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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30화 (130/1,567)

130화. 화산의 검은 강하다. (5)

"어……. 어어……."

위립산의 눈이 주먹이라도 들어갈 것처럼 커졌다.

"아, 아니. 저……. 어?"

분명히 처음부터 끝까지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 그런데 눈으로 본 상황을 머리가 제대로 해석해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기고 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압도하고 있다.

저 화산의 제자들이 한눈에 보기에도 무시무시해 보이는 무당의 제자들을 오히려 밀어붙이고 있었다.

위립산은 눈앞의 광경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무당이 어디인가?

강호의 북두(北斗)로 불리는 곳이다. 천하에 수많은 검문이 있지만, 누구도 그 첫 자리에 무당을 놓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비견될 곳이 있다면 남궁세가 정도가 고작.

하지만 그 무당의 제자들을 지금 화산의 제자들이 몰아붙이고 있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화영문은 화산의 속가.

위립산은 화산의 제자라는 것에 무한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자긍심은 자긍심이고 현실은 현실 아닌가?

자신의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이라고 해서, 자신의 아버지가 대장군이나 태사보다 위대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호의와 능력은 별개의 문제니까.

위립산이 화산에 가진 감정은 그런 식이었다.

몰락한 문파임을 알지만, 화산에 가진 정을 끊어 낼 수가 없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몰락한 문파가 지금 그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다. 그리고 심지어 이기고 있는 중이다.

위립산이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움켜잡았다.

뭔가 욱신거리는 느낌이 난다.

"아, 아버지."

"그래."

위소행도 떨리는 눈으로 위립산을 돌아보았다.

"강하구나."

그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더없는 감동…….

꼴꼴꼴.

"……."

위립산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간다.

바닥에 채신머리없이 주저앉아선, 언제 챙겨온 건지 모를 술병으로 나발을 불고 있는 청명의 모습이 들어왔다.

"……."

"크으!"

청명이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살짝 꺾어 위립산을 바라본다.

"한잔 드려요?"

"……."

화산은 바뀌었다.

제자들은 더없이 강해졌고…….

'미친놈도 있고.'

옛날에는 둘 다 없었는데 말이야.

둘 다 없는 것과 둘 다 있는 것 중 어떤 쪽이 더 나은지 심각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는 위립산이었다.

아, 아니지. 지금 이런 걸 고민할 때가 아니지!

"도장은 지금 사형과 사숙들이 싸우고 있는데 술이 넘어가는가!"

"네, 술술."

"아, 그래?"

그럼 뭐 어쩔 수 없……. 아, 이게 아니고!

황당함에 입을 벙긋거리는 위립산을 보며, 청명이 피식 웃었다.

"그동안 한 게 있는데, 저런 애들한테 지면 접시 물에 코 박아야죠."

"으응?"

위립산이 전혀 이해 못 한 얼굴로 반문했다.

청명은 대답 대신 웃기만 했다. 그리고 여전히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마당 쪽을 바라보았다.

'누가 가르쳤는데.'

강할 수밖에 없다. 청명이 직접 가르쳤으니까.

오만하다고?

천만에.

세상을 뒤져 보면 지금의 청명처럼 저들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몇은 된다. 그건 청명도 인정하는 일이다.

하지만 그들이 청명처럼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는다. 절대로!

문파의 최고수들이 이대제자와 삼대제자를 걷어차고 달래 가며 기초부터 일일이 가르치는 모습이 상상이나 가는가?

천하의 어디를 뒤져 봐도 그런 곳은 없다.

설사 그럴 의욕이 있는 사람이 있다 해도, 막상 제자들을 가르치려 든다면, 장문인부터 시작해서 모든 장로들이 달려와 난리를 칠 것이다.

당연한 일.

문파의 강함은 얼마나 많은 고수를 보유하였는가로 결정 나지만, 문파의 위상은 문파 내 최고수가 얼마나 강한가로 결정 난다.

언제나 무당에 밀려 이인자 취급을 받던 화산이 매화검존을 배출해 내자마자 무당의 턱 끝에다 칼을 들이밀고 히히대며 웃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런 만큼 각 문파의 최고수들은 자신의 무학을 함양하고 완성하는 데 모든 힘을 쏟는다. 그리고 그 깨달음의 단절을 막기 위해서 몇몇 직전제자만을 둘 뿐이다.

하지만 청명은 다르다.

