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화산의 검은 강하다. (4)
"한판 붙는가 봅니다!"
"세상에. 화산이랑 무당이!"
무너진 담장 너머로 내부의 상황을 지켜보는 이들이 다들 마른침을 삼켰다.
"위, 위험하잖아. 물러서야 하지 않을까."
"이런 구경을 어디에서 하겠나! 남영 땅에서는 평생 못 볼 구경이네. 나는 죽더라도 이걸 봐야겠어!"
"그렇긴 한데……."
우려와 기대가 교차된다. 하지만 누구도 뒤로 물러나지는 않았다.
이건 평생을 두고 한 번 볼까 말까 한 큰일이었다.
특히나 남영처럼 별 대단한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곳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대부분이 무당을 중심으로 두고 사건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화산을 응원하는 사람도 꽤 되었다.
다른 곳이라면 화산이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도 없는 이들이 많겠지만, 이곳은 남영. 화영문이 백 년을 버텨 온 곳이다.
화영문은 남영에 녹아들어 그들과 함께 호흡해 왔다. 그들이 화산의 속가임을 당당하게 내세운 덕에 남영 사람들은 화산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이것이 무파들이 속가를 만들고 천하에 속가문파들을 세우려는 이유다.
화산이나 무당처럼 깊은 산중에 위치한 본산들이 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제자들이 천하로 퍼져나가 속가를 자처하며 무관들을 세운다면 그 영향력은 천하에 미치는 법이다.
"화산이 이길 수 있을까?"
"에이, 그래도 무당인데!"
"왜? 저번에 화산이 종남에도 한번 망신을 줬다는데."
"종남과 무당이 같은가! 무당이네, 무당!"
"쉿! 조용히!"
웅성거리는 목소리들을 들으며 조걸이 낮게 심호흡을 했다.
눈앞에는 검은 도포를 입은 무당의 제자들이 서 있다.
'할 수 있을까?'
이전의 그였다면 확신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화산에 입문하여 무학을 익혀 온 세월은 꽤 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무인으로서의 자신을 신뢰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못 이기면 그게 더 문제지.'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다.
검을 잡은 이들의 대부분은 지난 이 년 동안 자신의 실력을 함양하기 위해서 노력해 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중 누구도 화산의 이대제자와 삼대제자들만큼 지독한 수련을 한 이는 없을 것이다.
'무시무시했지.'
그의 등 뒤에는 아수라가 있다.
청명의 가장 끔찍한 점은 여러 가지 모습을 가졌다는 데 있다.
어떤 순간에는 정말 아수라가 따로 없는 놈이, 어떤 순간에는 득도한 고승처럼 검을 논하고, 또 어떨 때는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 알고 있는 지자(知者)가 되었다가 순식간에 그냥 바보로 돌변하기도 한다.
그리고 청명은 그 모든 면을 동시에 다 활용하여 그들을 몰아쳤다.
부르르르.
지난 이 년을 생각하자 절로 몸이 떨린다. 강해질 수만 있다면 힘든 수련 같은 것쯤은 얼마든지 버텨 낼 수 있다고 생각했던 조걸이지만, 화종지회가 끝나고 딱 두 달이 되는 시점에는 그런 결심 따위 불어오는 봄바람에 날려 보냈다.
가지고 있던 것을 모두 허물고 다시 쌓아 올리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저 청명이 입에 거품을 물어 가며 다그친 끝에 해낸 일이다.
그 모든 시간이 지금 조걸의 몸과 그의 검에 쌓여 있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무당의 검수를 바라보았다.
'자신감이라.'
예전에는 자신감이 자신을 믿는 마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실력이 없다면, 그런 건 그저 근거 없는 허세에 불과하다.
자신감이란 시간과 함께 쌓이는 것이다. 자신이 해 온 일을 믿고, 자신의 노력을 믿는다면 굳이 허세를 떨지 않아도 자신감은 넘쳐날 수밖에 없다.
"일대일인가?"
조걸의 입가가 미묘하게 뒤틀렸다.
'명문의 자존심이라.'
이쪽에서 네 명이 나서니 저쪽에서도 네 명이 나선다. 분명 규칙 없이 단체로 붙자고 했을 텐데, 자연스레 그런 형태가 갖춰졌다.
이건 협의를 지켜 정정당당하게 승부하겠다는 의지일까? 아니면…….
'상관없지.'
무시여도 괜찮고, 비웃음이어도 괜찮다. 이제는 조걸도 그런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결국 중요한 건 실력이다.
