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128화 (128/1,567)

128화. 화산의 검은 강하다. (3)

"뭐, 뭐야?"

안으로 '뛰어' 들어갔던 그의 사제들이 밖으로 '날아'온다.

들어가던 속도보다 배는 더 빠르게.

무당의 제자들이 반사적으로 몸을 날려 튕겨 나오는 이들을 받아 냈다.

"끄으응."

"아오……. 뭐에 맞은 거지?"

다행히 큰 부상을 입은 건 아닌 모양이다. 튕겨 나오던 속도를 생각하면 이상할 정도로 상처가 없었다.

"어떻게 된 거냐?"

"……잘 모르겠습니다. 뭔가 희뿌연 것이 보인다 싶더니……."

진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공격을 보지도 못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한 사람은 그럴 수 있다. 사람이란 실수를 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세 사람이 동시에 공격을 보지 못했다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공격을 한 이의 실력이 뛰어 들어간 사제들보다 몇 배 높다면 가능한 일이겠지만…….

'저 안에 있는 이들은 화영문도와 화산의 제자다.'

잠깐 바삐 굴러가던 진현의 머리가 이내 합리적인 답을 찾아냈다.

"함정을 판 모양이군. 방법은 모르겠지만."

"공격이 아니었을 거란 말씀이십니까?"

"그게 제대로 된 공격이었다면, 겨우 이 정도 피해로 끝났겠느냐? 어디 하나 잘려 나가도 이상하지 않았을 텐데?"

"아……. 과연 그렇습니다, 사형!"

진현이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진법? 아니면?'

정확한 방법은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상대에게 기책을 쓸 줄 아는 이가 있다는 것이다. 애초에 비무가 아니라 전투를 유도한 이유가 바로 이것인 모양이다.

"잔재주를 부리는군."

진현이 검을 뽑아 들고 앞으로 두 걸음 나갔다.

"내 뒤를 따라 들어와라. 무슨 함정이 있을지 모르니 내가 선두에 서서 돌파한다."

"예, 사형!"

진현이 살짝 긴장 어린 눈으로 굳게 닫혀 있는 화영문의 정문을 바라보았다.

이 뒤에 뭐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과하게 신중했다가는 오히려 함정에 빠질 수도 있다.

"간다!"

진현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달려들어 문을 걷어찼다.

콰앙!

굉음과 함께 문이 산산조각 나 사방으로 비산한다.

피어올랐던 먼지가 가라앉고, 정적이 흘렀다.

'……함정은?'

마음의 각오를 하고 돌입했는데, 어떠한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곤 입구에서 멀찍이 떨어져 그를 멀뚱히 보고 있는 화산의 제자들뿐이었다.

"거, 문은 왜 부수나. 잠가 놓지도 않았는데. 여하튼 요즘 애들은 버르장머리가 없어."

청명이 혀를 찼다.

딴지를 걸고 싶은 부분이 너무나 많은 윤종이었지만, 지금은 적이 앞에 있다.

진현이 그들을 좌우로 한번 훑고는 미간을 좁힌다.

"이게 다인가?"

"뭐래?"

청명이 심드렁하게 대답하자 진현이 으르렁대듯 말한다.

"그대들만으로 우리를 상대하겠다는 건가? 대단한 자신감이로군. 그게 자신인지 오만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오."

청명이 뚱한 얼굴로 윤종을 돌아보았다.

"쟤 뭐라는 거야?"

"글쎄. 좀 익숙한 느낌이기는 한데."

청명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옛날 백천 사숙 보는 것 같지 않아?"

옆에 있다 뜬금없이 한 대 얻어맞은 백천이 이를 갈았다.

"……하지 말라고."

"흐지 믈르그."

"야!"

백천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백천 스스로도 지금 진현의 언행이 예전의 자신과 비슷하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천외천이 있다는 걸 모르는 이는 저렇게 되지.'

백천은 청명을 만난 후 머리가 깨져……. 아니,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정말 머리가 깨져서 현실을 알아 버렸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이제는 달라졌다 한들, 자신의 수치스러운 과거가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는 게 유쾌할 리가 없다.

"……빨리 끝내자."

백천이 붉어진 얼굴로 말하자 윤종과 조걸이 고개를 슬쩍 돌리고 웃음을 참았다.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는 진현의 얼굴에는 황당함이 피어났다.

뭔가?

저 여유로운 반응들은?

'혹시 다른 함정 같은 게 있는 건가?'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딱히 진법이나 기관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하기야 이 작은 장원에 무슨 함정을 설치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저런 태도로 그들을 맞이한다?