그에게는 각문파의 최고수들 이상 가는 무학에 대한 이해도가 있고, 나아가 그들에게는 없는 시간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강해지는 건 중요하지.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야.'

이미 느끼지 않았던가?

그 혼자만 강해지겠다고 아집을 부렸던 삶에서 청명은 결코 도달하고 싶지 않았던 결과에 신음했다. 처참하게 죽어 간 사형제들의 모습은 아직도 한 번씩 꿈에 나와 그를 괴롭힌다.

이제는 절대 그런 꼴은 보지 않을 것이다.

그뿐 아니다. 화산 역시 강해져야 한다.

그리하여 언젠가 청명이 자신의 무학을 완전히 이룩하고, 사형제들이 더욱 강해졌을 때, 화산은 이제껏 오지 않았던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힐 것이다.

꼴꼴꼴꼴.

"크으!"

시원하게 술을 들이켠 청명이 소매로 입가를 닦으며 중얼거렸다.

"조걸 사형, 실수 세 번. 아니, 네 번."

저건 나중에 뒈졌다.

백천이 슬쩍 고개를 돌려 조걸을 바라보았다. 뒤에서 청명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그는 똑똑히 들었다. 조걸도 듣지 못했을 리가 없다.

검을 휘두르는 조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는 게 보인다.

'나는 실수하지 말아야지.'

백천의 시선이 앞으로 돌아간다. 진현이 더없이 굳은 얼굴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백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뭐 하는 거요."

"……뭐?"

"그렇게 체면을 차리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백천의 말을 이해한 진현이 입술을 질끈 깨문다.

그러더니 나직하게 일갈했다.

"사형제들을 도와라!"

"……사형?"

"뭣들 하는 거냐! 지금 당장!"

"예!"

진현의 뒤를 지키던 이들이 뿔뿔이 흩어져 밀리고 있는 사형제들을 지원하러 나선다.

백천은 슬쩍 뒤를 보고는 빙그레 웃었다.

"잊고 싶지 않은 광경이군. 무당의 제자들이 화산의 제자들을 상대하기 위해서 협공을 한다라……."

"……."

진현은 아무런 대꾸도 못 하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빌어먹을.'

이긴다고 해도 자랑스러울 수 없다. 아니, 오히려 수치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반드시 이겨야 하는 싸움이 아니었다면, 패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런 수는 두지 않았을 것이다.

"재미있지 않소?"

진현이 깊게 한숨을 내쉬며 살짝 눈을 감았다 떴다.

그의 얼굴에서 노기와 당혹감이 삽시간에 사라지는 것을 본 백천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하군.'

부동심 측면에서는 백천을 훨씬 뛰어넘는다. 백천은 아직까지 자신의 감정을 저만큼 다스리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뿐.

그때 진현이 입을 뗐다.

"하나 물어도 되겠소?"

"그러시오."

"……무슨 수로 이렇게 강해진 거요?"

"딱히 재미있는 질문은 아니군. 이유야 뭐 간단한 것 아니겠소. 열심히 수련했지."

"지금 나와 장난하자는 거요?"

백천이 어깨를 으쓱했다.

있는 그대로 말해 주어도 믿지 않는데 도리가 있겠는가? 물론 그 열심히 앞에 죽을 만큼, 토할 만큼, 피똥 싸도록 등의 여러 가지 수식어가 생략되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너는 하라고 해도 못 해.'

그건 의지력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포기하거나 반항하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만큼 괴롭혀 줄 존재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지난 수련을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한기가 돌고 몸이 부르르 떨리는 백천이었다.

"아무래도 좋소. 방법이야 어떻든, 그대들이 강하다는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하나 더."

진현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진다. 감정을 웬만큼 다스렸지만 이것만은 참을 수 없다는 듯 말이다.

"저자는 왜 나서지 않는 거요? 지금 무당을 무시하는 건가? 아니면 그 알량한 명성이나마 지켜 보겠다는 거요?"

저자라.

힐끔 청명을 돌아본 백천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착각하는 모양인데."

"……착각?"

"그쪽들의 실력으로는 저놈을 끌어낼 수 없소. 수준이 맞아야 검을 드는 법이지."

진현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렇다고 너무 화내지는 마시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세상에는 한 번씩 이상한 게 나오는 법이오. 다리가 세 개 달린 닭이나, 꼬리가 두 개인 뱀 같은 것 말이오. 그러다 보면 머리가 세 개고 팔이 여섯 개 달린 괴물도 나오는 법이지."