스르릉.
그의 앞에 선 무당의 검수가 검을 뽑아 든다. 그리고 조걸을 향해 검을 겨눴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자꾸만 웃음이 났다.
조걸이 웃음을 참지 못하자 도관을 쓴 무당의 검수가 눈을 찌푸린다.
"지금 나를 비웃는 거요?"
"아아, 미안합니다. 그런 게 아니라……."
조걸이 여전히 웃음을 참지 못하는 얼굴로 말했다.
"그런 것 있잖습니까? 스스로의 성취가 너무 자랑스러워서 어쩔 수 없이 웃음이 나는 그런 거. 그쪽과는 별 상관없습니다."
"……광오하군."
그럴지도 모르지.
몸이 들썩거린다.
검을 잡은 조걸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간다.
'이게 보이는구나.'
알 수 있다.
눈앞에 보이는 저자는 조걸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검을 든 자세, 몸에서 느껴지는 기운, 그리고 전체적인 균형까지. 지적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서 입이 근질거릴 지경이다.
그가 이자를 보는데 이 정도라면 청명이 그들을 볼 때는 대체 얼마나 엉망인 걸까?
'그러니 잔소리를 쉬지 않겠지.'
"무당의 진공이오."
"화산의 조걸입니다."
이건 비무가 아니다. 더 이상의 대화는 방해가 될 뿐.
조걸이 가만히 기수식을 취했다. 아마도 자존심 때문인지 먼저 공격해 들어오지는 않을 모양이다. 그럼 이쪽에서 가 줘야겠지.
발끝에 힘이 모인다.
조걸은 그 힘에 거스르지 않고 자연스레 앞으로 사뿐히 뛰쳐나갔다. 그의 검이 부르르 떨린다 싶더니 이내 수많은 검영을 만들어 냈다.
빠르다. 느리다. 유려하고 과격하다.
수많은 검의 형태가 뒤섞이며 어느 것이 진짜이고 어느 것이 가짜인지를 구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변화와 환영.
화산 검술의 기본이 되는 화려한 검초가 조걸의 검 끝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어엇!"
그리고 순간적으로 무당의 제자가 당황하여 뒤로 물러난다.
'그건 정답이 아니지.'
물러나면 변화가 더 깊어질 뿐이다. 아마 저자는 이런 검을 상대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입술을 질끈 깨문 무당의 제자가 드디어 검을 펼치기 시작한다.
부드러운 선. 유려한 움직임.
무당의 검이다.
조걸 역시 무당의 검을 겪어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조걸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눈앞의 상대를 압박해 들어갔다.
'괴물 같은 놈.'
- 실전을 많이 겪어야 한다는 말은 별게 없어. 그건 뭐 임기응변을 기르라든가 긴장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야. 말하자면 더 많이 겪고 더 많이 알아야 한다는 뜻이지. 같은 검이라고 해도 어떤 검술이냐에 따라 천차만별로 나뉘기 마련이니까. 화산의 검은 화려하고, 종남의 검은 진중하고, 점창의 검은 쾌속하고, 무당의 검은 부드럽지.
- 그럼 실전을 많이 겪으라는 거냐?
- 아니. 사형들은 그럴 필요가 없어. 내가 있으니까. 다채로운 검으로 다채롭게 처맞아 보면 자연히 익숙해지는 법이거든. 그럼 오늘은 무당의 검으로 부드럽게 처맞는 것부터 시작하자.
- ……왜 꼭 처맞아야 되는 거냐?
마지막 질문의 대답은 듣지 못했지만, 여하튼 저 검은 이미 몸으로 겪었다.
'심지어…….'
청명의 검이 보여 준 부드러움에 비한다면 저건 부드러운 검도 아니다. 청명이 펼쳐 보인 무당의 검이 몇 배는 완성도가 높았다. 그런 검을 상대해 온 조걸이 새삼 무당의 검에 당황할 리가 없다.
조걸의 검이 속도를 높인다.
더 빠르게. 더 화려하게!
무당의 검은 후발제인(後發制人). 결코 서두르지 않고 부동심으로 상대의 검을 받아 내며 제압하는 방식이다.
무당은 이 검으로 천하검문의 수좌에 올랐다.
그 검을 상대하는 방법은?