진현의 얼굴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것들이!'

문답무용으로 쓰러뜨려 버리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성이 풀리지 않는 느낌이다. 진현의 입이 열렸다.

"대체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오는지 모르겠구려. 과거부터 단 한 번도 무당을 이겨 보지 못한 화산이 이제와 대적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오?"

청명이 헛웃음을 짓는다.

"누가 한 번도 이겨 보지 못했대? 백 년 전에는 우리가 너희보다 셌거든?"

공식적으로 인정받진 못했지만 말이다.

"하? 백 년 전?"

진현이 피식 웃는다.

"그래, 그렇지. 그 백 년 전. 그대들이 그리 자랑스러워하는 그 매화검존의 시대."

"응?"

청명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저놈의 입에서 '매화검존'이라는 말이 나오니 뭔가 신기한 느낌이다. 화산에서도 잘 듣지 못했었는데, 그 말이 무당 제자의 입에서 나오다니.

"그대들이 그리 자랑스러워하는 매화검존이 무당의 태극검제께 패한 것을 알고 계시오?"

"뭐?"

백천의 입에서 새된 소리가 튀어나왔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거요?"

"하하하.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두 사람은 당대에 이미 비무를 한 적이 있소. 매화검존의 명예를 위해서 태극검제께서 그 결과를 숨기셨을 뿐이지."

"이……."

"화산 따위는 절대 무당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두는 게 좋을 거요."

그 말이 끝나는 순간 화산 제자들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들을 무시하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화산을 무시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

매화검존의 이름은 화산의 자존심이자 자부심이다.

"감히 그분에 대해 망발을 지껄이다니!"

"보자보자 하니 도를 넘는구나!"

"그분은 너희가 함부로 입에 올릴 분이 아니시다."

"……용서 못 해."

동문들의 반응을 본 청명의 가슴에 알 수 없는 서글픔이 밀려들었다.

나를 좀 그렇게 우대해 봐라, 나를 좀!

야, 이것들아! 내가 매화검존인데 나는 맨날 까면서!

아이고, 빌어먹을. 내 입으로 말도 못 하고! 이렇게 서러울 데가 있나!

하지만 그 기분과는 별개로, 청명은 진현의 말 자체에는 딱히 화가 나지 않았다. 그저 조금 황당할 뿐이다.

'와, 이게 역사 왜곡이구나.'

얼굴만 보면 당장이라도 선계로 등선해서 구름 타고 다닐 것 같던 그 말코 놈이 죽어도 비공개로 비무를 하자고 하기에 귀찮아서 그러자고 했더니.

뭐?

누가 누굴 이겨?

- 그대의 패악은 도를 넘었소이다. 같은 도가의 사람으로서 그대에게 진정한 도인의 길을 알려 주겠소. 나의 검을 무정타 탓하지 마시고 그대가 그동안 저지른 일들을 반성하시기 바라오.

- ……그, 그대의 능력이 나를 넘었음을 인정하겠소. 나의 수양이 모자람을 알고 물러나려 하오. 아니……. 물러나려 한다지 않소. 아, 아니 잠깐만!

- 그만 패시오! 많이 맞았소이다! 도사가 사람을 이렇게 패도 되는……. 악! 아악! 아니 말하는데 패는 게 어디 있……. 아아아악!

- 형님! 살려 주십시오!

"좋은 동생이었는데 말이야."

나이는 걔가 많았던 것 같기는 하지만. 지가 먼저 날더러 형님이라는데 뭐.

"응?"

"아냐. 아무것도."

청명이 손을 내저었다.

그 뒤로는 무당 근처에 들를 때마다 불러내서 제대로 벗겨 먹었지. 무한이야 워낙 잘나가는 동네라서 비싼 주루도 많았다. 무당 돈으로 주루 최상층을 전세 내고 최고로 비싼 술들을 마셔 대는 즐거움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썩어 가던 태극검제의 얼굴을 생각하니 뭔가 아련해진다. 아, 즐거웠지.

아니……. 지금 추억에 잠길 때는 아니고.

"와, 그게 이렇게 되네."

어차피 아는 사람 없고, 증거도 없다 이거지?

그때 청명의 반응을 오해한 진현이 비웃음을 담고 일갈했다.

"백 년 전 가장 강성하던 화산도 무당을 당해 내지 못했소. 그런데 이제 와 우리를 상대하겠다는 게 너무 오만한 처사라고 생각하지 않소이까? 그대의 자부심 따위는 무당의……."

"야. 그만하고 싸움 좀 하자! 어?"

"……."

