 천배 낫다는 건 누구라도 인정하지 않겠는가?
"화산이 이렇게 강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저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위 문주님이 그렇게 당당할 수 있었던 거군요!"
당당은 얼어 죽을.
위립산이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부디 이 미소가 자신감에 찬 미소처럼 보이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렇게 한참 동안 객들의 인사를 받고, 돌아온 제자들의 사죄를 받은 끝에야 위립산은 상황을 정리하고 화영문의 본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직 비무의 상처에서 회복되지 못한 몸은 피로를 호소했지만, 위립산의 마음만은 한없이 산뜻했다.
'이런 날이 오는구나.'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는 오늘 너무 많은 것을 얻었다.
우선 몰락했다고 생각했던 그의 사문이 완벽하게 부활한 것을 그의 눈으로 확인했다. 그리고 그 사문이 그를 돕기 위해서 천릿길을 마다 않고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 아버지의 말이 틀리지 않았습니다.'
돌아가신 선친의 말을 끝끝내 지킨 덕분에 이런 날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위립산은 더없이 경쾌한 발걸음으로 본채로 걸어갔다. 이 안에 화영문을 지킨 영웅들이 있다. 아마 그들도 지금쯤은 오늘의 쾌거를 기뻐하며 축배를 들고 있을 것이다.
'사과해야지!'
그들을 믿지 못했던 것, 그리고 은근히 짜증을 내었던 것도 모두 사과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과 화산의 미래를 논하며 그도 함께 축배를 들리라.
위립산이 본채의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소리쳤다.
"오래 기다리셨……."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아니, 아니! 이 미친놈아! 그만두라고!"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인마!"
"잡아! 저 새끼 당장 잡아!"
"……."
집기가 사방으로 비산한다.
의자가 하늘을 날고 천정에 매달아 둔 등불이 바닥으로 떨어져 바닥에 불이 붙는다.
그 아수라장을 지켜본 감상은 딱 하나였다.
'무당이 다시 쳐들어오기라도 했나.'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럼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
퍼억!
그 순간, 청명에게 달려들던 조걸이 엉덩이를 걷어차이고는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저분이 아까 분명 무당 제자를 쓰러뜨렸던 것 같은데.'
그런 사람이 엉덩이를 걷어차여 쓰러진다?
'꿈인가?'
아니, 현실 맞는데.
난장판이 된 공간에서 사형제들을 밀어 낸 청명이 자신의 봇짐을 잡아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했다.
'옷?'
뭔 옷을 꺼내는데 이 난리라는 말인가? 저 옷이 뭐 대단하…….
어?
저거 완전히 검은 옷이네. 몸에 딱 달라붙고?
허허. 저거 입으면 누가 봐도 완전히 도둑이나 암살…….
아니, 그걸 네가 왜 입어 인마!
순식간에 검은 야행복을 껴입은 청명은 손에 시커먼 뭔가를 들고는 사형제들을 바라보았다.
이마에 식은땀이 잔뜩 맺힌 백천이 양손을 들어 으르렁대는 개를 말리듯 청명을 진정시킨다.
"처, 청명아. 진정하고 다시 생각해 봐라. 무당 애들은 이미 돌아갔다. 굳이 이럴 필요까지는 없어."
"돌아가?"
"그, 그래 돌아갔잖아. 일은 이제 다 끝났다. 이제 화산으로 복귀만 하면 된다. 장문인께서 누누이 말씀하셨잖느냐. 사고 치지 말라고."
청명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아, 그렇지. 사숙이랑 사고, 사형들의 일은 끝났어. 그건 신경 안 써도 돼. 비무하는 꼬라지가 영 마음에 안 들기는 했지만, 이겼으니 그건 넘어가 줄게. 조걸 사형은 빼고."
"……나는 왜."
억울해 하는 조걸을 두고 청명이 빙그레 웃는다.
"그런데 사숙."
"응?"
"사숙들의 일은 끝났지. 그런데."
청명이 손에 든 복면을 얼굴에 뒤집어쓰고는 끈을 조였다. 그리고는 드러난 두 눈을 일그러뜨리며 스산하게 말했다.
"내 일은 이제 시작이야!"
"……."
"내가 저 새끼들이 무슨 음모를 꾸몄는지 속곳까지 털어 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려!"
네가 제일 음모 꾸미는 놈 같거든?
"간다!"
"저 새끼 잡아!"
"막아! 막아! 저거 막아!"
하지만 화산 제자들의 필사적인 돌진에도 불구하고 청명은 유유히 그 모든 손을 피해 내고 문밖으로 몸을 날렸다.
"……."
그러더니 문 앞에 서 있는 위립산에게 한쪽 눈을 찡긋하고는 어둠 속으로 그 모습을 감춘다.
곧 저 멀리서 청명의 광소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망했다."
"아, 안돼……."
허망한 얼굴로 청명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는 화산제자들의 절망어린 음성이 이 상황을 더욱 괴기스럽게 만든다.
위립산은 빙그레 웃는 얼굴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버지. 아무래도 뭐가 좀 잘못된 것 같습니다.'
내 생각도 그런 것 같다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