"……삼두육비(三頭六臂)?"

"걱정할 것 없소. 내가 놀아 드릴 테니까. 부절검을 상대하는 데는 화정검 정도가 적당하지 않겠소? 화산신룡은 조금 과하지."

"그대는 저자의 사숙이 아니오?"

"배분 따위로는 강함을 덮을 수 없는 법이지."

한때는 백천 역시 그런 것에 집착한 적이 있지만 말이다.

지금은 그런 것보다 더 강해지는 것이 백배는 중하다.

"슬슬 싸워야겠군. 아니면 저 빌어먹을 사질 놈이 또 불같이 화를 낼 테니까. 하지만 그 전에 하나 약속하는 게 좋겠소이다."

백천이 가만히 진현을 보며 말했다.

"이 승부에서 패한다면 남영에서 물러나시오. 그리고 다시는 화영문을 건드리지 마시오. 그대가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라면 말이오."

진현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우리가 패한다면, 내 명예를 걸고 그리될 것이오."

"그럼 됐소."

스르릉.

백천이 검을 뽑았다.

진현도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통성명도, 몇 마디 대화도 나누었으니 이제 더는 필요한 게 없다. 그저 검으로 누가 더 강한지를 증명할 뿐.

"타아앗!"

진현이 거침없이 백천을 향해 달려들었다.

'틈을 줘서는 안 된다.'

뒤에서 놀고만 있었던 건 아니다. 이미 그는 사형제들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저들의 검은 무섭도록 쾌속하고 현란하다. 선기를 내어 주면 후발제인이고 뭐고 반격조차 해 보지 못하고 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달려드는 진현을 보는 백천의 눈에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새삼 알게 되는군.'

화산의 제자들이 얼마나 괴물 같은 놈과 수련을 해 왔는지 말이다.

- 대가리가 비잖아! 대가리가! 사숙은 오늘 열두 번은 뒈졌어! 어? 뒈지는 취미라도 있어? 그렇게 뒈지고 또 뒈지시겠다? 오냐. 오늘 한번 뒈질 때까지 뒈져 보자!

"끙."

꿈에서도 보기 싫은 기억을 떠올리고 만 백천이 이를 갈며 검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달려드는 진현에게 마주 달려나갔다!

'검룡이라고?'

천하제일의 후기지수 중 하나?

어쩌면 화종지회가 없었다면 종남의 진금룡 역시 육룡에 그 이름을 올렸을지 모른다. 다시 말하자면 진현과 진금룡은 동급의 실력자라는 뜻이다.

백천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는다.

푸른빛의 검기를 두른 진현의 검이 유려하게 움직인다. 마치 푸른 비단 폭을 휘둘러 오는 것 같은 광경이다.

장대한 내력.

그리고 흔들림 없는 검초.

왜 이자가 천하의 칭송을 받는지 이해할 수 있는 검이었다.

하나 그뿐.

백천의 검이 가볍게 흔들린다.

뭉클.

그의 검 끝에서 붉은 매화 한 송이가 피어올랐다.

'나는 피워 냈다.'

스스로를 몰아치고 또 몰아치고, 낱낱이 해체하고 또 해체한 끝에.

백천의 검 끝에서도 마침내 매화가 피어난다.

소담스레 피어난 매화는 이내 수십 송이로 불어난다. 어디선가 바람이 분 듯, 피어난 매화가 허공으로 솟아올라 꽃잎의 비가 되어 휘날렸다.

"아……."

진현이 두 눈을 부릅뜬다.

그는 뒤늦게나마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새파란 검기의 물결이 그의 전신을 뒤덮는다.

면면부절.

끊어질 듯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검기.

하지만 흩날리는 꽃잎을 모두 막아 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스르릇.

검기와 검기의 사이를 파고든 꽃잎이 진현의 옆구리를 길게 가르고 지나간다.

"큭!"

그와 동시에 검초가 흐트러지자 꽃잎들이 일제히 진현을 향해 날아들었다.

"아……."

꽃잎이 진현의 몸을 훑고 지나간다.

털썩.

바닥에 쓰러진 진현을 가만히 바라보던 백천은 조용히 검을 검집에 밀어 넣었다.

"검룡이라는 별호는 귀하에게는 조금 일렀는지도 모르겠군."

싸늘하기 그지없는 일침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어김없이 미묘한 음성이 따라붙었다.

"크으, 멋진 것 보소."

"아, 하지 말라고!"

망할 사질 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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