- 방법은 얼어 죽을. 빠른 걸 잘 막는 놈이 있으면 더 빠르게 쑤셔 버리면 그만이지! 세상 모든 건 상대적인거야! 물은 불을 끄지만 더 큰 불 앞에서는 증발해 날아가는 법이지.
파아아앙!
조걸의 검이 대기를 찢어 낸다.
더없이 쾌속하게 찔러 들어가는 검은 상대의 검이 휘둘러질 틈조차 주지 않는다.
'느려!'
느려 터졌어.
청명은 말할 것도 없다. 사형제들의 검도 이보다 배는 빠르다. 그리고 사숙들의 검은 그보다 더 빠르다.
검의 성질이 달라서?
천만에.
성질은 다를지 모르지만, 기본기는 숨길 수가 없다. 조걸이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나는 강하다.'
저 무당의 검도 조걸의 앞에서는 무력할 뿐이다.
그의 몸에, 그리고 그의 검에.
청명과 함께한 이 년의 시간이 고스란히 쌓여 있다.
당혹감을 어쩌지 못하는 무당 검수의 얼굴을 보며 조걸이 재차 검을 휘둘러 갔다.
그 옆에서 윤종을 상대하는 진화(眞和) 역시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이럴 수는 없어!'
진화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내, 내가 화산 놈 따위에게!'
겨우 화산이라고 말해도 모자라다.
그가 알기로 지금 그를 상대하는 화산의 제자는 그보다 배분이 하나는 더 낮았다. 그는 무당의 이대제자지만, 지금 그의 앞에 있는 윤종이라는 놈은 화산의 삼대제자다.
하지만 지금 진화는 윤종의 검에 벌써 몇 개의 자상을 입은 상태였다.
"으!"
참아 내지 못한 노기가 입으로 흘러나온다.
"이럴 리가 없다!"
분노는 검 끝을 흐리는 법.
면면부절(綿綿不絶) 이어지던 진화의 검에 미약한 틈이 생겨났다.
그리고 윤종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쇄애애액!
순간적으로 찔러 들어온 윤종의 검이 초식과 초식 사이의 빈틈을 노려 검을 후려친다.
카캉!
무당의 검은 상대의 검을 부드러이 받아 넘기는 것에서 시작한다. 다시 말하자면 그 부드럽게 받아 내는 과정에 실패한다면 아무 것도 시작할 수 없다는 뜻이다.
상대의 균형을 흐트러뜨린 윤종의 검이 다시 수십 개의 검영으로 분화하며 진화의 전신을 노려 온다.
허초와 실초가 뒤섞인 너무도 화려한 검.
"이익!"
진화가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렀지만, 또다시 몸의 곳곳이 베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진화는 보았다.
화려하고 쾌속하게 그를 노려오는 수십 개의 검영, 그 뒤!
너무도 차갑게 가라앉아 있는 윤종의 눈을 말이다.
'어떻게?'
검은 너무도 날카롭고 사납지만, 그 검을 휘두르는 윤종은 무서울 정도의 침착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 나는 무당의 제자다!"
발작적으로 소리친 진화가 쏟아지는 검영 속으로 몸을 던진다. 살을 내어 주더라도 뼈를 치겠다는 각오!
하지만 윤종은 딱히 당황하지 않고 뒤로 한 발 물러났다.
정확하게 한 걸음.
그 거리면 충분하다.
어지러이 날리던 그의 검이 부드럽게 아래로 떨어진다. 천천히 바닥으로 낙화하는 매화처럼 그의 검이 달려드는 진화의 어깨로 내려앉았다.
촤아악!
어깨가 길게 갈라지며 피가 뿜어져 나온다.
챙!
진화의 검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그의 얼굴에 경악이 차올랐다.
"너……."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진화를 향해 윤종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도우(道友)의 검은 나쁘지 않았소."
다만.
"그대와 내가 보낸 시간이 너무 다를 뿐이오."
"……."
"물러나시오."
피를 뿜어내는 어깨를 부여잡고 진화가 비척이며 뒤로 물러난다. 그 광경을 보며 윤종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거…… 너무 세져 버렸는데.'
그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뒤쪽으로 돌아간다. 뒤쪽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청명과 눈이 마주친 윤종은 찔끔하여 재빨리 고개를 다시 돌린다.
뭔가 못마땅해 보이는 눈빛을 보아하니 나중에 또 잔소리를 들어야 할 모양이다.
하지만 기분이 나쁠 리가 없다.
윤종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화산의 검은 강하다."
이제는 그들만이 아니라 천하가 그 사실을 알아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