청명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아니. 백 년 전에 누가 이기고 말고가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 백 년 전 사람이 네 뒤에서 응원이라도 해 줘? 걔들 다 죽었어, 인마! 그렇게 옛사람이 좋으면 무당을 하지 왜 도사를……. 아, 너 무당 맞지."

그래서 그랬나?

"……감히!"

"여하튼 이래서 고리타분한 것들은……."

심지어 왜곡되는 게 그의 과거라고 해도 청명은 딱히 화가 나지 않았다.

'그게 뭐가 중요해. 어차피 천마한테는 발렸는데.'

중요한 건 지금이다.

그리고…….

'저것도 힘 있는 놈이 하는 거지.'

지금 화산이 무당보다 강했다면 무당 놈들이 감히 저따위 말을 지껄이지 못했을 것이다. 거꾸로 말해 지금의 화산이 무당보다 압도적으로 강하다면 매화검존이 장삼봉보다 강했다고 주장해도 딱히 반발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역사든 돈이든 발언권이든 결국 모든 것은 강자의 권한.

그리고 청명은 그 사실에 딱히 불만이 없다.

'내가 센데!'

그거 다 내 건데, 뭐.

저건 화산이 무당을 때려잡은 뒤에 천천히 해결해도 될 문제다. 뭐 그리고 사실 딱히 해결 안 해도 상관없다. 지금의 청명이 과거의 매화검존 이상의 평가를 받아 버리면 되니까.

"정말 피를 봐야 정신을……."

"위 소협! 위 소협!"

진현이 뭔가 말을 하려 했지만 청명은 깔끔하게 진현의 말을 끊어버리고 위소행을 불렀다.

뒤쪽에서 상황을 주시하던 위소행이 얼떨떨한 얼굴로 되묻는다.

"예?"

"시킨 건 다 했죠?"

"소문 말입니까? 이, 일단 남영에 있는 이들에게는 말을 퍼뜨려 두긴 했는데."

"잘했어요. 그럼, 읏차!"

청명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무당의 제자들이 움찔하고 뒤로 살짝 물러선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청명의 검이 휘둘러지자 그의 검 끝에서 검기가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그의 검기가 향한 곳은 무당의 제자들이 있는 곳이 아니었다. 청명의 검기가 화영문의 담장을 수차레 베어 낸다.

쿠르르릉!

순식간에 화영문의 담장이 무너져 내렸다.

"뭐, 뭐 하는?"

위립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저 망둥이 같은 놈이 남의 집 담장은 왜 무너뜨린다는 말인가?

"아……."

하지만 무너진 담장 너머로 보이는 광경에 이내 위립산은 청명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담장을 둘러싸고, 남영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있었다.

무당과 화산이 화영문에서 한판 붙는다는 말을 듣고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구경을 하러 나온 것이다. 하기야 이만한 일이라면 누구라도 보고 싶지 않겠는가?

"내가 원래 판을 키우는 걸 좀 좋아하거든."

청명이 씨익 웃는다.

그들이 이곳에 온 목적은 단순히 화영문을 돕는 것뿐만이 아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화산이 무당을 꺾는 모습을 보게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하나하나 쌓아 올린 명성이 훗날에는 화산의 위상을 완성할 테니까.

"……좀 부담스러운데."

백천의 말에 청명이 피식 웃었다.

"할 거면 확실하게 하라면서요."

"그건 그렇지."

"그럼 이제 하나 남았네요."

청명의 시선이 무당의 제자들에게로 향했다.

"사형들. 몇 정도 가능해?"

"……음. 둘."

"나는 셋은 될 것 같은데?"

"그럼 다섯이고."

청명이 턱을 쓰다듬었다.

"유 사고가 넷 맡으면 되겠고. 백천 사숙이 쟤 맡으면 되겠네."

"그럼 너는?"

"내가 해?"

"……아니다."

보는 눈이 있는데 자제해라, 제발.

"그럼 가랏! 사숙! 사고! 사형!"

"하아……."

"끄응."

"어휴!"

화산의 제자들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앞으로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뭔가 거꾸로 돌아가는 것 같지만."

백천의 눈에 차가운 한기가 어렸다.

"무당의 제자라면 그동안의 수련을 증명하는 데 부족함이 없겠지. 가자, 얘들아. 화산의 검을 저들에게 보여 주어라!"

"예, 사숙!"

"예, 사형!"

그러자 등 뒤에서 퉁명스러운 음성이 들렸다.

"왜 내가 할 때랑은 반응이 다른데?"

넌 제발 좀 그 입 좀 다물어, 인마…….

61